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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우리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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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 한인동포 사회의 역사가 40년에 이르렀다.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호주인도 많다. 그러나 호주의 소수민족 그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인 한인 사회의 권익 신장에 관심을 갖는 호주인은 드물다. 그런 현실에서 변조은 목사와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호주 한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정통한 변조은 목사.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하자 호주는 불과 나흘 뒤인 6월29일에 파병을 결정한다. 호주는 미국의 참전과 동시에 해군 구축함과 프리깃함을 유엔군 휘하에 배속했다. 다음날인 6월30일엔 공군 77비행중대 소속 무스탕 전투기를 6·25전쟁에 투입했다(그런 연유로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전투기를 ‘호주기(濠洲機)’라고 불렀다). 이어 9월28일에는 호주 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당도한다. 호주 육·해·공군이 모두 6·25전쟁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호주군은 그 뒤에도 항공모함 1대, 구축함 5대, 프리깃함 4대 등 해병대 병력을 추가로 배치했고, 공군도 프로펠러 추진 시퓨리기 2개 중대와 파이어 플라이기 1개 중대를 증파했다. 호주 공군은 1만9000회 출격을 기록하면서 36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잃었다.

이같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호주군은 3년의 전쟁에서 전사 361명, 실종 37명, 부상 1216명 등 약 1600명의 희생자를 냈고 29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혀 사망하거나 나중에 송환됐다. 6·25전쟁 기간에 호주는 전쟁 상황을 주요 뉴스로 자세하게 보도했다. 뉴스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호주 사람들의 뇌리엔 그때 그 장면이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다.

호주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멜버른에서 대학에 다니던 한 호주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랜드 출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를 꿈꾸던 그는 연일 보도되는 6·25전쟁의 참상을 보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와 길고긴 피난민 행렬….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밥 먹고 잠잘 곳은 있을까. 온몸을 붕대로 친친 감은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을까. 혹 고아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길한 상념은 또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국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나라의 전쟁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처음엔 자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심했다. ‘저 나라에 가서 저들을 도와주리라’고. 그는 곧바로 장로교단을 찾아가 한국으로의 선교사 파송 신청을 했다.

그가 바로 존 브라운(72·한국 이름 변조은) 목사다. 그는 20대 초반에 한 결심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12년간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호주 장로교신학대 교수를 역임하고, 호주 최초의 한국인 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를 설립했다.

필자는 ‘한국을 사랑하는 호주 사람들’을 취재하기 위해 여러 한인동포와 한인단체에 자문했는데, 자문에 응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그 첫 번째 인물로 변조은 목사를 꼽았다. 그가 한국과 한인동포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변조은 목사는 한인동포뿐 아니라 호주의 짙은 그림자와 같은 원주민(애보리진)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서도 힘을 쏟아온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변조은 목사를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또 하나 있다. 그가 호주 기독교 통합의 역사적 산물인 연합교단의 창립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연합교단은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단으로 연합한 통합체 교단이다. 변 목사는 “분열로 일관해온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호주에서만은 피해보자”는 강한 의지를 갖고 호주 기독교 통합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변 목사는 멜버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호주 장로교신학대에 입학했다. 진작부터 신학에 뜻을 두긴 했지만, 한국에 가서 전쟁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선교사 신분이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여자친구이던 노마 브라운도 적극 찬성했다. 찬성한 정도가 아니라 “그 길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변 목사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3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그 사이 노마 브라운과 결혼하고, 아들 마이클 브라운(한국 이름 변선태·목사)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단으로부터 대학시절에 접수한 한국 선교사 파송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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