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11-28 1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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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려 비상하는 중국.
    • 용틀임이 한창인 대륙에서도 쑤저우는 변화가 가장 빠른 도시다.
    •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이면서도 외자유치 실적은 중국내 1위. 이런 묘한 양면성을 조화롭게 지탱하는 한 축이 쑤저우공업원구다. 전통과 현대성의 공존을 가능케 한 이 신도시 탄생의 비밀은 철저한 도시개발계획에 있다.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쑤저우공업원구 전경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옛말이다. 중국인들이 천당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고장으로 손꼽히는 두 곳이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와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다.

    이중 인구 690여만의 쑤저우(蘇州)시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수도로 번성했던 고도(古都)로 25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다. 당시의 흙먼지가 그대로 날리는 듯 착각할 정도로 전통 문화유적이 잘 보존돼 있는 데다 크고 작은 원림(園林)들까지 지닌 ‘정원도시’다. 게다가 수로와 운하가 발달해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는 ‘수향(水鄕)’이어서 오래 전부터 남중국(南中國)의 대표적 명승지이자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받아왔다.

    그런 쑤저우시가 오늘날 탈바꿈을 거듭하며 옛 영화의 복원을 꾀하고 있다. 국제수준의 대기업이 잇따라 모여들면서 쑤저우시가 속한 장쑤성 일대뿐 아니라 전중국을 통틀어 주목받는 신흥 산업도시로 떠오른 것이다. 쑤저우는 ‘달라진 중국’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보기다.

    이는 물론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베이징(北京) 중관춘(中關村)과 더불어 중국의 21세기 ‘경제 대장정(大長征)’을 주도할 구심점으로 부상한 상하이(上海)의 배후도시라는 이점 덕이 크긴 하다. 하지만 쑤저우가 ‘성공시대’를 맞이하기까지 그 이면엔 결코 만만찮은 노력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의 흔적들이 빚어낸 결정체가 바로 쑤저우공업원구(蘇州工業園區, 이하 원구)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곳”

    6년 전 개통돼 상하이와 난징(南京)을 잇는 왕복 4차로의 후닝(?寧)고속도로. 상하이 푸둥(浦東)국제공항을 출발, 공항에서 160km 가량 떨어진 쑤저우시로 향하는 2시간 내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자못 목가적이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드넓은 논밭과 그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소담스런 ‘흑와백벽(黑瓦白壁·검은 기와지붕에 흰 벽)’의 2층짜리 농가들…. 중국 강남(江南·長江이남)지역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다.

    그러나 ‘蘇州工業園區 2km’라고 쓰인 이정표가 나타날 즈음 해서 논밭은 점차 사라지고 높이 솟은 송전탑의 행렬이 이어진다. 쑤저우 인터체인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곳곳에서 포크레인 등 중장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건설현장이 희부연 하늘을 배경으로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서울의 삼성 본사로 출장을 갔다가 복귀하는 길에 기자와 동승하게 된 쑤저우삼성전자유한공사 리빙개발부 정규범(43) 부장은 “어제까지만 해도 고스란히 있던 한 마을의 건물들이 오늘이면 몽땅 사라질 만큼 쑤저우는 하루하루 급변하는 곳”이라며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때론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라고 귀띔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원구의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에서는 고가도로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차로를 일부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8km에 이르는 도로를 통째로 막은 뒤 공사를 진행하는 방식이 대국(大國)인 중국답다.

    원구는 명칭만 공업구일 뿐 실상 그 자체로 하나의 신도시다. 한국에 산재한 공단들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개발계획면적만 70㎢에 달한다. 이는 서울 여의도 면적의 8배가 넘는 규모. 승용차로 한참을 달려도 좀처럼 끝이 안 보이는 공단부지는 여기저기 파헤쳐진 채로 건물 신축 및 도로건설 공사가 진행중이다. 흙과 암석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들이 굉음을 내지르며 왕복 4차로 도로를 빈번히 오간다.

    개발방식이 독특한 원구는 중국과 싱가포르가 합작으로 개발하는 국가급 공단. 정식 명칭은 ‘中國-新加坡 蘇州工業園區’로 CSSIP(China-Singapore Suzhou Industrial Park)라는 영문 약어(略語)로도 통한다. 원구의 발전목표는 현대화·글로벌화한 정원(庭園)식 첨단기술공단 건설이다.

    쑤저우시는 1994년 원구 개발을 시작, 오는 2010년까지 모두 3개 구역으로 나눠 개발을 진행중이다. 그 가운데 1개 구역은 이미 개발이 완료됐다. 개발 초기 중국정부는 공단부지를 싱가포르에 제공했고, 쑤저우의 오랜 역사전통과 생태계적 장점을 높이 산 당시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는 200억달러를 투자했다.

