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군대가 개성 고분 파헤쳐 중국에 골동품·황금 밀수출”

  • 글: 김영일(가명) 전 평양 1여단 소속 외화벌이 일꾼

    입력2003-11-26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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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평양은 김일성 원수가 사는 곳으로 조선의 심장이다. 평양에서 출생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큰 복이므로 조선인민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다. 걱정 근심과 착취계급, 세금이 없는 유일한 나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모범적인 사회주의 국가 조선, 그 중에서도 평양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영광스러웠고 자부심을 가졌다.

    나의 부친은 평양시 대성구 인민위원회에서 지도원 업무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먹고 입는 데는 걱정이 없었다. 반면 젊은 시절 나는 영화와 교육을 통해 남반부의 어린아이들은 아직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따라서 6·25 전쟁을 비롯한 민족의 비극을 불러온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를 몰아내야 한다는 복수심이 곧 나의 인생관이었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공화국은 유례없는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평양에 건설되던 지하철도 전쟁 준비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지하철 건설부대 경비대 소좌였던 친구 부친은 “평양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은 교통혼잡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발발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변 안전, 평양 시민 대피용으로 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1967년 준공된 지하철에는 지하 60m에서 120m 사이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하별장을 건설하기도 했고, 발전소와 영화관, 호텔 등 각종 편의시설도 지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 무렵 졸업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학과 좋은 직업을 마다하고 군 입대를 자원했다. 1970년 내가 주위 어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인민군에 입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군 입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말린 이는 어머니였다. 지금은 인민위원회 간부인 아버지가 군사동원부에 손을 쓰면 군대 대신 대학에 입학하도록 추천할 수 있지만, 10년 뒤 제대하고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가 간부직을 유지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내가 탄광이나 농촌에 배치를 받는다 해도 돌봐줄 방법이 없으므로 차라리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잡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였다.



    선생님도 나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인민학교 4학년 때부터 평양 서성구 체육구락부에서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던 나는 매년 개최되는 전국 청소년 레슬링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입상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나에게 군 입대 대신 체육단에 입단할 것을 권유했고, 평양시 체육단 부단장과 28군대 체육단 레슬링 책임지도원이 여러 번 찾아오기도 했다. “국제대회 입상을 통해 온 세계에 수령님과 당의 권위를 선전하는 것 또한 군 입대 못지않은 훌륭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 제국주의와 박정희 괴뢰집단이 감히 전쟁을 도발한다면 복수의 총대를 높이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 전쟁영웅이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결국 나는 1970년 4월21일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대북방송의 유혹

    부모와 동창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을 떠난 나는 최전방인 2군단 6사단 13연대 초소에 배치됐다. 개성시 삼성리에서 신병 훈련을 받은 후 개성시 개풍군 고남리 13연대에 도착한 것은 녹음이 우거진 7월 중순이었다.

    개성에 도착하자 최전선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서울이 있다. 개성은 집집마다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였고, 부락에는 집집마다 가시가 꽂혀 있는 방망이와 고춧가루·밀가루 탄, 신호장비 등이 걸려 있었다. 상상 이상의 분위기에 압도된 입대 동기들은 모두 무서움에 떨었다. 양강도 혜산에서 왔다던 동철이는 어느날 밤 흐느끼며 내게 말했다.

    “영일아, 간밤에 보초를 서는데 어찌나 떨리는지 죽는 줄 알았어. 무슨 공포증 같은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아.”

    겉으로는 태연한 척 동철이를 나무랐지만 속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괴롭힌 또 하나의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평양에서는 부모님 덕분에 배를 곯은 적은 없었는데, 부대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식당 칠판에는 병사 1인당 필요한 열량과 음식량이 적혀 있었지만 병사에게 배급되는 양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 하사관들이 양식을 빼내 술이나 고기와 바꿔 먹으며 자기들의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전역을 앞둔 장교들이 집에 가져가기 위해 양식을 몰래 훔쳐내 민간인 집에 쌓아놓는 일도 많았다.

    북조선에서 평양 다음으로 잘사는 도시라는 개성이었지만, 우리가 주둔해 있던 개풍군 상동리 농민들의 생활은 전혀 여유가 없었다. 6월이면 1년분 양식이 떨어져 야생초와 과일을 식사대용으로 하는 집이 부지기수였다. 우리도 주위의 민가나 과수원을 습격해 과일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훔쳐 주린 배를 채웠다. 군에 입대해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인민의 재산을 훔치는 일이었던 셈이다.

    내가 배치받았던 13연대 정찰소대는 훈련강도는 세지만 자유시간이 좀 있는 편이었다. 훈련은 주로 권투와 격투로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비무장지대에 도착하면 우선 15일간 훈련을 받으며 참호생활을 했다. 그 뒤 부대에 돌아와 각자 부업을 갖고 자유 경작지에서 일을 하는 식이었다.

    전방부대 근무는 나의 인생관을 변화시킨 전환점이었다. 특히 군생활 10년 동안 남조선의 대북방송을 매일같이 들으면서 남조선의 정치상황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의문점을 갖게 됐다.

