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국수주의 일본號’ 편승한 沒역사·무책임 포퓰리즘

  • 글: 조헌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5-03-24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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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원 19만명, 연 70조원 주무르는 ‘도쿄 공화국’ 황제
    • ‘아사히신문’ 매주 이시하라 발언록 게재, “왜? 재밌으니까…”
    • 국가 제창 때 학생 기립시키지 않은 교사 248명 징계
    • 도쿄 범죄 증가하면 “외국인 탓”
    • 중증 장애인 시설 시찰 뒤 “저런 사람들도 인격이 있나” 막말
    • 히토쓰바시대 인맥이 아이디어 창고
    • 미국 욕하면서도 “도쿄 발전 모델은 뉴욕”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이시하라 지사는 젊은 시절부터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1999년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도지사 출마를 선언하는 이시하라.

    일본에서 언론매체의 주목도가 높은 정치인을 꼽는다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73) 도쿄도(都)지사가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초기보다는 인기가 떨어졌다 해도 40%의 지지도를 기록중인 고이즈미 준이치 총리에 버금간다.

    이시하라 지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도쿄의 대다수 시민,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정치·경제·행정·관광 등 전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도쿄의 직선 수장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시하라의 실체와 오늘날 왜 그에 공감하는 일본인들이 많은가를 살펴보자.

    좌충우돌, 무소부재

    “문명이 초래한 가장 한심하고 유해한 것이 할머니라고 하더라. 여성이 생식 능력을 잃은 뒤에도 살아가는 것은 낭비이고 죄라더라.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인이라 차마 말할 수 없다.”

    2001년 11월에 발매된 한 여성 주간지에 실린 이시하라 지사의 말이다. 한 대학교수의 말을 전하는 형식이었으나 그 말이 곧 그의 말이다. 여성의 인격을 철저히 모독하는 이 발언에 도쿄 거주 여성 121명은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이시하라 지사를 상대로 1인당 1만엔(약 1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도쿄 지방법원은 지난 2월24일 “지사의 발언은 헌법 이념에도 맞지 않는 부적절한 견해지만, 개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므로 원고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그러나 “부적절한 표현이 사용돼 많은 여성이 불쾌감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한다”며 발언의 문제성은 인정했다.

    여성 원고단은 판결 직후 “발언을 용인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만큼 이시하라 지사는 판결문을 잘 읽고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측근을 통해 “논평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그가 판결문을 읽어봤을 리 없다.

    일본의 저술가 가와나 히데유키는 이사하라 지사에 대해 “편견에 차 있고, 쉽게 열 받고, 호전적인 성격이다. 무슨 일이든 잘 알아보지 않고 발언하고, 나중에 발언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절대 사과하지 않고 버티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여성차별 발언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이시하라 스타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이시하라 지사는 지난 1월 도쿄도 공무원인 재일교포 정향균씨의 승진시험 응시자격 제한 관련 재판 때도 등장했다. 정씨는 1994년 과장직 승진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외국국적 소유자란 이유로 원서 접수조차 거부당하자 위헌 확인 및 손해배상 200만엔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시하라 지사가 취임하기 전의 일이지만 송사는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됐고 올해 1월 대법원 판결에서 “지자체의 임용권은 정책적 판단”이라며 정씨의 패소를 확정했다.

    이시하라 지사는 판결 결과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주장해온 것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며 흡족해했다. 외국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그가 ‘희희덕거리는’ 모습에 재일교포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가 툭툭 내던지는 발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도쿄 도지사란 중책을 맡은 사람답지 않게 경솔한 말을 수없이 해왔다. 그런 그가 일반인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와 닮은 꼴이다.