    원구 개발 프로젝트는 싱가포르정부가 직접 기획했고, 쑤저우시 공무원들은 싱가포르 현지에서 관련교육을 받았다. 요약하자면, 중국은 넓디넓은 땅을 내놓는 대신 싱가포르의 자본과 기술력을 백분 활용해 첨단공업단지를 유치하는 독특한 개발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하루의 또 다른 시작인 밤에 지켜본 원구의 풍경은 낮과는 사뭇 달랐다. 중앙분리대에 설치된 전등 불빛이 잔디와 나무들을 환히 비추는 원구의 독특한 야경은 이곳이 공업단지라는 생각을 일순간에 스러지게 했다.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쑤저우공업원구 내에 입주해 있는 삼성전자 백색가전공장

    쑤저우시는 정원도시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하필이면 공단 개발을 택했을까.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쑤저우는 10여 년 전만 해도 재정수입을 관광수입과 농업생산에 의존하던 소비도시였다. 역설적이게도 원구 개발의 주된 계기는 쑤저우시의 자랑거리인 문화유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쑤저우에는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줘정위안(拙政園)을 비롯, 그와 함께 중국 4대 정원의 하나로 꼽히는 류위안(留園), 오나라 왕 합려가 묻힌 묘역인 후츄(虎丘), 삼국시대에 손권이 자신의 유모의 생신을 축하하려 지었다는 베이쓰타(北寺塔) 등 유서 깊은 문화유적들이 밀집해 있다.

    그러나 관광수입만으로는 도시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쑤저우시정부는 상하이를 배후로 삼아 공단 개발에 적극 나서기로 하고 도시 외곽의 논밭과 늪지를 일시에 갈아엎었다. 그리고 중앙정부와의 협의하에 1990년부터 총면적 52㎢ 규모의 최신과학기술개발구인 쑤저우신구(蘇州新區)를 도시 서쪽 외곽지에 조성한 데 이어, 도시 동쪽에는 원구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쑤저우시가 도심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원구, 서쪽에는 신구라는 양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오르는 제비에 흔히 비유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문화유적들을 품고 있는 옛도시지역은 제비의 몸뚱이에 해당한다.

    신구의 경우 공장건물들을 먼저 지은 뒤 필요에 따라 도로를 건설하면서 면적을 넓혀간 데 비해 원구는 전체 개발면적에 대한 치밀한 도시계획 아래 바둑판 모양의 공단부지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대로(大路)에서부터 전기, 가스, 상하수도, 초고속통신망 등 인프라 조성을 앞세웠다. 또 중국과 싱가포르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 짜놓은 기본계획에 따라 공장구역과 주택구역, 공공녹지구역 등이 철저히 구분·지정돼 건설되고 있다는 게 신구와 다른 점이다. 소공원 등 휴식공간도 곳곳에 마련했다.

    신구에는 산요, 후지, 소니, 마쓰시타 등 일본 대기업들과 대륙투자를 노린 대만기업들이 포진해 있고, 원구엔 한국·미국·유럽 등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대기업들이 현지 생산법인을 두고 생산 및 연구개발, 시장확대의 거점으로 삼고 있다.

    문화유산 보호 위해 공업구 개발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줘정위안(拙政園).

    그렇다면 원구 개발 초기 가장 큰 딜레마는 자칫 문화유산들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환경오염 문제가 아니었을까. 취재기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도 바로 그것이었다. 수많은 문화유적을 지닌 옛도시에 매머드급 공단이라? 한국으로 친다면 신라 천년의 문화가 흐르는 고도(古都) 경주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는 셈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쑤저우공업원구내 쑤화(蘇華)로에 자리한 원구 관리위원회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면서 풀렸다. 원구 관리위원회는 원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구다.

    “비록 원구가 공단이긴 하지만, 환경보호구로도 지정돼 있어 오염업체는 절대 입주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원구내에 전문 오폐수처리시설도 갖추고 있고 배기가스량 규제 또한 철저하다. 일부 환경보호 관련수치는 독일보다도 더 엄격하다. 따라서 원구에 들어선 외자기업들은 대부분 오염과 거리가 먼 반도체, 전자, 의약, 가공업 중심의 첨단기업들이다.”