    처음에는 남조선 방송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철저히 교육받은 탓이었다. 그러나 이미 몇 년 근무한 선배들이나 개성 주민의 말을 듣게 되자 혼란이 가중되었다. 대북방송은 “남조선에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남조선 국민은 누구에게도 지배를 받지 않고 민주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남조선을 인간지옥이라고 배운 나 같은 이들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사상투쟁

    이 무렵 공화국에서는 사상투쟁이 한창이었다. 당과 군대를 가릴 것 없이 남로당과 소련파, 중국에서 건너온 파벌 등을 모두 제거하고 김일성 유일체제를 공고화하던 시기였다. 당 공산청년단, 직업동맹, 여성동맹 등의 단체들은 모두 김일성 수령 유일사상체제에 따라 사상투쟁을 전개했다. 이 기간 동안 반동분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모두 숙청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산골짜기로 유배됐다.

    외국 연애소설이나 탐정소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고전소설, 홍명희 선생이 쓴 ‘임꺽정’의 원고까지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또한 동의학(한의학)은 봉건적이고 낙후된 의학이라고 주장하고 동의원과 동의과를 없애버렸다. 침술기구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예술영역에서는 기타, 관현악기를 포함하여 유행가 반주를 할 수 있는 악기와 트럼프 카드, 화투 등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분위기가 이러했으므로 남조선 대북방송이 제일 많이 들리고 남조선 전단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최전선의 병사들은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1973년 무렵 우리 소대의 분대장이었던 이재연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늘어만 가는 ‘반역죄’

    이재연의 집은 평안북도 동림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축구공 다루는 솜씨가 정말 대단했다. 그의 형은 공화국 대표축구선수였다. 1966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8회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의 형은 어느날 당 중앙의 조사를 받고 양강도 산골짜기로 유배됐다. 1973년 4월 초 어느 날, 중대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침 9시, 전중대원이 교육실에 집합했다. 연대 간부 몇 사람과 보위지도원, 그리고 조직지도부에서 나온 2명의 고급장교가 참석했다. 중대 정치지도원이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중대 내에 출현한 반당, 반국가 경향의 분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중대 회의를 소집한다. 먼저 보위지도원 동무가 발언한다.”

    정치지도원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전 중대 100여 명의 병사는 일시에 긴장해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연대 보위지도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엄숙하게 전 중대원을 향해 이야기했다.

    “현재 중대 내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정찰소대는 독립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중대 일상생활과 활동에 잘 참석하지도 않고 조직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머리에 자본주의사상만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우리 내부를 와해시키고 우리의 목적을 해치려 하고 있다. 몇몇 사람은 적군의 전단을 보았으며 방송을 듣고 그들의 식품을 먹고 그들의 공산품을 사용했다. 이것은 반역행위이며 전군의 치욕이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심 없는 사상투쟁을 전개하고 또한 군사재판에 기소한다.”

    연대 보위지도원의 말이 끝나자, 미리 준비한 대로 소대 공산청년단과 몇 명의 군관, 하사관, 사병이 발언을 했다. 비판대상은 외국담배를 피웠거나 비누 등 남조선 공산품을 사용한 사실 등이었다. 이재연 동무를 포함하여 몇몇 하사관과 사병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은 연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토론에 참가한 사람들은 “적군 물품을 사용한 사람은 반당·반혁명 분자일 뿐 아니라 남조선 괴뢰와 한 패거리”라고 욕하며 몰아붙였다. 어느새 사람들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고 원한으로 가득했다.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그날의 사상투쟁은 하루종일 계속되었으며 그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저녁 취침시간에는 사상투쟁 대상자들을 경비분대 병상에 감금하고 보초를 세워 지켰다. 결국 이튿날 총결산 작업을 통해 이재연을 우두머리로 하여 3명의 하사관과 2명의 사병이 군사법정으로 이송되었으며, 5명의 하사관과 사병은 해직되거나 조직처벌을 받았다. 나 또한 소대 공산청년단(공청단) 부위원장으로서 소대 내에서 발생한 상황을 적시에 보고하지 못한 죄로 엄중히 비판을 받고, 공청단 부위원장 직을 박탈당했다.

    1970년 무렵 최전선 군대에서는 남조선에서 들어온 담배, 식용유, 사탕류 등이 드물지 않게 사용되곤 했다. 당시 인민군은 병사들에게 담배를 배급하지 않았다. 인민생활과 국방건설에 돈이 많이 들어 150여 만명의 군대가 소비하는 담배까지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부식품이나 비누도 얻어 쓰기가 힘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조선에서 넘어온 담배와 사탕류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물론 남조선 담배에는 독이 들었다거나 사탕류는 먹으면 1년 내에 암에 걸려 죽는다는 등의 선전 때문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근무기간이 오래된 부대원이나 시민 중 적잖은 이들이 남조선 물건을 사용하곤 했다.

