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유럽통합 50년의 현주소

연방국가 꿈꾸는 EU, 갈 길은 멀고 비는 내리고…

  • 안병억 anpye@hanmail.net 파이낸셜뉴스 국제부 차장

    입력2007-03-14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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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3월로 유럽연합(EU)이 창설 50주년을 맞는다. 세계 총생산의 21%를 차지하는 경제블록으로 성장한 거대공룡 EU의 어제, 오늘, 내일을 조명해본다. 과연 EU는 미래 동북아 공동체의 ‘살아 있는 실험실’이 될 수 있을까.
    유럽통합 50년의 현주소
    오는 3월25일은 유럽통합의 출발점이 된 ‘로마조약’이 체결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유럽이사회(회원국 정부와 국가수반의 모임)와 각료이사회(회원국 장관들의 모임), 순회의장국 독일은 이날 베를린에서 대규모 축하행사를 마련한다. 각 회원국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이미 치러졌거나 연중 열릴 계획이다.

    1957년의 로마조약을 출발점으로 삼아 회원국들은 경제통합을 매개로 정치, 외교, 안보 등 각 분야에서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새해 1월1일 발칸반도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신규 회원국이 됨으로써 EU는 현재 27개국 4억8800만명을 거느리고 세계 총생산의 21%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으로 성장했다.

    통합의 출발점 ‘관세동맹’

    로마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카피톨 언덕을 기억할 것이다. 관광객들은 로마시대 중심가였던 포럼과 그 맞은편에 몰려 있는 신전을 지난 뒤 계단을 올라 이 언덕을 구경한다. 현재 카피톨 언덕의 한편에는 로마시청이, 다른 한편에는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그곳에선 로마의 현제(賢帝)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관광객을 맞는다. 로마조약은 꼭 50년 전인 1957년 이곳 로마시청에서 체결됐다.

    당시 6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은 회원국 간 경제통합을 목표로 하는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원자력 협력을 위한 유럽원자력공동체(EAEC)를 설립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서유럽은 제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내전’을 치른 후 세계의 중심무대에서 멀찌감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들은 이 조약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디디고 일어서 경제를 통해 재도약할 것’을 다짐했다.



    우선 경제공동체는 회원국 간 관세동맹 결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6개국은 1970년까지 12년(로마조약이 비준된 1958년을 기준으로) 동안 3단계에 걸쳐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자는 게 주 내용. 주목할 점은 관세동맹이 자유무역협상을 포함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관세동맹은 비회원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회원국이 합의한 단일의 관세를 매김으로써(공동대외관세) 자유무역협상보다 한 단계 발전한 통합 형태를 유지했다.

    또 경제공동체를 결성한 데는 무역자유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경제적 목적 이외에 국제무대에서 서유럽의 위상을 회복하자는 정치적 목적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회원국 간에 경제교류를 강화하고 시민의 왕래가 잦아지면 전쟁을 상상할 수도 없는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의도는 1952년 출범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에서 벌써 분명하게 드러난다.

    석탄과 철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략물자이다.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는 이런 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2차대전 종결 이후 프랑스는 독일의 호전적인 민족주의를 제어할 방법을 ECSC에서 찾았다. 1차대전 후 독일에 대한 강력한 보복에 나섰다 실패하고 또 한 번의 침략을 받은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한 국가로서의 동등한 자격을 주면서 전쟁의 수단이 되는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석탄철강공동체 6개국(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은 석탄과 철강, 고철 등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관리하며 이 부문에서 각종 관세와 비관세를 철폐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전략산업인 석탄과 철강 부문의 자유무역은 다른 경제부문과 상당한 연관이 있었다. 석탄과 철강의 생산량 조절에 따라 실업이 발생하기도 했고 회원국의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석탄과 철강분야에서 경험한 자유무역 관행을 경제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고 공감하게 됐는데 그 결과물이 유럽경제공동체였다.

    유럽통합 50년의 현주소

    2005년 10월 영국에서 열린 EU 25개국 비공개 정상회담.

    당시 서유럽은 2차대전 이후 평균 5%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구가하고 있었다. 예정보다 2년 빠른 1968년에 회원국간 관세동맹을 완성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원래 목표대로라면 노동과 자본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더 진전된 경제통합을 이룩해야 했지만 1970년대 들어 국제정치·경제의 급격한 변동으로 빠르게 진행되던 통합은 정체기를 맞는다.

