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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떠나는 중국여행 ③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농민의 논리, 국가주의 앞에 무너지다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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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은 중화 문명의 상징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장성을 보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이징 인근의 바다링(八達嶺). 그러나 허베이성 오지의, 영화 ‘귀신이 온다’ 세트장을 에워싼 장성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경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장성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에서 촬영한 영화 ‘귀신이 온다’는 일본군에 점령당한 한 시골마을의 이야기로 200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일본군이 점령한 시골 마을의 순박한 농민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는 내용의 영화 ‘귀신이 온다’.

베이징에서 탕산(唐山)까지 고속버스로 2시간이 걸렸다. 기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중국에선 과거 기차가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다. 그런데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발달하고 쾌적한 신형 고속버스가 증가하면서 도시와 도시를 이동할 때 어지간한 거리면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장거리를 운행하는 고속버스는 대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짐칸과 화장실이 있다. 2층 버스를 탈 때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이 화장실 냄새를 피하는 요령이다.

탕산을 거쳐 영화 ‘귀신이 온다’의 무대인 허베이(河北)성의 외딴 시골로 가려는 길이다. 외딴 농촌에 귀신, 아니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귀신이 온다’의 무대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물속에 잠긴 장성의 돈대(墩臺)가 넓은 호수 한가운데 덩그렇게 떠 있는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중교통편도 없고,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그곳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과연 제대로 찾아갈 수는 있을지 막막했다. 베이징에서 청더(承德)를 거쳐 가는 방법과 탕산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탕산을 택한 것은 필자가 탕산을 중국의 상징으로 여겼던 때가 있어서다.

원래 탕산은 명나라 때부터 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종이처럼 얇은 자기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유명 자기는 대부분 탕산 제품이다. 하지만 나에게 탕산은 지진의 도시로 각인됐으며, 현대 중국에 호기심을 갖게 한 곳이다.

지진의 도시 탕산

리영희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룬 중국 관련 글은 1980년대 대학에서 중국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고, ‘중공’하면 괴뢰, 붉은 야만, 기아, 침략, 반란, 피비린내 나는 린치 따위를 조건반사처럼 떠올리던 때 리영희 선생의 글은 냉전 시대적 사고, 반공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을 보게끔 했다. 내가 탕산 지진을 처음 접한 것도 리영희 선생의 글에서였다.

1976년 7월 탕산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그해 12월 미국 뉴욕에서는 12시간 동안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재난을 당한 두 도시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탕산에서는 작은 난동도 일어나지 않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이웃을 돕는 희생정신이 발휘되는 등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탕산을 목격한 주중 일본대사는 “땅은 흔들리고, 건물은 계속 허물어진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전체를 위해 행동했다.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과 감동에 말없이 숙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지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정전이 지속된 12시간 동안 뉴욕은 정반대였다. 백화점과 상가가 약탈당하고, 살인과 강간, 방화, 파괴, 난동이 잇따랐다. 그야말로 공포의 밤이었다. 그날 밤 뉴욕 경찰은 3776명을 체포했다. 리영희 선생은 ‘당산 시민을 위한 애도사’에서 두 도시의 상황을 대비시키면서 이렇게 썼다.

“부자 나라의 시민들은 남의 것을 빼앗고 강간했다. 세계에서 어쩌면 제일 가난한 사회의 당산 시민들은 자기 것을 버리면서 이웃을 도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인간행동의 질적 차이였다.”

마오쩌둥 시대의 종말

선생의 글을 읽은 뒤로 나의 머릿속에 탕산은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깊이 새겨졌다.

탕산 시내 한복판에 ‘항진(抗震)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항진 기념관’이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으로 남기는 것보다 중국인이 얼마나 지혜롭게 지진에 대항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기념물이 전시되어 있다.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것은 1976년 7월28일 새벽 3시42분. 진도 7.8의 강진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온 도시가 폐허로 변했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24만2000명이 죽고, 16만5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서방 세계에서는 80만명가량 사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탕산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1976년엔 중국 정치와 역사에 탕산에서만큼 강도가 센 지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해 1월, 중국인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죽었고, 7월에는 중국공산당 군대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가 죽었다. 한 사람은 정치와 외교를 맡았고, 한 사람은 군대를 맡아 중국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각각 마오쩌둥(毛澤東)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떠난 뒤 탕산에 진도 7.8의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탕산 지진의 피해가 채 수습되기도 전인 9월9일 마오쩌둥이 죽고 말았다. 중국인에겐 강진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인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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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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