    이재연 분대장과 함께 숙청된 조응필 분대장은 1967년부터 군복무를 시작했다. 내가 정찰소대에 배치받자, 그들은 나를 ‘평양 건달’이라고 놀리면서도 친동생처럼 보살펴주었다. 야간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자주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숙청에 적잖이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남조선 담배나 사탕은 같은 조선 동포의 물건이 아닌가. 공화국이 담배를 배급하지 못할 때 같은 민족의 물건을 사용한 것이 어떻게 반역죄가 될 수 있는가. 교육을 통해 처리해도 될 사건을 기어코 군사법정으로 이송하는 이유는 뭔가.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장래와 가족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의 운명에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생겼다. 그들이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전중대에서 그들과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연 동무와 응필 동무를 우두머리로 한 몇 명의 ‘반도들’이 숙청당한 후에도 적군의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붙잡혀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다른 지방으로 유배되어도 유사한 반역 행위는 계속되었다.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자기 대원이나 정치지도원을 죽이고 남쪽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는 점이다. 10년 복무기간을 거의 마쳤지만 성분이 좋지 않거나 부모의 품행이 문제가 되어 당에 가입할 수 없는 병사들이 자신의 처지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월남하곤 했던 것이다.

    전우 몰살하고 탈영하는 병사

    개성시 장풍군에 주둔하는 2군단 6사단 15연대의 독립부대는 부업을 전문으로 하는 소대였다. 부소대장 책임 하에 개성시 장풍군 가곡리에서 부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소대에 함흥에서 입대한 군인이 하나 있었다. 키가 178cm에 체중이 75kg인 국철이라는 이름의 상등병이었다.

    그는 엄청난 대식가였다. 그 식사량 때문에 그는 곧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놈과 남조선 괴뢰가 먹을 것을 주면 너는 누구든지 따라갈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또한 힘든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공청단 회의 때마다 쏟아지는 비판에 불만을 품은 그는 결국 고민 끝에 독한 결심을 내렸다. 그가 일을 저지른 날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로 북조선 최대의 휴일이었다. 휴일 분위기에 젖은 독립소대 하사관들은 소대양식을 주고 주민들로부터 술을 받아다 하루종일 마셨다. 저녁이 되자 모두 취해 곯아 떨어졌다. 며칠 동안 빈틈없이 준비해온 국철은 행동을 시작했다.

    2월17일 0시, 그는 소변을 보는 체하면서 초소를 조사했다. 초병은 마침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었다. 국철은 건너가서 보초병에게 말을 걸다가 목졸라 죽이고 무기를 빼앗았다. 당시 전투병은 자동소총 탄환 120발과 수류탄 2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국철은 병영으로 뛰어들어 무기고를 열고 탄환과 수류탄 2상자를 꺼내 밖에 숨겨두고 양식을 배낭에 담았다. 그리고는 다시 병영으로 뛰어들어가 ‘기상’이라고 크게 소리를 지른 뒤 자기를 비판해온 대원들을 향해 120발의 탄환을 퍼부었다. 소대원 전원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 후 국철은 탄환 1상자와 수류탄 1상자, 부식품을 등에 메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정찰소대원이었기 때문에 수색행렬에 끼여 그를 찾으러 다녔지만 그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사건은 1970년대 인민군 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했다.

    사고가 이어지자 조선인민군은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각 분대 보위지도원의 힘을 강화하기로 했다. 전 전선의 경비구 각 중대에 보위지도원을 파견하고 1개 분대 내에 보위지도원의 비밀 첩자 2명을 두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지휘관, 하사관, 전투원들의 사상동향을 조사해 매주 한 차례씩 보위지도원에게 보고했다.

    나도 중대 보위지도원의 비밀 첩자가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1975년 봄 중대 보위지도원이 나를 찾아 개별 면담을 했다. 앞으로 2~3년간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입당과 대학진학을 도와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나에게 중대 상황과 군인들의 사상동향을 물어보았고, 특히 전역을 앞둔 대원들의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 그는 “보위업무를 돕는 것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지도자를 떠받드는 임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잘 생각해보고 1주일 후에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앞으로 보위지도원의 눈에 거슬리는 자는 재연 동무나 응필 동무 같은 운명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통일 조국의 위대한 영웅이 되려고 대학 진학도 안 하고 전선으로 왔지만, 우리 군대는 매일 인민들의 재산을 훔치고 조직 내부의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부모님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군복무에 대한 명예심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평양으로 돌아가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조직의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요구는 곧 명령이었다. 나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비밀엄수에 관한 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서약서의 규정은 만일 서약을 위반하면 군법 또는 형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보위지도원은 대원 개개인에 대한 사상동향과 행동감시 방법, 보고순서 등을 알려주었다. 중대장에서부터 전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감시 대상이었다.

    그후 나는 보위지도원의 협조원이 되어 열흘에 한 번씩 장교와 사병들의 생활상황을 탐지해 보고했다. 이는 사람을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동고동락하는 전우를 감시하고 그들을 모함하는 것은 분명 일종의 오욕이었다. 나는 자주 자책에 빠지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그러다가 보위지도원의 비밀첩자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숙청, 탄광촌 배치

    1974년 중반의 엄청난 사상투쟁 와중에 우리 집에도 불행이 닥쳤다. 아버지가 투쟁대상이 되어 청진으로 유배당하고 해직되었던 것이다. 강연중 당 정책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때 김일성 교시 원문에 따르지 않고 자기 식으로 약간 고쳐서 강연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조총련계 동포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켰다는 죄목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유배되어 철강 인부가 되었고 대학교수였던 어머니도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초인간적인 희생정신을 발휘해도 앞길은 뻔했다. 당 가입이나 대학 진학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의욕을 잃은 나는 무너져갔다. 군 생활도 흐트러졌다.

