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박승춘 전 합참 정보본부장이 본 북한 미사일 발사

“미사일 수출로 달러 챙기는 군부 강경파, 北 주도권 장악”

  •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6-08-14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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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춘 예비역 중장은 33년 군 생활 대부분을 대북정보 분야에서 보낸 베테랑 북한군사 전문가다. 정보병과를 대표하는 실무형 군인이던 그는 병과 최고위 보직인 국방부 국방정보본부장 겸 합동참모본부 정보참모본부장을 지내고 2004년 전역했다.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분석해달라는 ‘신동아’의 기고 요청에 박 전 본부장은 “나설 상황이 아니다”며 난색을 표했다. 대신 기사 작성을 돕는 비공식 인터뷰라면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오히려 그의 전문적인 식견을 일관된 흐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인터뷰 전체를 글의 형식으로 정리한다. 박 전 본부장의 양해를 구한다.
    박승춘 전 합참 정보본부장이 본 북한 미사일 발사
    7월5일 새벽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射)거리 500km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스커드C와 사거리 1300km의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노동, 장거리인 대포동 2호를 한꺼번에 발사했다는 사실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스커드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은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에서 발사됐고, 대포동 2호는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발사됐다. 북한이 이렇듯 각기 다른 종류의 미사일을 한꺼번에 발사한 것은 각각의 미사일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관련 국가들에 동시에 전달하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번 미사일 발사에는 눈앞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당면목표와 장차를 생각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한꺼번에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면목적은 많은 이가 분석한 바와 같이 북미 관계와 관련 깊다. 중동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백악관과 여론을 돌려 주목받음으로써 직접대화를 유도하려는 목적이다. 미국 시각으로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춘 발사일정에서도 “날 좀 봐달라”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주변국에 대한 무력시위, 특히 한반도 전쟁을 상정한 위협 성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은 여전히 한반도의 무력통일 전략을 유지하고 있고, 그것만이 실질적으로 유일한 통일방법이라는 인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위한 북한의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는 게 정설이다. 하나는 인민군 차원의 군사력 확충이고, 또 하나는 남한 내부의 여건조성이며, 마지막 하나는 여건이 조성되어 남침했을 때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6·25전쟁 직전 트루먼 행정부가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자,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남침을 감행했다. 그 예상은 빗나갔고 결국 무력통일은 실패했다. 이는 북한 처지에서는 매우 뼈아픈 경험이었을 것이다. 전쟁 이후 북한은 패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에 입각해 꾸준히 전력증강 사업을 벌였다.

    패전의 주요원인이 미군의 참전이었던 만큼, 전력증강 역시 상당부분 향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진행됐다. 예를 들어, 남한이 아직 잠수함을 한 대도 보유하기 전에 북한이 수십 척의 잠수함을 확보한 것은 미군의 전시증원병력이 부산을 통해 한반도로 건너오는 것을 해상에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미사일에도 마찬가지 의미가 있다. 스커드 미사일로 남한 전역을 커버하고,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1호로 일본 및 오키나와 지역까지 감당하며, 대포동 2호로 미국 알래스카까지 억제력을 갖겠다는 의지다. 이 또한 미국의 전쟁개입을 막는다는 목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향후 언젠가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군이 오키나와 기지를 통해 개입하려 할 때 미사일 공격으로 저지하겠다는 시나리오다. 개전초기 한반도로 이동 중인 미군이 경유지에서 미사일 공격으로 해를 입는다면 미국 내 참전반대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요구에 따라 미군이 철수한 이후 상황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국민이 우리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나왔는데, 이제 와 아군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감수하면서까지 참전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한국과 사이도 안 좋은데 도쿄로 미사일이 날아오는 상황을 각오하면서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될 것이다. 북한 미사일에 얽혀 있는 ‘군사적 메시지’는 이렇게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발사 실패는 다단계 카드 확보용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대포동 2호로 추정되는 미사일이 발사 수십초 만에 추진력을 잃고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기술적인 실패냐 의도된 실패냐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있는 듯하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의도된 실패로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여러 발의 미사일을 발사한 점이나, 단거리 미사일을 먼저 발사하고 대포동 2호를 중간에 발사한 시간순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이미 북한은 1998년의 미사일 발사를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입증한 바 있다. 이번에는 미국 본토를 목표로 하는 미사일을 만들고 있음을 과시하면 그것으로도 목표하는 바가 충분히 달성됐을 것이다. 오히려 미사일이 제대로 날아가 충분히 사거리를 얻으면 그 후폭풍이나 미국의 강력한 반응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에 하나 미국의 미사일방어시스템(MD)으로 대포동 2호가 격추되는 장면이라도 연출된다면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라는 염려도 했을 것이다.