    ‘유럽 동맥경화증’의 시대

    1970년대 유럽 경제통합의 최대 걸림돌은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서유럽을 강타한 석유파동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정도를 무역에 의존하던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은 유가 급등으로 수출경쟁력이 하락했고 많은 실업자를 떠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회원국들은 범유럽 차원에서 실업률 감소와 경제성장 회복을 공동으로 대처하기보다 개별 회원국 차원에서 해결했다. 이미 무너진 관세장벽 대신 각종 비관세장벽을 높게 쌓음으로써 시민의 자유왕래와 자본, 노동의 자유이동을 막았다.

    이때부터 유럽통합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은 바라볼 수 없게 됐고, 회원국들의 경제성장률은 일본이나 미국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유럽통합사에서 ‘유럽 동맥경화증(Eurosclerosis)’이라고 부르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러나 이런 정체시기에도 일부 성과는 있었다. 유럽정치협력(EPC·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과 유럽통화체제(EMS·European Monetary System)라는 협력체제가 구축된 것. 유럽정치협력은 경제 동맥경화시대의 서막이 오른 1970년부터 시작됐다. 이때부터 회원국들은 주요 국제 문제에 있어 협력을 강화하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를 위해 회원국 외무부 정책국장들이 정기적으로 만났고 외무부 장관들도 수시로 얼굴을 마주했다. 각국 외무부 사이의 의견조정을 위한 비밀 팩스도 설치됐다.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유럽경제공동체 9개국(1973년 1월1일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가 회원국이 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해결원칙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의 생존권과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동시에 인정하자는 안이었다. 이 안은 유럽정치협력의 공동의견으로 채택됐다. 당시 9개 회원국은 공동의견에 합의하기까지 수십차례 논의를 하는 등 심한 진통을 겪었다.

    유럽통화체제는 1979년에 시작됐다. 회원국 경제력을 기준으로 통화 바스켓을 정하고 회원국 화폐 가치의 안정을 위해 환율 변동폭을 상하 2.25%로 규정했다. 당시 독일이 경제 규모가 가장 컸고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안정돼 있었기에 독일 마르크화가 기축통화 노릇을 했다. 환율 변동폭이 정해져 있어 회원국 내 기업들은 상거래를 할 때 환차손(換差損)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회원국들은 관세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관세정책에 대한 모든 결정권한을 집행위원회에 넘겼으며, 이 덕분에 집행위원회는 통상정책에 있어 배타적인 정책·입법 제안권을 지니고 유럽경제공동체를 대표해 통상 문제를 협상하고 조약 체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EPC와 EMS의 행정부 격인 유럽경제공동체 집행위원회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회원국들은 외교정책이나 통화정책의 권한은 집행위원회에 이양하지 않았다. 그저 상호조정과 협조를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국경 없는 단일시장

    유럽 동맥경화증을 극복하기 위한 회원국 간의 정책수렴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우선 1979~1984년 유럽공동체를 거의 마비시켰던 영국 예산 문제가 이때 해결됐다.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당시 9개 회원국 가운데 7위의 경제규모를 가졌던 영국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회원국이 유럽공동체 예산에 너무나 많은 돈을 납부한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자체 예산(own resources)’이라고 하는 유럽공동체 예산은 비회원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농산물에 부과되는 관세가 주 수입원이었다. 영국은 공동체 비회원국인 영연방과의 교역, 특히 농산물 수입이 많아 유럽공동체 예산에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납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혜택은 적었다. 당시 유럽공동체 예산의 70%가 농민 지원에 사용됐는데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한 나라여서 지원할 농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런 문제를 시정해달라고 유럽경제공동체에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1984년 공동체 예산 명목으로 낸 비용의 3분의 2를 돌려받는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유럽통합 50년의 현주소