    결국 진절머리나는 11년의 군복무를 끝낸 후 내가 배치받은 곳은 고향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 덕천광산의 지하석탄 갱도였다. 덕천에 도착해 간단한 안전교육을 받은 뒤 휴가를 받아 부모님이 계시는 청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평양은 나에게는 금지된 땅이었다.

    청진으로 가는 열차는 만원이었고 참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청진까지는 꼬박 이틀 두 밤(2박2일)이 걸렸다. 11년 군복무 후 남은 것이라곤 빈 배낭과 부대를 떠날 때 전우들이 모아준 돈 몇 푼, 몸에 걸친 군복이 전부였다. 당초 어머님의 권유를 따르지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다. 제대 후에는 영웅이 되어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인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의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사랑도 덧없는 것이었다. 군 시절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던 여동생의 동창생 경순이는 사랑을 맹세하고 내가 제대할 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해직되어 지방으로 유배되자 그녀는 소식을 끊어버렸다.

    청진에 도착해보니 상황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부친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있었고 어머니는 송평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누이는 청진의 철강공장 직공과 결혼해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데 석탄광산에 배치를 받았으니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는 11년 만에 처음 만난 아들에게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으니 좋다”고 중얼거렸다. 누이는 이미 애기 엄마가 되었고 어머니도 그 동안 많이 늙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말수가 줄었다.

    처음 만나는 매제와는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정말 살기가 힘들어 처가를 돕기가 어렵다”며 매제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니 집에 오래 머무는 게 짐이 될 뿐이었다. 11년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열흘도 머물지 못하고 탄광을 향해 길을 떠났다.

    평양이 보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간리역에서 하차해 무턱대고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평양에 들어가는 통행증이 없기 때문에 간리 10호 초소에서 붙잡혀 집결소에 감금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친척과 친구들을 한번 만나고 싶어 고향에 가는 길이라는 이유는 통하지 않았다.

    집결소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보리밥 반 그릇과 갓에 소금을 넣어 끓인 국 한 그릇이 전부인 식사는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60여 명 남짓한 집결소 수감자들 사이에도 계급과 신고식과 폭력이 있었다. 레슬링으로 단련된 나는 큰 화를 당하지 않았지만 함께 입소한 남자는 거의 초죽음이 되었다. 나로서는 처음 당해보는 말도 안 되는 고생이었다.

    간리집결소는 지방으로부터 자의적으로 평양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1970년대 초에 특별히 설치했다고 한다. 평양에는 외국인이 많기 때문에 시민의 옷차림과 행동도 사회주의 격식에 부합해야 했다. 지방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평양시의 면모를 해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변 안전을 위해 평양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집결소를 설치해 통행증 없이 평양으로 향하는 이들을 감금하는 것이었다.

    집결소 수용기간은 15~20일이었다. 3~5일이 지나면 수감자의 소속회사(조직)에 통보를 하고 소속조직은 양식표를 가지고 와서 수감자를 데려갔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면 수감자를 데려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40일 동안이나 감금되는 사람도 있었다.

    인민군을 전역하고 나서 겪은 첫 사회생활 체험이 육체 및 정신상의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이 자기 땅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회주의가 바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날이 갈수록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다.

    집결소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나는 학교 다닐 때 절친했던 친구인 용철에게 편지를 써서 석방되어 나가는 사람 편에 전했다. 용철은 안전국 안전부 정치부장의 기사였다. 감금된 지 열흘 만에 용철이 승용차를 몰고 와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고향은 이렇게 10년 만에 나를 마중해주었다.

    공화국에서의 빈부격차

    평양 경림동에 있는 용철의 집은 호화로웠다. 그의 부친은 당 중앙위원회 과장이었다. 방마다 컬러 텔레비전이 있었고 녹음기, 라디오, 냉장고, 선풍기 등도 있었다. 주방에는 세탁기와 가스레인지까지 있었다. 용철의 부인은 대극단의 무용수였다. 10년 만에 만나는 용철과 그 부모님, 낯선 용철의 부인은 나를 극진히 맞아주었다. 저녁상은 실로 몇 년 만에 만나는 풍성한 자리였다.