    북한은 발사 이틀 뒤인 7월6일 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사일 발사는 자위적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정상적 군사훈련”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앞으로도 계속 미사일 발사를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대목이다. 북한은 지난 10년 동안 핵 카드를 활용해왔지만, 2005년 2월의 핵 보유 선언으로 거의 마지막까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은 단계는 오로지 핵실험뿐인데, 이는 최소한의 모호성마저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이므로 감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사일은 다르다. 앞으로도 계속 실험해가며 여러 단계로 잘라 카드로 쓸 수 있다. 미사일의 탄착점을 조금 더 길게 잡아가며 사거리를 늘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번의 실패는 앞으로 계속 써먹을 카드를 남겨두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고 본다.

    미사일을 과연 발사할 것인지를 두고 북한 내부에서 적잖은 검토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당초 외신들은 미국과 일본 당국자들이 6월18일에 대포동 2호가 발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고 보도했다. 이 무렵부터 실제 발사가 이뤄진 보름 남짓의 시간이 아마도 북한 내부의 고민이 정점에 다다른 시점이었을 것이다.

    미사일을 둘러싼 갈등의 본질이 미국과의 기(氣)싸움이라는 것은 평양도 잘 알고 있다. 미국이 이미 발사 징후를 포착해 공론화한 상황에서 발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강한 압박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내부적 권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반대로 실제로 대포동 2호를 최장 사거리로 발사했다가 미국의 MD 시스템에 의해 요격당하면 그 또한 뒷감당이 간단치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북한은 대포동 2호의 본격적인 성능과시를 ‘아껴두면서도’ 미사일 발사라는 파장은 유지하는 중간지점을 찾은 것이 아닌가 한다. ‘대포동 2호를 발사하되 멀리 날아가지 않게 한다’는 결론이다. 만일 대포동 2호만 발사하면서 제대로 사거리를 내지 않는다면 국제적으로 망신을 샀을 것이고 파장도 매우 작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발의 미사일을 한꺼번에 발사했고, 덕분에 후폭풍은 적절히 제어하면서 시위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軍이 黨에 ‘노!’ 하는 상황

    조금 더 폭을 넓혀, 이번 미사일 발사를 5월25일 치르기로 했던 경의선·동해선 철도연결 행사가 북한측의 갑작스러운 취소로 무산된 것과 연결해 해석하려는 견해가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시의 돌연한 취소는 북한 군부의 반대 때문이었다는 게 통일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대남일꾼’으로 상징되는 노동당 관계자들이 철도연결과 경협확대 등 개혁·개방을 향한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면, 군부 일각에서는 이들을 견제하고 보다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목소리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번의 미사일 발사도 강경한 모험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군부의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미사일 발사라는 사안 자체가 군부가 담당하는 사업이고,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최종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은 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수령 중심체제를 이끌어가는 두 수레바퀴는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군이다. 김일성 시대에는 당(黨)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고 군(軍)은 당의 철저한 통제하에 있었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가 군의 모토였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는 군과 당이 이전에 비해 수평적인 위치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은 당의 지시 대신 국방위원회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 통제를 받는 체제로 변화한 것이다. 박봉주 총리 등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추진되던 철도 연결을 군이 반대해 무산시켰다는 것은, 당이 하는 일에 대해 군이 ‘노!’를 외치는 상황이 됐음을 의미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박승춘 전 합참 정보본부장이 본 북한 미사일 발사
    김정일 위원장의 정책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수위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계속되는 ‘선군(先軍)정치’로 인해 당의 입김보다는 군부의 입김이 김 위원장에게 훨씬 강하게 먹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사안이든 일단 김 위원장의 결정이 떨어지면 군이 대놓고 반대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고지도자에게 여러 정책안을 건의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당과 군이 의견을 조율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군의 목소리가 훨씬 커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최근 수년 새 ‘가시적 도발’ 늘어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돈이다. 북한의 미사일은 단순히 군사무기가 아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상품’이다. 북한은 1998년 이후에는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해본 적이 없다. 2004, 2005년에 실크웜 등 지대함(地對艦) 미사일을 실험발사했지만, 탄도미사일은 발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능개량이나 생산이 중단됐던 것은 아니다. 이미 실전배치된 스커드나 노동 미사일이라도 시험발사를 통해 그 성능개량을 과시해야 다른 나라에 판매할 길이 열린다. 특히 이번에 깃대령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동식 발사대는 최고의 수출상품이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벌어들이는 돈이 북한 군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개성공단 등 개혁·개방을 통해 군부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실익은 사실상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군사부문 수출을 통해 획득한 자금은 제2경제위원회를 통해 다시 군부의 통제하로 들어간다. 이번 미사일 발사 결정을 강도 높게 주도한 것이 군부라고 분석할 만한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6·25전쟁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 흐름을 살펴봐도 일정부분 확인할 수 있다. 군부의 힘이 강하던 1960년대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나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 등 대규모 도발이 잦았다. 반면 많은 군부인사가 숙청되고 난 1970년대에는 땅굴 등 은밀한 침투로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1980~90년대 초반까지도 잠수정을 이용한 은밀침투가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장악하고 ‘선군정치’를 공식화한 이후에는 1996년 강릉 잠수함 사건,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서해교전, 2005년 핵 보유 선언, 이번의 대포동 2호 발사 등, 가시적이고 과감한 형태의 무력시위형 도발이 줄을 이었다. 인민군 정규전력이 전면에 나선 것도 특징이다. 당 작전부 공작원이나 특수부대 중심이던 1980~90년대의 은밀침투와는 상당부분 격이 다르다.