    일본 한 신문사의 현직 언론인은 “그런 사람이 민선 도쿄 도지사, 그것도 2기째 연임중이란 사실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 언론인은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장 마리 르펭이 인기를 끌던 1990년대 후반을 떠올렸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프랑스에서도 우익이란 개념은 사회체제의 형식이나 이념에 관한 것을 뜻하기보다는 국수주의적 정치성향을 칭하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시하라는 르펭보다 훨씬 더 심한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러나 일본은 이시하라를 선택했다. 르펭은 인기가 있었지만 파리시장은 되지 못했으며 대통령후보로 지지해준 사람도 일부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시하라를 도쿄시장으로, 게다가 재선까지 시켜줬다. 그것도 모자라 늘 총리 후보감으로 꼽는다.”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도쿄 시내에 붙은 포스터. 무소속으로 당선된 이시하라 지사가 자민당 소속 도의회 의원(왼쪽)과 손을 맞잡은 것에서 그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특이한 성향의 정치인이야 어느 사회에나 존재 하지만 그가 소수로 그치냐, 아니면 세를 넓혀 주류가 되느냐에 따라 사회의 위험도가 달라진다. 오늘의 일본 사회는 프랑스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한 이상기류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시하라의 문제 발언을 몇 개 더 살펴보자.

    1999년 9월 그는 도립 중증 심신장애인 시설을 시찰한 후 “저런 사람들한테도 인격이 있는가” 하고 소감 같지 않은 소감을 말했다. ‘아사히신문’ 기자가 이를 용기 있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 이 기자는 ‘이시하라 왕국’인 도쿄도청에서 조직적인 ‘왕따’를 당했다.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한 이시하라 지사를 비판하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2000년 4월 현역 지사로는 처음으로 육상자위대 제1사단 기념행사장에 참석한 그는 ‘제3국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불법 입국한 제3국인, 외국인이 매우 흉악한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 도쿄의 범죄 형태는 과거와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면 대단한 소요사태마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에 대처하려면 경찰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때에 여러분에게 출동을 부탁해 업무를 수행하게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원래 ‘제3국인’이란 표현은 1945년 종전 후 미 극동군사령부가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출신자를, 연합국 국민도 아니고 적대국 국민도 아닌 존재로 지칭하며 쓴 표현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를 일본인도, 외국인(흔히 서양인)도 아닌 사람이란 뜻의 차별적 용어로 사용했다. 그의 발언은 관동대지진 당시 출동한 군대가 자경단과 경찰의 조선인 학살극에 동참한 비극을 되새기게 한다.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한 데 대해 자성할 법도 하건만, 이시하라는 엉뚱하게도 교토통신 기자가 ‘불법 입국한’이란 구절을 빼고 보도한 것만 물고늘어졌다.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논란을 봉쇄하기 위해 언론에 싸움을 건 것. 이렇듯 논점을 흐리는 그의 수법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이시하라는 이 밖에도 도쿄도 재정개혁을 명분으로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세제 신설, 도내를 통행하는 디젤차의 배기가스 규제, 새로운 도쿄도 은행 설립 구상, 도쿄도가 재정을 지원하는 대학들을 ‘수도 도쿄대학’으로 통폐합하는 등 금융·교육·교통을 가리지 않고 온갖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

    이렇게 설쳐대는 이시하라 지사 앞에서 출입기자들은 모두 주눅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작은 매체 기자들은 “죄송합니다만…” 하며 질문을 시작할 정도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시하라 지사가 ‘막말’로 창피를 주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생리를 잘 아는 노회한 정치인이 젊은 기자들을 주무르고 있는 셈이다.

    대학 시절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면서 미디어의 힘을 실감한 그는 차츰 언론 활용에 눈을 떴고 40여년이 흐른 지금은 언론 조작 단계까지 진화한 것 같다. 돌출 발언은 TV 카메라의 조명, 카메라 플래시, 찰칵하는 셔터 소리에 중독된 이의 생명 연장을 위한 단막극 같다.

    ‘이시하라 발언록’

    도쿄 시내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신주쿠역 근처에 일본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초(歌舞伎町)가 있다. 신주쿠역에서 가부키초와 반대 방향으로 10여분 걸어가면 40층이 넘는 빌딩군(群)이 나타난다.

    고층빌딩 숲에서도 특이한 외관 때문에 눈에 확 띄는 건물이 있다. 쌍둥이 빌딩 형태로 우뚝 솟은 지상 48층, 높이 243m의 도쿄도청 본청 건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로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설계가 단케 겐조가 설계한 것이다. 건물이 완공된 것은 일본 경제의 기세가 세계를 뒤덮던 1991년 4월이다.