    중앙당은 당 간부들에게 15일에 한 번씩 육류, 생선, 사탕류, 남쪽지방 과일, 담배, 의복 등을 배급했다. 그들에게 평양은 지상천국이었다. 공화국 5대 휴일(신정과 2·16 김정일 생일, 4·15 김일성 생일, 9·9 공화국창건기념일, 10·10 당 창건일)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하사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몸은 한없이 편했지만 마음은 간리집결소에 있을 때처럼 편치 않았다. 용철의 집은 우리 집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보통사람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구경도 하기 힘든 사탕을 용철의 딸은 안 먹겠다며 투정을 부렸다. 용철은 매일 저녁 자기 친구들을 찾아 안전부장 차에 태워 옥류관, 수산물 직판관, 기림각 등 평양시 고급 식당의 귀빈실에 가서 같이 식사를 했다. 보통시민이라면 사전에 예약표를 사야 하고 또 2~3시간 기다려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무사 통과였다.

    “너는 어떻게 그리도 발이 넓으냐”고 물어보았더니 용철은 악간 뽐내는 투로 말했다.

    “평양시 안전부 간부는 이 차를 타고 안 가는 곳이 없어.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백화점, 상점 등을 다 돌아다니지. 그러니 식당의 주방 책임자는 다 내 얼굴을 알아봐. 그들이 안전부를 찾아 부탁을 하려면 우선 나를 먼저 찾아와야 하거든. 우리가 식당 귀빈실에서 먹는 식사는 전부 공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원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유일지도체제의 10대 원칙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들은 공화국 형법에 속하지 않는 특수집단의 사람들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은 내가 덕천탄광에 배치됐다는 것을 알고 부모와 친구들의 인맥을 동원하여 고향으로 이동시켜주려고 했다. 힘 있는 기관의 전화와 약간의 뇌물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고마웠지만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북조선과 모범적 사회주의 국가의 끝이 어디인지 좀더 체험하고 싶었다.

    용철의 집에서 나흘간 귀빈 대접을 받은 후, 나는 군복무 당시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던 서철의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선반 노동자였던 그의 집은 평양시 아성구 서산1동 장산여관 바로 뒤편에 있었다. 그 집은 옛 모습 그대로여서 주방과 방 하나뿐이었다. 작은방은 10m2가 채 안 되었다. 이 좁은 방에서 서철의 부모님과 동생 두 명, 서철과 부인, 아들까지 일곱 명이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서철의 가족들은 마치 엄마제비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제비새끼처럼 국가에서 주는 배급품에만 의존해 살고 있었다. 용철네 집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수도인 평양 안에서도 빈부차이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고향 또한 옛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탄광촌의 분노

    덕천을 떠난 지 1개월 만에 광산으로 돌아왔다. 석탄광산 일은 힘겨운 중노동이었다. 모든 괴로움을 참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군대를 전역해 새로 덕천광산에 배치된 사람 300명 중에 절반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집안이 어렵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의 속셈은 달랐다. 진짜 이유는 광산의 작업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데 있었다.

    이들은 갱도에 들어가 일해본 경험이 없었다. 300명 중 8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고, 한번 갱도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모두들 공포와 불만에 가득 찼다.

    광산측에서는 일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양식을 배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은 옥수수밭과 개인 경작지에서 양식을 훔치기 시작했다. 군대 내에서 이미 도둑질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원래 감옥에서 출옥한 사람과 노동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살인, 절도, 구타 사건 등이 전국에서 제일 심하다는 덕천 광산지역이었는데, 전역군인까지 가세해 소란을 피워대자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중앙당 지도원, 도당, 시당, 탄광 당위원회는 매일 조직강연회를 개최해 “수령님이 염려하고 계시다”며 떠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방법은 없었다.

    “어찌하여 이 가운데는 광부 자식만 있고 간부의 자식은 하나도 없는 거요? 만약 여기에 간부 자식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바로 갱도에 내려가 일을 하겠소. 나더러 탄광에서 일생을 썩으라는 말이오?”

    분노의 목소리가 사그러들지 않자 탄광측에서는 법에 따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탄광 갱도를 따라 1개 단위조직을 만들어 광부회의를 소집했다. 이유 없이 결근한 사람과 주모자는 분리하여 노동교도소와 강제노동대 또는 당 조직처벌과 공산청년단 처벌로 이송했다. 살벌한 분위기가 탄광을 뒤덮었다.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 것인가. 1982년 1월10일, 소한의 맹추위가 위력을 보이던 겨울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통행증을 신청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아버지는 이미 산 위에 누워계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 공화국, 김일성의 조국은 왜 이렇게 험악한가? 이 세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내가 북조선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김일성을 위해 청춘을 바쳐 군복무를 끝낸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탄광과 죽음 그리고 처벌뿐이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는데 왜 임종을 지켜볼 수 없는 것인가. 내 나라, 내 땅을 밟는데 통행증이 왜 필요한가.

    ‘돈을 벌어야 한다’

    탄광에서 조속히 돌아와 옆에서 돌보지 않으면 어머니마저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친구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친구들이 청진에 와서 나의 당 관계 업무, 양식 관계 일, 인사이동허가증, 호적수속 등 모든 일을 완전히 처리해주었다. 혼자 힘으로는 몇 년을 해도 끝내지 못할 일들이 한 순간에 완전히 해결됐던 것이다.