    이번에 7발의 미사일이 발사된 것도 마찬가지다. 만일 당이 무력시위의 필요성을 절감해 이번 발사를 주도했다면 과연 한꺼번에 이렇듯 많은 미사일을 ‘와장창’ 발사했을까. 당이 이번 발사를 입안했다면 보다 ‘기술적인’ 도발을 모색했을 것이다. 이렇듯 다수의 미사일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것은 군부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이왕 하는 김에 다 해버려” 하는 인민군 특유의 정서가 투영된 것이라고 느껴진다.

    결국 이 모든 특징은 현재 북한 군부가 전혀 거리낌이 없이 대남·대외정책 결정을 주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른바 ‘선군정치’ 이후 군부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그에 따라 199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도발의 양상이 과감한 ‘무력시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군부 강경파의 실체

    그렇다면 상황을 주도하는 ‘군부’의 구체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어떤 인물들이 북한의 대외정책을 좌우하는 장본인일까. 누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사실 이를 추적하는 것은 북한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과제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근거도 많지 않다. 그나마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현재 공식적으로 북한군을 대표하는 이들은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 3인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군부인사들은 이들이 아니다. 7월9일 ‘연합뉴스’가 북한 공식매체 보도를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김 위원장의 공식행사 가운데 70%가 군부대 시찰 및 군 관련 활동이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이 군부대를 시찰할 때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인물로는 현철해 대장, 박재경 대장, 이명수 대장을 들 수 있다.

    박승춘 전 합참 정보본부장이 본 북한 미사일 발사

    2006년 3월28일 인민군 제3406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이들은 각각 26차례 김 위원장을 수행해 내각, 당, 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수행횟수를 기록했다는 게 ‘연합뉴스’의 분석이다. 반면 한 계급 위인 김영춘 총참모장이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8회, 6회에 불과하다. 박봉주 총리(6회),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4회), 노두철 부총리(3회), 장성택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3회)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

    최근 들어 군부의 강경노선이 김 위원장에게 설득력 있게 ‘먹혀 들고’ 있다면, 이는 현철해, 박재경, 이명수 3인에게서 나왔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최고지도자와의 ‘스킨십’이 영향력의 바로미터가 되는 절대권력의 속성상, 이들이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는 분석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박재경 대장은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 현철해 대장은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총국장을 맡고 있다. 이명수 대장은 1997년부터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지내고 있다. 북한의 모든 조직에서 선전과 조직은 핵심부서다. 김정일 위원장 본인이 권력을 공식승계하기 전 노동당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를 오랫동안 맡았을 정도다. 현철해와 박재경 대장은 직속상관이자 북한 내 권력서열 3위인 조명록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내세워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명수 작전국장은 전투명령, 각급 부대의 군사전략 및 작전계획 수립, 전투준비상황 감독을 실무적으로 지도하는 실세 중의 실세다. 김 위원장보다 나이가 많은 대표 3인은 사실상 ‘얼굴마담’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는 이들이 김 위원장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철도연결 문제도 정말 ‘군부의 반대’로 꺾였다면 그 역시 이들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정책이 입안되는 과정에서 군부의 주장이 매우 강력하게 반영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고, 이에 대해 당이나 내각 관료들은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미사일 발사 직후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 차석대사는 외신에 “우리는 군대가 하는 일은 모른다”고 말했다. 이는 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들린다. 단순한 책임회피일 수도 있지만, 군에 대한 불만, 군부가 상황을 주도하는 현재 흐름에 대한 불만이 은연중에 묻어난 말로도 볼 수 있다. “군은 우리 말을 잘 안 듣는다, 우리에게 상황을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해석한다면 과잉일까.