    19만여명의 직원, 연간 예산 7조엔(약 70조원)을 집행하는 도쿄도지사. 웬만한 나라의 전체 경제 규모를 능가한다. ‘도쿄공화국’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이시하라는 1999년 4월에 취임해 4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에 성공, 2003년 4월부터 2기째를 보내고 있다.

    도쿄도 청사 6층 기자실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이시하라 지사의 정례 기자회견이 열린다. 공식 출입기자는 23개 언론사 150여명이다. 질문은 도쿄도 문제를 벗어나 일본 정국, 미·일 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뤄진다. 이시하라 지사는 티가 들어간 것처럼 눈을 껌벅거리며 하나하나 답한다. 그걸 즐기는 것 같다.

    일본을 대표하는 정론지 ‘아사히신문’마저 ‘이시하라 발언록’이란 고정 코너를 두고 매주 발언 내용을 발췌, 소개하고 있다. 도쿄 지역방송인 도쿄MX TV는 인터뷰를 생중계하고 다음날 재방송한다. 아사히신문 편집국 간부에게 “중요한 내용도 아닌데 박스 기사로 매주 중계하듯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독자들한테 인기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시하라 지사는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한반도 관련 기사를 자주 왜곡하는 ‘산케이신문’과 월간지 ‘제군(諸君)’ ‘정론(正論)’ ‘문예춘추’의 단골 필자다. 자위대의 군대화와 군사대국화를 골자로 하는 개헌론과 북핵위기를 앞세운 핵무장론까지 거론한다.

    최근 그는 행정구역상 도쿄도에 속하는 남중국해상의 암초(일본은 섬이라고 주장) 오키노도리(沖の鳥)에 발전시설을 설치하고 어업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말해 관심을 끌었다. 중국은 무슨 짓을 하냐며 발끈했다. 일본의 국수주의 세력들은 중국의 반발에 다시 일제히 들고일어났고 이시하라는 국수주의 세력의 중심인물로 더욱 부상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이시하라식 언론 플레이다.

    일제 침략 실상을 축소, 은폐한 역사 교과서가 각급 학교에서 많이 채택되도록 하려는 국수주의 단체 소속 인사들은 이시하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영향력 아래 올해 개교하는 한 도쿄도립고교가 역사 왜곡 교과서를 채택한 바 있다.

    도쿄도의 각급 학교에 각종 행사 때국기인 ‘히노마루’ 게양, 국가인 ‘기미가요’ 제창을 강요한 것도 그다. 지난해 봄에는 국가를 제창할 때 학생들을 기립하도록 지시하지 않은 교사 248명을 징계처분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하려는 듯한 분위기에 저항,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일이 시끄럽게 되자 아키히토 일왕조차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한마디할 정도였다.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신주쿠 가부키초의 유흥가에는 중국, 필리핀, 태국, 한국 등 아시아 여성은 물론 나이지리아, 헝가리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거리 전체가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썰렁하다.

    “어젯밤 경찰이 싹 훑고 갔으니 취업비자가 없는 아가씨들이 무서워서 어떻게 나오겠어. 오늘 저녁은 어디 가도 아가씨들은 못 볼 거요.”

    퇴폐업소가 아닌 선술집 여주인이 하는 말이다.

    가부키초에 대한 경찰의 집중 단속은 이시하라 지사의 외국인 범죄 소탕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는 외국인 차별 의식이 유별나다. 절도, 강도 등 범죄가 증가하면서 도쿄 시민의 불만이 증가하자 그는 외국인 탓으로 돌렸다. 내셔널리스트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등 폭력단을 비롯한 구조적 부패는 손대지 않고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일본에 사는 외국인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인의 범죄 건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범죄 발생 전체를 외국인 탓으로 돌리려는 이시하라 지사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일본 식자들의 지적이다.

