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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향내음으로 삭혀낸 가마터 늙은 匠人의 망향가

  • 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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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금강 유역 출신입니다. 일본에 귀화하고 이름을 짓는 게 허용되자 고향을 따서 ‘가나가에’라는 성을 만든 거지요. 삼평을 일본식으로 ‘산베에(三兵衛)’라고 했고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부대가 조선에 갔다 철수할 때 데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삼평은 이 지역에서 자기를 만들 원료 도석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여기서 가까운 이즈미야마에서 도광(陶鑛)을 찾아냈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마을이라 불리던 평범한 시골 마을이 일약 도자기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됩니다. 아리타 자기가 전국으로 팔려나가고 나베시마번(藩)의 재정에 크게 기여하면서 이삼평을 비롯한 도공들이 좋은 대접과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멀리 사쓰마 도자기의 심수관(沈壽官)씨 마을인 나에시로가와(苗代川)와 다른 점입니다. 나에시로가와는 조선인 자치촌이지만 여기서는 전부 일본인과 결혼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지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설(異說)이 있다.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 와코대 명예교수는 이삼평이 김해에서 잡혀왔고 가나가에는 김해(金海)의 다른 발음(긴가에)이라고 주장한다. 나베시마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진을 칠 때 김해를 담당했으므로, 충청도가 아니라 남해안 지역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왔고 그중에 이삼평이 끼여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본 기록에도 ‘金江出身’이라고만 되어 있다. ‘긴가에’는 발음상 ‘김해’에 가깝다는 것이 이진희씨의 논거다.

‘끌려온 길’과 ‘나선 길’

이 교수에 따르면 임란 때 도공만 잡혀온 게 아니다. 당시 왜군의 함정은 왜구의 배와 일본내 수송선을 기준으로 건조됐기 때문에, 조선에 왜군을 내리고 돌아가는 길에 너무 가벼워 난파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함정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또 빈 배로 다니는 게 아까워 남해안 일대의 남녀노소를 싹쓸이하듯 배 밑창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랍당한 조선인이 규슈 북단의 사가현 등지에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기술자로 쓰이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아에라’는 이처럼 강제 연행된 사람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0년 동안 1만명에 달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삼평의 후손은 김해 출신설을 어떻게 생각할까. 14대 쇼헤이에게 물어보았다.

“그건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우리가 김해 출신인지 충청도 금강가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확실한 건 ‘金江’이라는 두 글자 기록밖에 없으니 해석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흡사 금강이면 어떻고 낙동강이면 어떻냐는 식이다. 기실 이삼평 자신이 그렇게 여겼던 것 같다. 한국식이라면 어디 이씨 성을 버리고 김씨 성이 될 법이나 한 것인가. 그러고 보면 아예 처음부터 성이 없는 신분으로 일본에 끌려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 얘기가 나왔으니 더 착잡한 문제도 짚어야 한다. 쑥스럽더라도 후손에게 물어봐야 한다. 1990년 일본의 거품경제가 한창일 때 아리타 주민들이 거금 1억8000만엔(20억원이 훨씬 넘는다)을 거두어 이삼평의 연고지에 기념비를 세웠다(충청 출신임을 전제로 계룡산에 세웠다). 그런데 비문의 표현 중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간’이라고 한 부분이 문제가 됐다.

“일본에 건너가다니 제 발로 갔다는 것인가. 마음에 없이 끌려갔다거나,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야 옳지 않은가. 비문을 정정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여론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이삼평 집안의 고문서(제3대가 작성)를 보면 삼평은 임진왜란 당시 ‘길 잃은 나베시마 나오시게공(公)을 만나 안내역을 맡았는데, 전후 고향에 남아 있으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어 나베시마가 설득해 데려왔다’고 적혀 있으므로 제 발로 일본에 건너간 것처럼 표현된 비문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렇듯 연행된 게 아니고 왜장 나베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다 건너온 것이라면 얘기가 좀 복잡해진다.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14대 쇼헤이에게 물었다.

“아, 그건 저도 들어 알고 있는데요. 사가현에서는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이라고 했습니다. 후손으로서는 행정당국의 공식적인 해석을 존중할 수밖에요.”

3대 삼평은 무슨 생각으로 할아버지의 일을 정리했을까. 기술노예로 끌려왔다고는 하나 이젠 정착했으며 고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됐다. 그래서 3대 삼평은 ‘살다 보면 미야코(都·서울)’라는 일본 속담 식으로, 등지고 온 조국보다 대대손손 살아갈 일본에 유리하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기실 임진왜란 때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해 곧 귀순한 왜군장교 김충선(일본명 沙也可, 우록 김씨의 시조)도 그랬다. ‘모하당일기’라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조선의 문물에 홀딱 반해버려 귀순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이 점을 의심한다. ‘어찌 유학적 기초가 없는 일본의 장교가 전투중에 갑자기 이국의 문화와 문물에 반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따라서 그것은 귀순정착자가 내건 명분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삼평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길 잃은 왜병이 협박하지 않고서야 안면도 없고 일본말도 모르는 터에 길잡이를 자청할 리 있었을까. 재일동포 중에는 그런 식으로 동정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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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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