    ‘장기전망’ 고려할 겨를 없어

    장기적으로 볼 때 이번 미사일 발사는 절대 평양에 유리한 카드가 아니다. 공조를 강화하고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미국이나 일본에 ‘명분’을 주는 일이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아소 다로 외상이 “(미사일을 발사해줘서) 김 위원장이 고맙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번 발사로 MD로 상징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협력이 굳건해지고 일본의 재무장이 궤도에 오르면, 이에 대응해야 하는 북한은 사정이 더욱 어려워진다.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요소다.

    그런데도 결국 김 위원장은 발사단추를 눌렀다. 이는 북한이 향후 수년 혹은 수십년이라는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수를 두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미국의 무관심’이라는 당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독(毒)이 될 카드를 질러버린 것이다. 방코델타아시아 계좌동결 등으로 인해 최근 평양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북한의 이러한 급박한 사정, 대외정책 결정에서 군부가 주도권을 잡았다는 관측은 여러 모로 우리에게는 부정적이다. 우선 코너에 몰린 북한이 앞으로도 모험주의적이고 도발적인 행동방식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려면 경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군이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는 경제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경제개혁은 여전히 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향후 행보를 낙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근거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보자. 극단적으로 말해 북한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현 상황을 끌고가거나, 개혁·개방으로 나가거나, 남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주변정세가 악화돼 현 상황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개방이냐 무력통일이냐의 두 가지 카드만 남은 셈이다. 이 두 카드는 각각 당과 군을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개혁·개방을 절대적인 과제로 생각한다면 ‘선군정치’ 노선을 변경해야겠지만, 그러한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이번에 북한은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택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경제개혁보다는 체제유지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개방이 체제 자체의 생존에 부정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평양은 군부의 주도하에 다시 한번 무력통일 방향으로 정책노선을 분명히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남북관계는 더욱 긴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북한으로 하여금 무력통일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임을 절감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오히려 북한이 개혁·개방 노선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 군부가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이라면, 남쪽의 일방적인 지원이나 경제협력으로 북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무력통일의 최대장애물을 미국의 개입으로 보는 한, 우리가 한미동맹과 공조를 강화할수록 역으로 북한은 개혁·개방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북한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동향을 감지하는 정보는 대부분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양국 군사당국이 공유하고 있다. 중간에 누가 차단한다거나 방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양국 정부가 상황을 파악하는 1차 재료는 거의 대부분이 동일하다. 적어도 대북(對北) 군사정보의 경우 미국은 자신들이 확보한 정보를 우리에게 충분히 제공한다. 이는 상당부분 현재의 한미연합사 체계의 힘이다. 향후 연합사가 해체되고 전시작전권에 변동이 생기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현재상태는 그렇다.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정보의 해석과 정책결정의 차원에서다. 1차 재료가 같아도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는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지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생산자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보를 생산해 제공하면 그 다음 단계에서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이번 상황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였다. 미사일 발사조짐이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 인공위성인지 미사일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견해가 보도됐다. 그러나 위성이든 미사일이든 발사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위성사진 등을 통해 조짐이 구체화된 뒤에는 주입된 연료가 도마에 올랐다. 사진에 찍힌 연료통의 수량으로 볼 때 대포동 2호에 주유(注油)가 끝났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북한의 주요지점을 관측하는 위성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유가 완료됐는지 를 100%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논리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똑같은 연료탱크 위성사진을 갖고도 위협을 부각할 필요가 있는 미국측은 “주유가 이뤄졌다”고 말하고, 위협의 극대화를 경계하는 한국측은 “주유가 완료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한미 양국 사이에 정보는 충분히 공유되고 있다. 지향점과 시각에 따라 이들 정보를 해석하는 방향, 앞으로 전개할 정책의 내용이 달라질 뿐이다. 정책에 차이가 있다 해도 한번 만들어진 정보공유 시스템은 쉽사리 무력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보공유 시스템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복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다시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까닭

    다시 한번 한미동맹의 강화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핵과 생화학무기, 미사일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핵무장을 한다고 해도, MD를 구축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러 발의 미사일이 동시에 발사된다면 어느 미사일에 핵탄두가 장착돼 있는 줄 알고 요격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한미연합사의 틀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정보공유 시스템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연합지휘체계를 바꾸려는 시도가 충분한 사전검토와 준비를 거친 뒤에 추진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정책의 차이는 조율할 수 있지만, 한번 무너진 정보 시스템은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 미사일 발사 파문을 지켜보며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교훈은 이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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