    이시하라 지사는 강력한 불법체류 단속과 함께 적발 즉시 강제추방을 지시했다. 2004년 일본에서 추방된 불법체류 외국인은 전년도보다 1만여명 늘어난 5만여명이다. 대부분이 도쿄에서 올린 단속 실적이다. 이 과정에서 핍박받는 이는 힘없는 소수,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들뿐이다. 추방된 외국인의 60%가 20대 여성이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히토쓰바시대 재학중이던 1956년(24세) 소설 ‘태양의 계절’로 순수문학 분야 신진작가에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단 권력의 꿀맛을 맛본 그에겐 더 큰 권력욕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민당 실력자를 찾아가 공천을 따냈고, 36세이던 1968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72년 중의원으로 옮겨 당선된 이시하라는 이듬해 자민당 소장파 의원들과 ‘청풍회(靑嵐會)’란 모임을 만들었다. 소속 의원은 31명. 이 무렵 그는 자민당의 ‘젊은 사자’로 불렸다. 국수주의자인 자민당 중진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년부터 5년간 총리를 지냄)의 비호 아래 한껏 기세를 올린 것이다.

    ‘외로운 늑대’

    하지만 정계가 어디 그렇게 녹녹한 곳인가. 당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과격한 발언 때문에 그는 정계 주류가 되지 못하고 외로운 한 마리 늑대처럼 국회 안을 배회했다. 도쿄도지사 연임에 성공하고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1999년 3월에는 무소속으로 도쿄도지사에 출마했다. 줄곧 자민당 의원으로 활동해온 그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에서도 그의 독특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아들인 자민당 소속 노부테루 중의원은 소속당 후보가 있음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한 부친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다. 부자관계란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명백한 해당(害黨) 행위였다.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도쿄도청사가 신주쿠 빌딩 숲 뒤 쌍둥이 빌딩 모양으로 서 있다.

    당시 도지사 선거는 이시하라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 도지사 출마는 1975년 42세 때였다. 결과는 패배였다. 자민당이 그를 도쿄도지사 후보로 내보낸 배경에는 그가 당시 정당 분위기에 맞지 않게 제멋대로 노는 데다 지나친 국수주의적 성향 때문에 골치 아파하던 자민당 실력자들이 그를 국회 밖으로 내친 것이란 분석이 있다. 대접해주는 것처럼 도지사 후보 공인을 해준 뒤 낙선시켜 정계에서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시하라의 상대는 2기 8년 임기를 마친 71세의 현역 지사 미노베(1904∼84)였다. 그는 일제 군국주의 시절 인민전선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한 사회주의자다. 부친은 헌법학자요, 장인이 도쿄대 총장과 문부상을 지낸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또 종전 직후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대학교수를 하다 정부 행정관리청 통계기준국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당과 공산당 지지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1967년 개혁 기치를 걸고 도쿄도지사에 당선됐다.

    당초 미노베 지사는 고령을 이유로 재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를 지원해준 공산당과 사회당의 관계 악화도 원인이었다. 그러나 ‘내셔널리스트’ 이시하라의 출마 선언이 있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빗발치는 재출마 독촉을 받았다. 그는 생각을 바꿔 재출마를 선언했다. 재출마 성명은 “파시스트 이시하라가 도쿄를 좌지우지할 것을 생각하면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아 재출마를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혁신계는 다시 뭉쳤고 표를 착실히 다져나갔다. “위험한 파시스트에 도정을 맡길 수 없다” “평화로운 일본, 도쿄를 광신적인 국수주의자 손에 넘길 것인가” “위험인물 이시하라에 아이들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시하라를 꺾기 위한 선전 문구였다.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이시하라 도쿄 지사.

    이시하라는 35만표 차로 낙선했다. 패배를 모르고 살아온 그가 처음 좌절을 맛본 순간이었다. 이 패배는 두고두고 그를 속박하게 된다. 24년이 지난 뒤 그가 1999년 도쿄도지사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3월10일이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지만 24년 전 같은 날 미노베 지사가 재출마를 선언했다.