    익명을 요구(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관리들은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것이 상례다)한 이 관계자는 “원구 개발은 중국-싱가포르 사이의 국가간 프로젝트인 만큼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도시설계 경험과 노하우를 거울로 삼아 세계 초일류의 친환경적 도시계획체계를 이루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밝혔다.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쑤저우공업원구에서는 공장 및 주택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원구의 계획거주인구는 60만, 목표로 하는 취업유발인구는 36만이다. 2003년 10월까지 세계 500대 기업 중 45개 기업을 포함해 1255개의 외국기업이 원구에 입주했고, 실제로 6만5000여 명이 일자리를 얻었다. 계약기준 외국기업의 투자액은 147억달러, 실제 외자유치액은 64억달러에 이른다. 원구 관리위원회는 매년 15억달러 이상의 외자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원구에 입주한 기업들 중에는 세계적인 하이테크기업들의 이름이 많이 눈에 띈다. 현재 원구엔 AMD, 히타치, 후지쓰, 미쓰비시, 노키아, 보슈, 필립스 등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전기전자, 정밀기계, 서비스업, 화공 및 신소재 부문을 가릴 것 없이 밀집해 있다. 한국기업으로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백색가전, TFT-LCD, 노트북PC 생산법인들이 대표적이다.

    원구 개발의 성공에 힘입어 쑤저우는 중국에서 경제발전속도가 가장 빠른 신흥 공업도시로 부상했다. 1994년에는 GDP가 11억1000만달러에 그쳤지만, 2003년의 경우 360억달러가 예상돼 무려 30배 가량 늘었다(중국 대·중형 도시 중 4위). 외자유치 실적은 중국내 1위, 공업총생산액도 상하이 다음으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수출입총액은 3위, 공업총생산액은 2위를 차지한다. 2002년말 기준으로 원구의 GDP와 재정수입은 쑤저우 전체의 약 12%를 점유하고 있다.

    전통과 산업의 기막힌 조화

    쑤저우의 도시구조를 보면 옛도시다운 맛이 제대로 난다. 기원전 514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오자서(俉子胥)에게 명해 짓게 했다는 합려성 주위를 둘러 조성된 호성하(護城河·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 주위에 인공으로 판 수로로 해자(垓字) 역할을 함)를 경계로, 호성하 안쪽은 옛 성 지역이 주를 이루는 도심이고, 그 바깥쪽은 신시가지다. 도보상업거리로 쑤저우시에서 가장 번화가인 관첸(觀前)가는 물론 성내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쑤저우공업원구 내 공동주택구역.

    그러고 보면 쑤저우시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도심의 소규모 경공업 공장들을 외곽으로 이전하는 한편 신구와 원구라는 새로운 공단을 건설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택이었던 셈이다.

    한편 원구는 원구를 관통하는 호수인 금계호(金鷄湖)를 경계로 호서(湖西)와 호동(湖東)으로 나뉜다. 호서는 1차 개발지역, 호동은 2차 개발지역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호서지역엔 반도체공장이, 호동지역엔 백색가전공장이 진출해 있다. 현재 호동과 호서를 잇는 다리가 건설중이어서 두 지역간 교통은 더욱 원활해질 전망이다.

    금계호 주변엔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쑤저우시는 옛도시지역의 문화유산 보존과 미관 유지를 위해 호성하 내부에는 고도 24m(5층 정도 높이) 이상의 건물을 신축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지만, 호성하 밖은 이런 제한이 없다. 오히려 3년 전부터는 토지이용률을 높이려 고층빌딩 건축을 권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5∼6층이 주종을 이뤘던 예전과 달리, 요즘 붐을 타고 쑤저우시에 건설되는 아파트들은 거의 13∼15층의 고층이다.

    원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원구에서만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외자유치가 성공적으로 이뤄지자 쑤저우시의 부동산값도 2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폭등했다. 2층짜리 최고급 단독주택의 경우 400만위안(한화로 6억원 가량)을 호가할 정도다.

    이런 모든 변화는 공격적이리만큼 적극적인 쑤저우시의 외자유치 노력의 결과다. 쑤저우삼성전자유한공사 최평석(42) 공장지원팀장은 “쑤저우시는 외자유치뿐 아니라 사후관리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다. 공단부지 무상임대, 각종 세제혜택은 물론 시 공무원들이 직접 외국기업을 찾아다니며 각종 애로사항을해결해주는 등 적극적인 사후관리정책을 펴고 있다”며 “외국기업의 투자유치에 공이 큰 공무원들에게 금전보상이나 승진 등의 인센티브를 주고 반면 투자유치실적이 저조하면 좌천시키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쑤저우시의 열정을 반영하듯 쑤저우시정부 건물은 밤이면 모든 조명을 훤히 밝힌다. 날로 발전하는 쑤저우시의 위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다.

    문화유산·첨단산업 조화로 2500년 세월 건너뛴  ‘두 얼굴의 도시’

    쑤저우공업원구 곳곳에 소공원 등 녹지가 조성돼 있다.

