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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군대가 개성 고분 파헤쳐 중국에 골동품·황금 밀수출”

  • 글: 김영일(가명) 전 평양 1여단 소속 외화벌이 일꾼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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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여름, 중국 공안당국은 북한의 외화벌이 사업에 깊숙이 개입했던 한 탈북자를 검거했다. 그는 중국 공안에서 “북한 내부사정에 환멸을 느껴 ‘김정일타도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고 진술한다. ‘신동아’가 입수한 진술서에는 그가 反김정일 운동에 나서기까지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90년대 말 사이 북한사회가 겪은 혹독한 시련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 악화일로를 걸어온 북한경제와 주민들의 피폐한 삶, 끔찍했던 대기근 시절의 목격담과 북한의 교도소 실태, 북한 최고위층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골동품·황금 밀매 현황 등을 담은 이 진술서를 두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편집자).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평양은 김일성 원수가 사는 곳으로 조선의 심장이다. 평양에서 출생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큰 복이므로 조선인민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다. 걱정 근심과 착취계급, 세금이 없는 유일한 나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모범적인 사회주의 국가 조선, 그 중에서도 평양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영광스러웠고 자부심을 가졌다.

나의 부친은 평양시 대성구 인민위원회에서 지도원 업무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먹고 입는 데는 걱정이 없었다. 반면 젊은 시절 나는 영화와 교육을 통해 남반부의 어린아이들은 아직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따라서 6·25 전쟁을 비롯한 민족의 비극을 불러온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를 몰아내야 한다는 복수심이 곧 나의 인생관이었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공화국은 유례없는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평양에 건설되던 지하철도 전쟁 준비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지하철 건설부대 경비대 소좌였던 친구 부친은 “평양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은 교통혼잡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발발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변 안전, 평양 시민 대피용으로 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1967년 준공된 지하철에는 지하 60m에서 120m 사이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하별장을 건설하기도 했고, 발전소와 영화관, 호텔 등 각종 편의시설도 지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 무렵 졸업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학과 좋은 직업을 마다하고 군 입대를 자원했다. 1970년 내가 주위 어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인민군에 입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군 입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말린 이는 어머니였다. 지금은 인민위원회 간부인 아버지가 군사동원부에 손을 쓰면 군대 대신 대학에 입학하도록 추천할 수 있지만, 10년 뒤 제대하고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가 간부직을 유지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내가 탄광이나 농촌에 배치를 받는다 해도 돌봐줄 방법이 없으므로 차라리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잡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였다.

선생님도 나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인민학교 4학년 때부터 평양 서성구 체육구락부에서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던 나는 매년 개최되는 전국 청소년 레슬링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입상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나에게 군 입대 대신 체육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고, 평양시 체육단 부단장과 28군대 체육단 레슬링 책임지도원이 여러 번 찾아오기도 했다. “국제대회 입상을 통해 온 세계에 수령님과 당의 권위를 선전하는 것 또한 군 입대 못지않은 훌륭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 제국주의와 박정희 괴뢰집단이 감히 전쟁을 도발한다면 복수의 총대를 높이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 전쟁영웅이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결국 나는 1970년 4월21일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대북방송의 유혹

부모와 동창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을 떠난 나는 최전방인 2군단 6사단 13연대 초소에 배치됐다. 개성시 삼성리에서 신병 훈련을 받은 후 개성시 개풍군 고남리 13연대에 도착한 것은 녹음이 우거진 7월 중순이었다.

개성에 도착하자 최전선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서울이 있다. 개성은 집집마다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였고, 부락에는 집집마다 가시가 꽂혀 있는 방망이와 고춧가루·밀가루 탄, 신호장비 등이 걸려 있었다. 상상 이상의 분위기에 압도된 입대 동기들은 모두 무서움에 떨었다. 양강도 혜산에서 왔다던 동철이는 어느날 밤 흐느끼며 내게 말했다.

“영일아, 간밤에 보초를 서는데 어찌나 떨리는지 죽는 줄 알았어. 무슨 공포증 같은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아.”

겉으로는 태연한 척 동철이를 나무랐지만 속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괴롭힌 또 하나의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평양에서는 부모님 덕분에 배를 곯은 적은 없었는데, 부대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식당 칠판에는 병사 1인당 필요한 열량과 음식량이 적혀 있었지만 병사에게 배급되는 양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 하사관들이 양식을 빼내 술이나 고기와 바꿔 먹으며 자기들의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전역을 앞둔 장교들이 집에 가져가기 위해 양식을 몰래 훔쳐내 민간인 집에 쌓아놓는 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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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영일(가명) 전 평양 1여단 소속 외화벌이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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