    군 생활 당시 알게 된 개성의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용철은 승용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와서 평양까지 태워다주었다. 나는 용철이 소개해준 개성 안전국의 승용차를 타고 개성에 도착했다. 삼엄한 초소를 모두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13연대 상황은 예전보다 훨씬 열악했지만 전우들은 우리 결혼을 위해 쌀 50kg과 피복, 돈 등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이 모든 물건이 부대에서 훔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고 해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꼼짝없이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만을 기다려야 하는 제비새끼와 같은 삶.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화벌이 일꾼 탈북자의 육필수기 (상)
    결심을 했다. 권력이 없으니 돈을 벌어야겠다고. 비록 사회주의 국가지만 권력이든 금전이든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권력 없이 돈을 벌려는 것은 칼을 입에 물고 앞으로 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결혼은 했지만 일자리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근 1년간의 노력 끝에 용철의 도움으로 평양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8·15훈련소의 수산물사업소에 원료 동원 및 자재 지도원으로 취직했고, 처는 유치원에 교사자리를 얻어 노래와 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년 후 우리는 딸을 가졌다. 어머니도 퇴직하고 집에서 쉴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북조선의 경제위기는 심각했다. 공장과 기업이 문을 닫자 원료와 자재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았다. 양식이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양식 배급 때는 외국에서 수입한 가축사료를 사용했으며 그나마 떨어져 곧 식량난이 닥쳤다.

    이 무렵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하여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이는 북조선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북조선 상인들은 중국에 해삼, 소라, 오징어, 명태, 성게 등 해산물을 공급하여 돈을 벌었다. 북조선의 수산물과 금, 은, 동 등이 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의 담배, 의복 등이 조선으로 수입되었다. 인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질수록 조선과 중국의 국경밀무역은 성행했다.

    1988년 3월, 청진시 교도여단(예비역군대 지휘부)의 서기 이태영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일본 조총련계 상인을 한 사람 알고 있었는데, 이 상인이 고려와 조선시대 자기, 병풍, 벽걸이 그림 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물건을 취급하면 외화벌이를 할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북조선에서 인민이 직접 달러를 만지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다

    고려자기는 개성에서 많이 출토되었고 조선자기는 공화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 물건들을 평양으로 운송해 태영의 친지를 통해 조총련계 동포에게 넘기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평양은 수도이고 개성은 신해방구였기 때문에 특별통행증이 필요했지만 이 또한 평양시 안전국에 있던 용철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평양에서 통행증 번호를 청진으로 하달하면 군부대 서기에게 미화 100달러와 일본돈 1만엔을 뇌물로 주고 바로 발급받았다.

    1988년 당시 골동품 가격은 현재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고려청자 화병이 높이 30cm, 품질이 일등급 정도면 현재 가격은 미화 5만달러에서 10만달러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아무리 좋은 골동품도 소련제 컬러텔레비전 한 대 값밖에 못 받았다. 공화국은 개성에 골동품 상점을 열어 조선시대 용담자(용을 그려넣은 단지), 주화병, 병풍, 벽걸이 그림 등을 중국산 여자옷감이나 우산, 양산 등과 바꾸었다.

    이후 나는 황금 장사가 골동품 장사보다 이윤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황금 1kg은 미화 5000달러 정도였으므로 골동품에 비해 몇 배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황해남도 배천 지구에서는 사금이 상당량 나왔다. 또한 생활이 어려운 덕천광산, 흘동광산의 금광 인부들이 황금을 몰래 빼내 상인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평양과 배천, 개성을 왕래하면서 황금과 골동품 장사를 했다. 개성은 내가 군복무를 한 도시이자 처가가 있었기 때문에 왕래가 잦아도 의심을 적게 받았다. 특히 내가 복무했던 고남리, 상동리 일대에서는 일등급, 이등급 고려청자가 많이 나왔다. 개성시 개풍군 상동리 13연대 1중대의 군인들은 달러의 달콤한 맛을 보고는 줄줄이 골동품 장사에 뛰어들었다. 웬만한 고분은 다 파헤쳐졌다.

    당시 인민군대는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대전 준비를 위해 자금을 마련중이었으며 무기와 마약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당의 자금 조달을 위해(김일성, 김정일이 사용할 외화) 노동당, 각 도당위원회, 시당위원회, 군당위원회에 38호 사무처를 설치했다. 전국의 외화는 모두 이 38호 사무처에서 책임지고 관리했다.

    나는 처음에 골동품과 황금장사를 하면서 외화벌이를 하는 지도원과 군인 몇 명을 알게 되었다. 이후 외화를 사용하여 장사를 하게 되자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무역회사 소속 외화벌이 거래인은 거의 다 알게 되었다.

