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전 美 국무부 통역 김동현의 정밀분석

6자회담 합의문, 제네바 합의, 조미공동코뮤니케에 숨은 ‘언어의 지뢰밭’

  • 김동현 전 미국 국무부 한국어 수석통역, 고려대 연구교수 tong.kim@prodigy.net

    입력2005-10-25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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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부터 27년간 미 국무부에서 통역으로 일하다 지난 7월 은퇴한 김동현(미국명 Tong Kim)씨가, 북한과 미국의 협상과정에서 빚어진 갖가지 언어상의 문제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느낀 소회를 정리해 ‘신동아’에 보내왔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1990년대 이후 북미간의 주요 합의문에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단어를 사용해 ‘각자가 필요한 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한 이른바 ‘외교적 모호성’이 어떤 의도를 담았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꼼꼼히 설명한다. 11월 열리는 5차 6자회담에서는 4차회담에서 도출된 합의문에 담긴 표현의 ‘모호성’을 최대한 정리해야만 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다.
    분단과전쟁 이후 한미간 혹은 북미간의 모든 대화는 통역을 통하든 아니든 영어를 매개로 이뤄졌다. 그 50여 년 동안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람도 변하고, 나라도 변하고, 언어도 변해왔다. 언어는 곧 생각의 표현이다. 언어에 담긴 사고(思考)는 역사, 문화, 전통, 관습, 제도 그리고 가치관을 반영한다. 남북한은 상호 배타적인 체제의 대결로 인해 언어의 표현까지 많이 달라졌다. 상대방에 대한 전문지식과 이해가 없으면 원활한 대화는 물론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정도다.

    이는 한국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같이 영어를 한다고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의사소통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단순히 언어나 문화의 차이 때문에 외교협상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함축성이나 문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외교협상의 내용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9월13일 발표된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을 비롯해 지난 10여 년간 북한과 미국의 협상에서 나타난 언어 해석의 문제와 그 정책적 배경을 검토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는 11월로 예정된 5차 6자회담과 관련해 각국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가늠자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필자는 9월25일자 ‘워싱턴포스트’ 논평란(Outlook section)에 6자회담 공동성명서에 사용된 어휘들을 분석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에서 필자는 앞으로 해석상의 차이로 인해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예로 들어 ‘언어의 지뢰밭’이라고 표현했다. 필자는 특히 공동성명 문구 중 북한이 약속한 ‘abandoning all nuclear weapons and existing nuclear programs(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이라는 구절에서 특히 ‘abandoning’이라는 단어와 6자회담의 목표로 채택된 ‘the verifiabl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와 함께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at an appropriate time(적절한 시기에)’ 하기로 합의했다는 문구에도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abandoning’과 ‘dismantlement’



    6자회담의 합의문은 초안부터 영어로 작성되어, 영어로 토의하고, 영어로 최종 합의문이 채택된다. 과거 4자회담의 공동성명과 북미 양자간의 합의문 채택과정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내용이 일단 영어로 합의되면 그 합의문은 각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나서 비로소 발표할 수 있게 된다. 참가국 중 어는 한 나라라도 본국으로부터 합의문 초안에 대해 동의를 받지 못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면, 해당 문안이 협상자 회담에 다시 회부되고 조정을 거쳐 최종 합의할 때만 발표가 가능해진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칠 때도 있다.

    지난 6자회담의 공동성명 발표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필자는 우선 합의문에 쓰인 영어 문구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는 단순한 영어 단어의 분석이 아니다. 그러한 표현 뒤에 숨은 미국의 정책과 북한의 의도를 고려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합의문에 쓰인 ‘abandon(포기한다)’이라는 어휘는 자발적인 포기의 의사를 내포하지만 핵무기나 시설 등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미국이 시종일관 주장해온 ‘dismantlement(해체 또는 철폐)’라는 표현의 뜻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6자회담 합의문의 ‘abandon’이라는 표현은 북한이 핵무기와 핵계획을 포기(give up)는 하되 더 이상 개발, 생산 또는 유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는 뜻이 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분석이다. 이는 단순한 단어의 분석을 초월해서, 북한이 일단 핵을 포기할 수는 있겠지만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자신의 핵계획을 완전히 재기불능의 상태로 철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한다.