    1972년부터 23년간 8선 자민당 국회의원으로 지내며 권력을 즐기던 그는 돌연 의원들을 향해 저주의 언어를 쏟아내고 1995년 의원직을 그만둔 후 소설 ‘동생’ 집필에 들어간다.

    아직도 미노베와 싸운다?

    이시하라 지사의 동생 유지로(裕次郞·1934~87)는 가수로 1987년 5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의 인기는 쇼난(湘南) 해안 부근의 작은 섬 등대가 ‘유지로 등대’로 명명될 정도였다. 소설 ‘동생’을 펴낸 그는 애증이 겹쳤던 동생의 굴레에서 벗어난 듯 홀연 1999년 3월 도쿄도지사에 무소속으로 재도전한다. 운수상(현재는 국토교통상), 환경청장관(현 환경·오키나와 북방상)을 역임한 이시하라는 이번에는 큰 어려움 없이 당선됐다. 그리고 2003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시하라의 재선은 ‘파시스트 이시히라에게 도정을 맡길 수 없다’는 말 한마디에 표가 결속되면서 그에게 패배를 안긴 1975년과 1999년·2003년의 일본 사회가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지금도 25년 전 미노베 지사와 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들 노부테루가 2000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노베 지사는 1979년까지 3기 12년간 도쿄도 수장을 맡으며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968년 총련계 조선대학교 정식 대학으로 인가, 1969년 전국 최초로 지자체 가운데 공해방지조례 제정, 노인 무료 의료제도 실시, 도가 운영하는 도박장 폐쇄 등 큰 업적을 남겼다. 12년 동안 도쿄도지사를 역임한 그는 1980년 참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으며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환경, 평화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시하라 지사가 두 번째 임기를 맞아 펼치고 있는 도정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거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미노베 지사 베끼기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본질적 차이가 있다. 사회주의자였던 미노베 지사가 월급 노동자, 외국인 등 소수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 노동 정책에 중점을 뒀다면 이시하라는 중산층 이상 보수 계층을 정책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네오콘’이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과정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일반인은 그를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통 큰 정치인’ ‘행정 추진력이 뛰어난 진정한 애국자’로 본다. 그는 종종 ‘개혁을 하고 싶지만 적대 세력 때문에 늘 고독한 지사’ ‘구태의연한 관료집단에 포위된 불쌍한 개혁주의자’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 연출해낸다. 당내 소수파로 2기째 집권하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수법과 일치한다.

    이시하라 지사는 일본 사회의 국수주의 성향의 대중화, 귄위적 질서 통합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편승하고 있다. 그의 독특한 엘리트주의, 차별주의는 그의 가족사와 그가 이제껏 걸어온 족적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는 신흥 상선회사 사장으로 어린 시절 홋카이도 오타루(小樽)에서 도쿄 근교 가나가와(神奈川)현으로 이사했다. 고급 단독 주택과 별장지로 유명한 쇼난 해안 언덕 위에 저택을 마련한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 전후 고교생인 두 아들, 신타로와 유지로에게 요트를 사줬다.

    활달한 성격의 유지로는 명문 게이오고교에 다니며 여자친구들을 요트에 잔뜩 태우고 놀러다녔다. 그러나 형 신타로는 지방고교에 다니는 데다 여자친구도 거의 없었다. 동생에 대한 질투와 초조함으로 그는 단독 항해를 시도해 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달래기도 했다.

    동생·대학·미국 콤플렉스

    이시하라 신타로의 강렬한 엘리트 의식은 ‘콘뎃사 백작부인’이란 이름의 요트를 즐기는 과정에서 굳어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형제 외에는 모두 요트의 승무원에 지나지 않았다. 선장으로 키를 쥐는 것은 항상 형제였다. 당시로서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이시하라는 1963년 ‘콘뎃사 3세’를 타고 국제 요트 레이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훗날 정치가로 변신한 이사하라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요트 레이스’에 빗대 말한 적이 있다.

    “국제 요트 레이스는 하나의 부표를 향해 많은 배가 아슬아슬하게 승부를 건다.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어 위험한 경기다. 꼼꼼한 룰이 있지만 일단 레이스가 시작되면 서로 자기 주장을 하면서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요트 경기를 우아한 경기라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싸움이다. 그러나 레이스가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모두 한데 모여 어깨를 마주하고 위스키를 마신다. 이런 경쟁과 승부욕이 내 정치 스타일이다.”