    나는 용철의 추천으로 91훈련소(평양시 방위사령부)에서 관할하는 청진지사의 외화벌이 지도원을 맡게 되었다. 비로소 전문 장사꾼으로 변신한 셈이었다. 이후 승용차를 한 대 구입해 해삼, 오징어, 골동품, 황금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물자 공급도 줄어들었다. 평양 이북의 함경북도, 함경남도, 양강도, 자강도, 강원도는 1988년부터 물자 공급이 줄었으며 주민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다.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기괴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여자들은 자기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길러달라고 줘버리거나, 손수건에 이름과 생일을 써서 웃옷에 달아주고 외진 곳에 버리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가다 화장실 갔다 오는 동안 잠시 봐달라고 옆 사람에게 맡겨놓고 달아나는 등 아기를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자기 품안에서 아기가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 남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보육원이나 파출소 문 앞에는 한두 살바기 아기가 심심찮게 버려졌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곳곳에서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청년학생대전의 악몽

    그러나 이 무렵 김일성과 김정일은 오로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여론을 조성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국제단체를 찾아가 평양에서 제13회 세계청년학생대전을 개최하겠다고 성화를 부리고 그 준비를 위해 평양에 전국의 청년을 불러모아 각종 건설공사를 벌였다.

    그렇듯 무리하게 추진된 건설현장에서는 사고가 많았다. 광복가에서는 짓고 있던 25층 아파트 한 채가 무너져 내려, 일하던 인부 수천 명이 깔려죽었다. 김정일은 중장비를 동원해 현장 정리를 명했다. 건물 잔해와 시체를 동시에 처리해버린 것이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1년 안에 완공하기 위해 인민군대를 동원했다. 재정과 양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변변한 기계나 장비도 없이 인력만으로 500리에 달하는 공정을 끝마쳤다. 사리원, 평산, 개성의 주거지역은 폭파작업으로 인해 아파트 유리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작업을 하는 인민군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민가에서 기르는 가축을 잡아먹고 물건을 훔쳤다. 민간인들은 생명과도 같은 가축을 지키려고 방 안에 옮겨놓고 밤에는 같이 잠을 잤지만, 배고픔에 혈안이 된 군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쳐들어가 빼앗았다.

    소문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을 목격한 황해북도 서홍군의 당 책임자가 김정일에게 사건을 상세히 보고했다고 한다. 인민군대가 규율이 없어 군·민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인민군대가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서홍군 당 책임자는 해직당해 국가보위부 15호 관리소로 이송되었다.

    군인들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1년 안에 500리 구간 공사를 완공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철근이나 작업공구 같은 기본적인 자재마저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으며 하루에 4~5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배고픔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식량을 빼내 술을 바꿔먹는 장교나 하사관은 어디에나 있었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 건설도중 생명을 잃은 인민군이 수천 명이었고, 특등급, 일등급 명예군인(상이용사) 또한 엄청났다. 황해북도 6km 공사구역에서는 금주교가 무너져내리는 사고로 700여 명이 생명을 잃고 1000여 명이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이 모든 사고가 “남조선의 안기부가 세계청년학생대전을 방해하기 위해 특공대를 파견해 폭파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당은 결국 인민의 피와 땀의 대가로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대전을 개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선인민의 생활수준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외국 기자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문구를 미리 만들어 ‘대회 영접에 필요한 여러 가지 마음의 준비’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또한 인민반마다 모범가정을 선발하여, 컬러 텔레비전과 선풍기, 냉장고 등을 그 집에 설치하고 과자, 과일, 사이다와 같은 식품을 준비했다. 외국기자나 여행객이 북조선의 가정을 방문하고 싶어할 경우에는 이런 모범가정으로 안내했다.

    삼엄한 감시 속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대전이 개최되었다. 김정일은 그 준비를 위해 국내의 외화 재원을 모두 동원했다. 마약, 가짜 황금, 위조달러 등 각종 밀매로 벌어들인 외화를 학생대전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대전이 끝난 후 재정결산을 하면서 김정일은 외화벌이를 담당했던 무역회사를 ‘유령회사’라고 비난했다. 그들이 중간에서 돈을 착복했다는 뜻이었다. 무역회사 직원들은 ‘남조선 안기부의 돈을 받고 간첩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총살당했다. 이 대대적인 숙청대열에서 나 또한 안전할 수 없었다. 먹구름이 밀려왔다.

    “이건 함정이야”

    사단은 내가 황해도 배천에서 구입해 회사에 보낸 황금 2kg 때문에 일어났다. 회사는 중국 화교를 통해 이 황금을 운반하던 중 압록강 철교 국경에서 중국 세관에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그 무렵 청진에 머물고 있던 나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지사 사장을 포함해 5명이 사회안전부에 연행됐다.

    1989년 11월20일 청진시 안전국은 체포영장을 가지고 나를 체포하러 왔다. 우리 집에 있던 텔레비전과 녹음기 등 값나가는 물건은 대부분 압수당했다. 2시간 동안의 수색 후 남은 물건은 쇠솥과 그릇 몇 개뿐이었다. 평양의 용철과 본사 사장에게 연락하려고 시도했지만 기회가 전혀 없었다.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구류소 생활은 처참했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에는 50~60명 정도의 죄수가 있었는데 간수가 죄수들을 구타할 때 들리는 소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10% 정도 콩을 섞은 옥수수에 소금국이 전부였다. 벼룩과 이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책상다리를 하고 머리는 45도 정도로 숙이고 앉아 있어야 했다.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발이 저려 조금 움직이기라도 하면 간수가 처벌을 가했다. 가장 참기 어려운 처벌은 식사 감량이었다.