    터키가 유럽에 속하는 가의 문제는 EU 회원국을 여러 갈래로 가르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영국 예산 문제 해결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공을 세웠다. 1981년 5월 집권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집권 2년 동안 국내 개혁에 몰두하느라 유럽 정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 정책이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통합정책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4년 상반기 프랑스가 유럽이사회와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을 맡자 미테랑은 영국 예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유럽통합의 진전이 가능하다고 봤다. 미테랑은 유럽통합의 진전을 간절히 원하던 독일의 전폭적 협력을 등에 업고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유럽의회도 ‘유럽연합을 설립하는 조약 초안’을 통해 유럽통합을 진전시키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1985년 유럽의회 의장인 자크 들로르는 ‘유럽 단일시장을 이룩하자’는 제안을 해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그간 비관세 장벽을 쌓아 자본과 노동의 자유이동을 막았던 회원국들은 이 제안에 고무돼 ‘국경 없는 단일시장’을 만들기 위해 로마조약의 일부를 개정했다.

    단일유럽의정서는 1992년까지 국경 없는 단일시장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 안전과 환경 등의 분야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면 회원국 전체에서 자유롭게 교역하도록 상호인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아울러 정치협력 부분에서도 일부 개정을 단행했다. 유럽경제공동체 집행위원회가 유럽정치협력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됐고, 집행위원회가 권한을 보유한 대외통상 문제에서도 유럽정치협력과 ‘밀접한 상호조정을 위해 노력한다’고 명시됐다. 집행위원회와 유럽정치협력의 정책조정 문제는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당시 9개 회원국이 대(對)소련 경제제재를 결정하면서 불거졌다. 경제제재 부과와 이행감독은 집행위원회의 몫인 반면, 제재부과 방식 결정은 유럽정치협력에서 논의되다보니 어려움이 컸던 것.

    단일유럽의정서를 통해 유럽통합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정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당시 회자되던 ‘1992’는 단일시장 완성을 위해 전진하고 있던 공동체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연합군 형태로 운영

    로마조약을 개정하는 데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단일유럽의정서는 1986년 2월에 서명되어 1987년에 비준됐다. 그러나 로마조약의 1차 개정 이후 불과 5년 만에 조약이 대규모로 개정됐다. 1992년 유럽연합조약(일명 마스트리히트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과 이듬해의 소비에트연방 붕괴, 동구권의 시장경제 이행 등으로 유럽의 대외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따라서 이에 발맞춰 유럽공동체의 역할과 임무 등을 새롭게 규정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이것이 반영된 게 유럽연합조약이다.

    유럽연합조약은 기존 경제부문의 통합 이외에 공동외교안보정책(CFSP·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과 사법 및 내무 분야 협력을 새로이 규정했다. 이 두 분야는 집행위원회가 정책·입법 제안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회원국과 공동으로 행사한다. 회원국은 이 분야의 권한을 공동체로 이양하지 않은 채 상호 협력을 강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 두 분야의 협력은 1997년의 암스테르담조약과 2001년의 니스조약으로 조금씩 강화됐다.

    말은 ‘공동외교안보정책’이지만, 이는 1970년에 시작된 유럽정치협력을 좀더 강화한 수준으로, 원대한 목표만 규정했을 뿐 실제 ‘공동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도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외교정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03년 초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영국, 스페인 등 몇몇 회원국은 이를 지지한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반대했다. 회원국 간 합의가 불가능하자 유럽연합의 공동외교안보정책 문구는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회원국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해서는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실시해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회원국들은 남아공이 1990년대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고 국제사회로 복귀하자 경제지원에 한목소리를 냈다. 회원국과 공동체의 남아공 지원이 한데 어우러짐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국방 분야에서도 점차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1999년부터 코소보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 등 각 EU 회원국 군(軍)은 초기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2002년부터는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지휘부를 맡아 일종의 연합군 운영 형태를 띠고 있다. 상이한 조직문화를 지닌 회원국 군인들이 현장에서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며 얻는 경험은 소중하다. 또 2004년 7월 발족된 유럽국방처(EDA·European Defence Agency)는 회원국 간의 방산협력과 연구개발 업무를 조정하고, EU 위성센터는 새로운 위성항법시스템이 장착된 갈릴레오 위성이 보내는 첨단 이미지를 분석해 회원국에 전달한다.