    동생 유지로는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수로 아직도 숱한 팬을 갖고 있다. 이시하라 지사의 한국인 차별의식에 관한 하나의 가설이 있다. 그의 부친은 일제 시기 유조선으로 군용 중유를 수송하는 하청 상선회사의 중역이었다. 나중에는 상선회사를 차렸고, 종전 후 돈 벌러 일본으로 떠나는 노동자를 제주항에서 오사카까지 실어나르며 돈을 벌었다. 어린 시절 ‘도련님’ 이시하라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무기력하고, 비굴하고, 더럽고, 부리는 대로 일만 하는 짐승 같은 존재였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멸시 의식이 강했던 이시하라에게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동생 유지로의 결혼 상대가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계 영화배우 기타가와 미에라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결혼을 가장 반대한 사람도 이시하라 지사였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도덕성 해이를 탓하곤 하는 그가 1959년에 발표한 연애소설 ‘태양의 계절’에는 방 안의 애인을 겨냥해 창호지 문에 음경을 박아넣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 그가 이제 와 도덕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는 국립 명문 히토쓰바시대 출신이다. 그런데도 그가 가진 ‘도쿄대 콤플렉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히토쓰바시대는 1908년 도쿄제국대에 경제과와 상과가 만들어지자 관련 전공학부가 없어진 아픈 기억이 있다. 도쿄대에 생기는 만큼 히토쓰바시대에는 필요없다는 논리였다. 재야정신, 독립정신이 투철해 졸업생 가운데 사장, 이사 배출 비율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묘한 것이 도쿄대와의 관계다.

    우에스기 타카시는 저서 ‘이시하라 신타로, 5인의 참모’에서 “도쿄대 출신에 대한 히토쓰바시 출신의 ‘적개심’ 혹은 콤플렉스는 ‘히토쓰바시 내셔널리즘’을 낳아 독특한 교풍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도지사 선거후 이시하라 당선 축하 모임에서 히토쓰바시대 출신들은 이렇게 외치며 환호했다고 한다.

    “후보 7명 가운데 6명이 도쿄대 출신이다. 그런데 단 한 명뿐이었던 우리 대학 출신 이시하라가 이겼다. 대단하지 않은가!”

    이시하라는 베스트셀러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도쿄 도지시가 된 후 뉴욕을 라이벌 혹은 본보기 도시로 여기는 정책을 쏟아낸 것을 보면 증오심이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은 범죄가 빈발하는 뉴욕을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경찰관 출신의 부지사 임명, 경찰관 증원 등 치안에 주력한 것은 뉴욕 모델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1998년 미국 ‘범죄백서’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지적된 뉴욕에서 몇 년 후 9·11 테러가 발생한다. 제복 차림의 경찰관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신적 치안 공백’의 의미를 이시하라 지사는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하라는 겉으로는 현실성 없는 반미론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미국 흉내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잔 수(手)’에는 밝으나 판 전체 균형을 잃는 대국관이 결여돼 이기지 못하는 아마추어 바둑고수를 연상케 한다.

    도쿄는 왜 ‘이시하라 신드롬’에 빠져드나

    문단의 권력보다 더 큰 정치권력을 좇아 1968년 참의원에 당선, 첫 등원하는 이시하라(사진 중앙).

    이시하라 지사는 몇 번이나 인터뷰를 한 기자의 이름은 물론 얼굴도 못 알아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은 기사로 크게 말다툼한 기자를 나중에 만났을 때 엉뚱한 이름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위한 연출일 수도 있지만, 도청 간부급 국장을 부를 때도 자주 이름을 착각한다는 걸 보면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개체인식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란 평은 그래서 생겼다. 쉽게 말하면 무의식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심리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희생양 만들기로 이어진다. 그가 마음으로 만들어낸 ‘가상 적국’은 중국, 북한, 거대 금융권, 자동차 메이커 등이다. 무력감에 빠진 대중이 불만을 폭발시킬 대상들이다. 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적대심을 자극하면 그의 인기가 올라간다. 그걸 아는 그는 포퓰리스트다.