    우리 방에는 모두 13명의 죄수가 있었다. 5명은 절도범, 2명은 소매치기, 2명은 열차전문 절도범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가축 절도범이었다. 이들은 농담 삼아 자신들을 ‘조정위원회’라고 불렀다.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은 훔치지 않고 잘사는 간부나 귀국교포(조총련계 동포)의 집만을 전문으로 훔쳐 ‘부를 조정했다’는 뜻이었다. 다른 방에는 굶주림에 못 이겨 다른 사람의 시체를 먹은 사람이 2명 있었다.

    우리 감방에서 가장 측은한 사람은 라남구의 19살 먹은 32호 죄수 수남이였다. 수남의 부친은 김책 철강공장에서 일하다가 1980년 초 작업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수남은 4녀1남의 외아들이었다. 어머니 혼자서 5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가족 모두가 모진 고생을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먹는 것이 부실했던 수남이는 제대로 자리지 못해 키가 겨우 150cm였다.

    시집간 수남이의 누나가 아기를 낳았지만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5개월 된 어린 조카가 굶고 있는 것을 본 수남이는 고심 끝에 도둑질을 결심했다. 멀리 떨어진 농촌마을에 가서 매형과 함께 몰래 돼지 한 마리를 잡아다 팔아 양식을 샀다. 그러나 열흘도 못 가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 후 수남이와 매형은 청진 일대에서 개와 돼지 등 가축을 훔치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돼지 6마리와 개 3마리를 훔친 수남은 결국 안전부에 잡혀 구류소에 끌려왔던 것이다.

    “자백하면 살려준다”

    10일 후 나는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평양시 사회안전부 구류소는 만경대구 풍수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류소 내에는 70~80명의 중앙 일급 간부와 무력부 무역회사 대외무역국의 거래인들이 억류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공화국 최대 살인사범, 평양시 살인식인사건을 저지른 부부가 8호실 감방에 감금되어 있었는 것이었다.

    내가 감금된 7호 감방에는 5명의 죄수가 있었고 감방장은 최고인민위원회 38호 처장이었다. 최고인민위원회 38호 처장은 각도 인민위원회가 거두어들인 외화 재원을 투자해 남포와 문천 제강소에서 생산한 알루미늄과 아연을 일본 선박에 적재한 후 자기가 미화 10만달러, 과장이 5만달러, 책임지도원이 3만달러, 화대군 인민위원장이 2만달러를 각각 나누어 가졌다가 들통이 나 끌려왔다. 최고인민위원회 38호 처장은 김정일을 욕하면서 말했다.

    “평양시 외화상점, 외화식당은 당 중앙이 자금을 조달하는 곳이야. 나는 일생 동안 그들 심부름만 했다고. 이건 함정이야.”

    1990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38호 처장은 남포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죄를 저지른 또 한 사람의 간부는 20년 중형을 선고받고 사리원 사회안전부 제7노동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2년을 못 넘기고 옥중에서 죽었다.

    내 사건도 곧 심리가 시작되었다. 예심을 책임진 사람은 사회안전부 예심원 대령이었다. 내 혐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형법 제72조(국가재산 중횡령죄)와 118조(민중교란죄) 제2항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예심원은 “이미 네가 일하던 회사 사장 등이 진술했기 때문에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다”고 잘라 말했다.

    “피고 영일은 국외에 황금을 팔아치웠다. 이는 수령님의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은 짓이다. 너의 죄과를 보면 백번 죽어도 마땅하나 우리 당의 관대한 정책이 있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할 수 있다.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죄와 부당행위를 전부 자백하고 비판하라. 네가 살고 죽는 것은 너의 자백과 비판 여하에 달려 있다.”

    “나는 그 황금이 국외로 달아났는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나는 단지 13차 청년학생대전을 위해 외화벌이 황금 거래 임무를 받고 일한 것뿐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의 이 말 한 마디가 예심원을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소리를 질러댔고 그날 오후부터 시작해 쉴새없이 나를 괴롭혔다. 간수들은 한 시간마다 찾아와 벌을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부인했다. 무조건 부인하면 살길이 있다고 청진 구류소에 있을 때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는 11개월의 예심을 거쳐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사리원 제7노동교도소

    11개월의 감옥생활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공화국은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세계였다. 이 기계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법의 제재를 받았다. 하층 직공, 농민의 자식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상층 대열에 들어갈 수 없으며, 간부의 자식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부친의 덕으로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렸다. 때문에 간부들은 자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아첨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좋은 집을 얻고 자녀에게 좋은 직업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공화국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는 것은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감옥 생활 중에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사장이 하라고 한 일을 했을 뿐인데 오히려 모든 잘못은 다 나에게 돌아왔다. 사장을 비롯해 배경이 든든한 간부의 가족들은 법적 책임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나와 동료 정철은 10년형을 언도받고 사리원 제7노동교도소로 이송되어 수감된 것이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6~7m의 높은 담과 전기 철망, 기관총을 걸어놓은 포루 등이 있는 무시무시한 교도소였다. 지옥과 같은 삶의 시작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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