    필자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이미 지적한 문구 외에 ‘all …existing programs(모든 핵계획)’ 같은 표현도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본다. 미국측은 이 표현을 통해 북한이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우라늄 농축계획까지 합의문에 포함시키고자 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핵문제 해결의 일차적인 단계로 북한이 자신의 핵무기와 진행 중인 핵계획을 밝힐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우라늄 농축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북한은 이에 대해 “계획도, 기술도, 관련 인원도 없다”고 맞서왔다.

    또한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the verifiabl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는 한반도의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도 비핵화해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이 향후 비핵화 대상으로 미국 군사기지뿐 아니라 한국의 핵 연구시설까지 검증할 것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에 대비해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성명에서 미국과 한국은 남한에 핵무기가 없다고 말했지만, 북한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면 천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북한이 이 말을 믿는다면 왜 구태여 공동성명에 포함시켰겠는가. 설령 북한이 이 말을 믿는다 해도, 한반도는 남북을 다 포함하는 것인 만큼 정말 남한에도 핵무기나 핵계획이 없는지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필자의 의문이었다.

    ‘적절한 시기’는 ‘절대로 안 준다’는 뜻?

    물론 미국이나 다른 6자회담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비핵화’라는 말의 상대로 북한을 상정해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미국은 핵 문제가 북한 때문에 불거진 만큼 북한이 검증대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북한이 ‘Korean Peninsula’를 ‘조선반도’라고 부르는 데는, 정치적으로 한반도 전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이며, 반도 전체의 주인은 당연히 북한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남한은 미제가 강점하고 있는 조선 땅의 반쪽일 뿐이다. 몇 해 전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가 제주도를 방문하고 “여기도 내 땅인데…”라고 말한 것은 그저 감상적인 발언이 아니다. 남북의 국력(國力)을 비교할 때 남한의 우위를 부인하기 어렵지만, 북한은 여전히 역사, 문화, 가치관, 민족주의 시각 등에서 남한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비핵화의 대상이 조선반도일 경우, 남한도 당연히 검증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필자는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 논의에 쓰인 ‘적절한 시기(at an appropriate time)’라는 표현은 ‘절대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철폐하기 전에는 경수로를 제공할 수 없다는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고, 그나마도 그때 가서 ‘제공의 주제(the subject of the provision)’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지 제공하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6자회담 공동성명 발표 바로 다음날 북한이 경수로 제공 전에는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문제삼고 나오는 바람에 더욱 부각됐다. 북한은 경수로를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의 과거행동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필자가 이런 문제를 앞서 말한 ‘워싱턴포스트’의 글을 통해 제기하자 워싱턴에서는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다. 6자회담 협상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직접 ‘abandon’의 뜻을 정의하고 나섰고, 미국 관리들과 한국 정부도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은 자발적으로 핵계획을 ‘포기’하겠다고 했으며, ‘포기’는 ‘철폐’를 의미한다”고 해명했다. ‘검증가능한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해 한미 당국자들은 주한미군 시설을 포함한 남한 내 핵무기 및 핵시설에 대한 북한의 검증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물론 외교협상에서는 용어를 사전적 의미보다 당사자들간에 합의된 개념으로 사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북한이 ‘포기’란 용어를 ‘물리적 철폐’로 받아들인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은 6자회담이 다시 열리기 전에 ‘포기’와 ‘검증가능한 비핵화’의 개념이 명확히 정의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핵화’라는 용어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 생존 때부터 사용해온 말이다. ‘포기’의 개념과 함께 이 용어의 개념에 대해서도 당사자들간에 구체적으로 합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철폐(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주장해왔다. 4차 6자회담을 끝내면서 미국이 CVID에서 ‘포기’로 한 발짝 물러선 것은 6자회담을 둘러싼 국제 역학관계에서 미국이 불리한 처지에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측 협상대표는 자신들이 물러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또한 워싱턴의 보수 강경파 세력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문제가 될 수 있는 용어에 대해 해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포기’라는 용어를 받아들인 것이 곧 ‘철폐’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CVID에 얽힌 북한과 미국의 속내