    이시하라의 전형적인 행정 스타일은 ‘톱 다운(Top down)’ 방식이다. 담당 국장들에게 아이디어를 던지고 숙제를 내주듯 지시한다. 정치나 행정을 하는 이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선입관이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해온 정통 관료들은 복지부동이란 비판을 받지만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은 몸에 배어 있다. 실수를 줄이는 법을 안다. 하지만 설익은 정치인이나 행정가는 정열만 있고 균형 있게 사물을 판단할 능력이 모자란다.

    이시하라 지사 역시 자신에 대한 허영심, 완벽주의에 차 있어 내놓은 정책에 무리가 많다. 실상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대부분 ‘히토쓰바시 종합연구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연륜과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을 결여한 것이 많다. 하지만 일시적 관심을 끄는 데 가장 좋은 소재를 선정하는 기술만큼은 탁월하다.

    ‘이시하라적인 것’ 원하는 일본

    ‘공허한 소황제’란 저서를 통해 이사하라 지사를 비판한 바 있는 평론가 사이토 다카오는 “아무리 부잣집에서 자라났다 해도 이 사람만큼 머리가 텅 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세 살 어린이가 그대로 70 노인이 된 것 같다”고 혹평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그는 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가. 이시하라 지사가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20여년의 의원생활을 통해 입증됐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태생적으로 즐겨온 한물간 정치인이 고목나무에 꽃 피듯 부활한 것은 필연 오늘의 일본사회가 ‘이시하라적인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이시하라 지사의 인식을 보자. 그는 일관되게 “식민지 지배는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백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시아 식민지를 일본이 해방시켜준 해방전쟁이라는 것이다. 보수 정객의 핵심인 나카소네 전 총리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주장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보통의 전쟁’이었지 제국주의 전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아 침략전쟁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견해를 지키고 있다.

    정치권의 장식품 같은 존재

    오늘의 일본 대중은 생각할수록 골치 아픈 일본의 역사적 원죄,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책임을 지는 일보다 그저 단순 명료한 방위전쟁론, 식민지 해방전쟁론에 더 끌린다. 미국과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나카소네는 “공고한 미·일 관계는 일본을 위해 기초적인 일”이라고 강조하는 데 대해 이시하라는 “미·일 관계는 대등한 관계다. 미국에 대한 신앙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대개 현실론보다 비현실적인 주장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중의원 시절 그는 8선임에도 자민당 내에서 독자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저 유명세 덕택에 나왔다 하면 당선되는 ‘탤런트’ 정치인으로, 이른바 정치권의 장식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권은 물론 국제무대를 장악한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이시하라 지사는 ‘강한 국가는 도쿄에서부터’라는 간판을 내걸고 약진하고 있다.

    그가 여성과 외국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쏟아낼수록 대중은 즉흥적으로 반응하며 갈채를 보낸다. 한국인 차별, 상대적으로 더 사회적 지위가 약한 총련과 총련계 학교, 총련계 교포를 괴롭히는 정책에 대해 역사에 관심 없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저 ‘옳소’를 외친다. 한국의 철없는 ‘자칭 보수’가 북한 괴롭히기 발언에 즐거워하듯.

    이시하라 지사는 그가 쓴 소설 제목처럼 ‘태양의 계절’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친 국수주의, 민족 차별, 여성 차별, 반미국과 반중국, 천황 숭배, 엘리트주의와 대중 멸시. ‘국회의원 이시하라’의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이런 요소들이 이제 그를 꽃피우는 비료가 되고 있다. 그를 꽃피워낸 일본의 계절풍이 적어도 당분간은 이어질 것이란 점에서 이 문제는 이제 이시하라 개인의 문제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최근 일본 사회의 표면을 흐르기 시작한 한 가닥 흐름인 한류는 한일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일본 사회의 저류는 ‘이시하라 현상’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역류로,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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