    원구 개발이 먼저 조성된 신구에 자극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국가급 공단인 원구 개발을 의식한 쑤저우시정부의 일부 공무원들이 신구의 외자유치 실적을 높이려 원구 입주를 희망한 양질의 외국기업들을 신구로 당겨가곤 했다는 에피소드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원구 개발이 본격화된 이후 신구에서 원구로 일터를 옮기는 근로자들이 적지 않다. 원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대부분 원구가 쑤저우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특히 외지에서 이주해온 젊은 근로자일수록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근로자들의 퇴근시각인 오후 5시(중국에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 근로가 기본이다). 원구의 도로엔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원구 근로자들의 주요한 교통수단. 통근버스에서 내려 귀가중이던 류리췬(劉利群·25)씨를 붙잡고 불쑥 몇 가지 질문을 잇따라 던졌다.

    저장성 항저우 출신으로 대학에서 전기자동화를 전공했다는 류씨는 “대학 졸업 후 처음엔 항저우의 한 작은 IT기업에 근무했는데, 쑤저우 공단의 규모가 훨씬 커 신구로 일터를 옮겼다. 그곳에서 2년쯤 일하다 지난해 원구에서 플래시 메모리를 생산하는 미국기업인 AMD로 직장을 옮겨 제품 테스트 일을 맡고 있는데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며 “임금이 신구에 있을 때보다 10% 많은 데다 쑤저우의 장래성까지 높아 앞으로 집을 장만할 때까지 쑤저우에서 살 계획”이라 말했다.

    그러나 쑤저우의 성장가도가 마냥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중국의 가장 큰 고민이랄 수 있는 빈부격차 및 실업문제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마저 피해갔다는 쑤저우를 결코 비켜가지 않는다.

    쑤저우 토박이들이 ‘대공원(大公園)’이라 부르며 즐겨찾는 도심의 쑤저우공원. 이곳에서 부인(80)과 함께 연못의 붕어들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던 중푸바오(仲福寶·79)씨는 “1978년 개혁·개방조치 이후 20여 년 동안 쑤저우엔 생활의 질을 높이는 엄청난 변화가 이어졌고, 대체로 이런 도시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특히 쑤저우시뿐 아니라 쑤저우에 소속된 쿤산(崑山) 장쟈강(張家港) 창서우(常熟) 우장(吳江) 타이창(太倉) 등 5개 현(縣)급 도시의 발전속도 또한 무척 빠르다”면서도 “발전과정에서 경쟁력을 잃고 도태된 국유기업들에 대한 개혁으로 생겨난 ‘샤강’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덧붙였다.

    ‘샤강(下崗)’은 국유기업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고도 기술수준과 학력이 낮아 생산직 근로자인 공인(工人)으로 채용되지 못해 생계에 곤란을 겪는 실업자를 지칭한다. 이들 샤강이 날로 커지는 빈부격차와 맞물려 자칫 한꺼번에 사회문제로 분출해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쑤저우의 발전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15세 때부터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중씨는 또 “한국의 발전속도가 중국보다 빠르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과연 그런가?

    선진기술 빨아들이는 거대한 빨대

    그럼에도 쑤저우공업원구가 ‘뉴 차이나(New China)’의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의구심을 나타내는 쑤저우 주민은 거의 없다. 쑤저우대 출신 등 대졸자들 중 상당수가 원구와 신구의 기업들에 엔지니어로 취업하는 데다 일부 외국기업들은 쑤저우대를 직접 방문해 신입직원을 가려뽑으니 쑤저우의 미래를 낙관하는 정서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쑤저우시정부 관영매체로 10만부(16면)를 발행하는 ‘쑤저우일보’의 성구부(城區部) 소속 양판(楊帆·31) 기자는 “관련기사가 거의 매일 1, 2면에 배치될 만큼 원구는 역동적인 지역”이라고 잘라 말한다.

    쑤저우 출신의 7년차 기자인 그는 “세계 어느 도시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2500년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매년 5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는 도시를 쑤저우말고 세계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라며 은근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쑤저우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내다보는 사람들은 거리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고도(古都) 쑤저우는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전통의 영원성을 지켜가는 양면성을 지닌 산업도시로 부각되고 있다. 이는 과거를 현재와 단절하지 않고 미래와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며 경제가 발전할수록 더욱 절실해지게 마련인 과거-현재-미래의 3자 조화를 도모하는 쑤저우만의 오랜 저력 덕분일 것이다. 이런 저력이 이어지는 한 21세기에도 ‘上有天堂, 下有蘇杭’이 유효할 것이라 믿는다면 과장에 불과할까.

    쑤저우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의 선진기술과 자본을 유치해 빨아들이는 중국의 거대한 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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