    최근에 이르러서는 CVID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미국측이 회담장에서 이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기본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의 쓰임과 배경을 분석해보면 핵문제를 둘러싼 협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초까지만 해도 북핵 문제 해결의 목표를 설명할 때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철폐(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CVID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차 6자회담 때다. CVID란 약자(略字)를 회담장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중국측 대표다. 어느 나라 말이든 약자는 전문가들 사이에 그 개념이 충분히 공유될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측은 약자는 약자대로 다른 뉘앙스를 풍길 수 있음을 고려하여 다른 참가국과 언론들이 CVID를 보편적으로 쓰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사용했다.

    최초의 표현인 ‘verifiable and irreversible’에다 C(complete·완전한)가 추가된 것은 북한의 우라늄 계획을 포함한다는 뜻이고, I(Irreversible·불가역적)는 처음부터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핵협정(Agreed Framework·조미기본합의)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미국의 인식이 담긴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북한의 핵계획을 철폐할 때 영원히 복구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도 바로 이 I 부분 때문이다. 북한측에서 C 부분이 폐기대상의 범위, 즉 우라늄 농축계획까지 포함하려는 의미임을 감지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6자회담에 나와 농축계획의 존재를 강력히 부인했으며, 패전국이 아니므로 I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CVID라는 용어 자체의 사용을 반대한 것이다.

    북한은 처음에 CVID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라고 필자가 통역했을 때 그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한국말 표현은 한국의 6자회담 대표와 외교통상부 장관도 사용했던 용어다. 다만 ‘dismantlement’란 물리적인 개념으로 ‘해체’ 또는 ‘철폐’라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뜯어 부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용도 폐기’ ‘법안 폐기’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폐기’보다 훨씬 구체적인 물리적 행동을 가리킨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핵협정에서도 ‘dismantlement’를 ‘해체’로 해석한 전례가 있다. 그런데도 필자가 ‘폐기’라고 한 이유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후 북한은 얼마 안 가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려 세울 수 없는 페기’(북한에서는 ‘폐기’를 ‘페기’라고 쓴다)라고 자신들 나름의 표현을 선택했다. 이때까지는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같은 북한의 매체들도 조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한국 언론들도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어감이 조금씩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혼용했다. 같은 신문사에서도 용어가 그때마다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미국이 만들어낸 CVID에 대해 북한이 거세게 반발하자, 미국은 ‘효과적인 검증을 전제로 한 영구적이고 철저하며 투명한 방법에 의한 모든 핵 계획의 철폐(the dismantlement of all nuclear programs in a permanent, thorough and transparent manner subject to effective verification)’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이 표현은 CVID와 근본적으로 내용이 달라진 것이 없으며 용어가 더 복잡하고 길어졌을 뿐인데도, 북한은 다소 잠잠해졌다. 자신들의 반대의지가 관철됐다는 점에서 북한대표단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조선민족’이다 보니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도 있다. 이는 미국 사람들이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기도 하다.

    제네바 합의문의 ‘외교적 모호성’

    외교협상의 합의문 작성과정에서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호도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흔히 이를 ‘외교적 모호성(diplomatic ambiguity)’이라고 한다. 정치인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나 학자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 ‘우리는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한다(We agree to disagree)’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다. 부정적인 내용을 긍정적으로 표시하는 기술이다. 반면 외교에서는 이러한 표현조차 노골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우물우물 모호하게 넘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통해 협상 당사자들은 서로 차이점을 인식하고 상대방이 편리한 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한다.

    이러한 외교적 모호성의 극치는 1994년 제네바협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 정부는 이 협정에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과 대화하게 만드는 의무조항을 넣기를 바랐고, 북한은 남북대화를 거절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핵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 남북관계 개선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이 부분에 관해 미국과 북한은 ‘The DPRK will engage in North-South dialogue, as this Agreed Framework will help create an atmosphere that promotes such dialogue’라는 영어문장으로 표현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북한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은 이 합의문에 의하여 대화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따라 북남대화를 진행할 것이다’. 즉 ‘as’를 ‘되면’ ‘되는 때’로 해석해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대화에 나선다’는 의미로 풀이했다. 반면 이 표현에는 한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성이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북한이 곧 남북대화에 응하게 될 것이라고 볼 근거를 갖게 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남북한이 각자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제네바 합의문의 문구 중 문제가 된 또 하나의 사례로 북한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경수로의 완공날짜를 들 수 있다. 합의문구를 놓고 양측이 해석상 이견이 보였다. 당시 이 합의문은 북미간에 영어로만 서명했다. 영어합의문은 ‘by a target date of 2003(2003년을 목표날짜로)’로 돼 있었는데, 북한은 이를 ‘2003년까지’로 번역했다. 시간이 흘러 경수로 작업이 계속 지연되자 북한은 이 문구를 근거로 미국이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미국측은 2003년까지라고 한 것은 ‘목표일자’이지 ‘계약이행일자’가 아니라고 맞섰다. 물론 당시 경수로 건설사업이 지연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는 폐연료 관리문제를 포함해 북한측의 몇 가지 부정적인 행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네바 합의문의 부속 문서에도 원문인 영어와 북한이 번역한 조선말 사이에 어감이나 뉘앙스가 다른 부분이 여러 곳 있었다. 가령 북한은 ‘provision(공급 또는 제공)’을 ‘납입’이라 번역했다. ‘a nuclear-free Korean peninsula(핵으로부터 자유로운 한반도)’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로 표현했다.

    그후에도 북한은 식량지원과 관련해서 사용된 ‘monitoring(배급 감시)’을 ‘분배입회’라고 썼다. 기분 쁘게 감시는 무슨 감시냐는 것이 북한 관리들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외교협상에서 단어 하나가 갖는 힘은 엄청나다. 각국이 협상 때마다 언어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그러한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합의해 발표한 문건들 중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2000년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후에 발표된 조미(朝美)공동코뮤니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possible’의 힘

    이 합의문의 끝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가까운 장래에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견해를 직접 전달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and to prepare for a possible visit by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미국 대통령의 가능한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었다. 여기서 핵심 문구는 ‘a possible visit’이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때 북측에서는 ‘possible’이란 형용사를 없앴으면 하는 의사를 계속해서 비쳤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불발로 그쳤지만, ‘possible’이라는 단어 한마디 때문에 방문 불발에 대한 시비는 일지 않았다.

    얼른 듣기에는 매우 단호해 보이지만, 북한의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담화에는 모호성을 지닌 용어가 많다. 또 북한의 협상자들도 똑같이 모호한 표현을 이따금 사용한다. 지난 2월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기 전까지, 북한측이 말하는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t)’은 핵분열 물질, 핵무기 계획, 핵기술, 핵시설, 아직 시험하지 않은 핵무기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그뿐 아니라 북한은 ‘물리적 억지력(physical deterrent)’, ‘핵능력(nuclear capability)’, ‘핵무기(nuclear weapons)’ 등의 용어를 혼용하기도 했다.

    모호성의 절정, 북한의 용어들

    2003년 4월 북한은 폐연료 재처리와 관련한 외무성 대변인 발언을 통해 “이제는 8000여 대의 폐연료에 대한 재처리작업까지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부분은 ‘재처리작업까지’의 ‘까지’다. ‘까지’가 ‘포함하여(including)’인지 진행단계상의 ‘까지(up to the point of)’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당시 조선중앙통신(KCNA)의 영어판은 이를 ‘including’이란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 한국어 전문가들이 ‘up to the point of’라고 번역해야 맞다는 주장을 폈다. 전문가들이 이렇게 주장한 데에는 당시 워싱턴의 강경한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다. 북한이 재처리를 거의 완료한 단계라고 하면 그만큼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전망이 어두워지리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측에서 번역상 다른 견해가 제기되자 ‘including’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던 조선중앙통신의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해당 영문판이 사라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북미간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나중에 필자가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 직접 물어본 결과 ‘…까지 포함하여, 거의 끝나간다’는 KCNA의 최초 번역이 맞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처리완료 발언이 나온 후부터 북한은 ‘결과물(outcome)’이란 표현을 한동안 사용했다. 그런데 재처리 결과물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플루토늄의 금속화 상태인지, 핵무기 제조과정 중 어느 공정단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완성된 핵무기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한편 이런 차이점을 알고 싶어하는 6자회담 참가자들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밖에도 북한이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는 그 뜻이 명확지 않은 것이 많다. ‘적대시 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적대시 정책’을 ‘적대국에 대한 정책’이라고 정의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이 없으며 다만 북한의 정책을 적대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편 북한은 북한의 비위에 거슬리는 미국의 모든 언행을 ‘적대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지도부나 체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비난, 주한미군의 전쟁억지력 강화, 한미연합훈련의 실시, 북한인권법, 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확산방지 안보 구상, 북한에서는 ‘전파안보발기’라고 부른다), 경제 제재, 테러지원국 지명, 핵 문제의 유엔안보리 회부 가능성 거론, 미 행정부 관리 또는 미 의원들에 의한 북한 반대발언 등을 모두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간주한다.

    북미간의 대화를 통역하다 보면 북한말로 번역이 잘 되지 않는 말들도 있다. 가령 영어의 ‘logistics’는 한동안 남한 말로도 번역이 잘 안 되던 단어다. 원래 이 단어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군대를 통해서였다. 군대에서 ‘군수(軍需)’, 즉 수송, 병참, 병기 등 작전과 정보를 제외한 종합적인 군수지원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logistics’란 단어는 근년에 와서 일반 민간업계, 정부의 민간부처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삼성에서 ‘logistics’를 제일 먼저 ‘물류(物流)’로 표현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용하는 ‘logistics’는 ‘물류’뿐만 아니라 어떤 사업이나 계획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행정, 예산, 기술, 교통, 숙식 등 포괄적인 지원을 말하는 개념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물류’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logistics’의 개념을 설명하자 북한 사람들은 ‘실무적인 문제’라고 썼다. 영어의 ‘technical’이란 단어도 비슷한 혼돈을 일으켰다. 직역하면 ‘기술적 또는 법적으로’라는 의미지만, 그 쓰임새를 감안해 번역하자면 ‘따지고 보면’이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공통개념’ 확립해야 핵 문제 해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로 다른 말을 쓰는 나라들이 같은 문제를 논의하려면 언어상의 불일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러한 불일치를 이용하거나 ‘핑계 삼아’ 복잡하고 까다로운 쟁점을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외교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본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체제와 가치관의 차이, 오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겨난 북미간의 뿌리깊은 불신을 제거하지 않고는 북핵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나라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관계라면 용어상의 불일치나 해석상의 이견은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용어의 혼돈까지 불거지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질 수 있다. 필자가 오는 11월 열릴 5차 6자회담에서는 9월 채택한 공동성명 중 해석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표현들을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미묘한 부분에 대한 공통개념을 먼저 확립하고 다음에 실질적인 공약이행의 순서를 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비로소 의미있는 결과가 도출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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