    정치·사법공동체 향한 행보

    사법 및 내무 분야의 협력은 국경 없는 단일시장 형성을 위한 각종 조치에서 부가적으로 제기됐다.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다보니 범죄자들도 회원국 어디로나 비자 없이 이동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사법과 내무 분야는 나라마다 보수적이고 독특한 조직문화를 갖고 있으며, 자국 내에서도 좀처럼 다른 부처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통합이 진전되면서 국가주권의 핵심인 사법과 내무 분야에도 회원국 간의 협력이 긴요해졌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후 2년 만에 회원국들은 공동체포 영장제도를 도입했다. 인신매매나 테러용의자, 돈세탁 등 회원국이 합의한 30개의 중요범죄에 대해 한 회원국이 발부한 체포영장이 다른 회원국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공동체포영장을 접수한 회원국 사법당국은 보통 한 달 이내에 회신을 하게 되어 있다.

    2005년 7월7일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테러사건 용의자가 이탈리아로 도주하자, 영국 정부는 공동체포영장을 발부해 한 달 만에 이탈리아로부터 용의자를 인도받는 데 성공했다. 1980년대 단일유럽시장을 완성할 때 도입한 ‘상호인정’ 개념을 사법 분야로 확대한 것이 공동체포 영장제도이다.

    또한 2003년부터 회원국들은 비회원국 시민에 대해 공동비자와 이민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민을 신청하는 이른바 ‘이민쇼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민의 정의와 이민신청절차, 이민을 거부당한 사람들에 대한 조치 등에 대해 회원국들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경제통합에서 시작된 유럽통합은 이렇듯 외교와 안보정책, 사법과 내무 등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터키 딜레마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우랄산맥에서 대서양까지’라는 말로 유럽의 지리적 경계를 표현한 바 있다. 유럽통합사에서 ‘확장(widening·회원국 확대)’과 ‘심화(deepening·공동체가 더 많은 권한을 보유하는 것)’는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1957년 로마조약 체결 당시 6개국이던 회원국은 1973년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가 가입함으로써 9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로 복귀한 그리스가 1981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986년에 가입해 12개 회원국이 됐다. 냉전시기 중립정책을 견지한 오스트리아와 핀란드, 스웨덴이 1995년 신규 회원국이 되면서 유럽연합은 15개 회원국으로 늘어났다.

    회원국이 확대되면서 과연 집행위원회나 각료이사회가 효과적으로 정책결정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집행위원회는 한 나라의 행정부와 비슷하다. 집행위원들이 교통이나 통신, 내부시장, 대외통상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회원국 확대로 신규 회원국들도 집행위원을 선발해 현재 27명의 집행위원이 있다. 집행위원이 너무 많아 이전부터 수를 줄이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각 회원국은 그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최소한 자국 출신의 집행위원은 보유하려 했기 때문에 실천이 쉽지 않았다.

    각료이사회도 회원국 확장에 힘입어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특히 2004년 5월1일 중·동부 유럽의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발트 3국과 키프로스, 몰타 등 10개국이 유럽연합의 신규 회원국이 됐다. 이들은 냉전시기 소련의 압제를 겪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친미(親美)성향의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라크 침공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갈등을 겪을 때 이들 신규 회원국은 영국의 태도를 지지했다.

    회원국 확대는 유럽연합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일 옛 소비에트연방에 속했던 각 공화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려 한다면 과연 그들 국가가 유럽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2005년 11월 터키와 가입협상을 시작했지만 현재 협상 자체가 정지된 상태다. 터키는 1974년 터키 남쪽 지중해의 섬인 키프로스공화국에서 친(親)그리스계 쿠데타가 일어나자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섬 북부를 침공, 터키만이 인정하는 국가인 키프로스 터키공화국을 건국했다. 섬의 남부는 그리스계가 주로 거주하는 키프로스공화국으로 2004년 유럽연합 회원국이 됐다. 터키는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협상조건으로 키프로스 북부지역 항구의 개방을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 가입협상을 거부당하고 있다.

    터키가 유럽에 속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지금껏 회원국의 의견을 여러 갈래로 가르는 원인이 됐다. 안보 측면에서 보면 세속화한 이슬람 국가이자 나토의 맹방인 터키를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경우 이슬람권과의 관계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독일 등 유럽연합 회원국에는 이슬람권에서 이민 온 주민이 많다.

    그러나 터키는 근대사에서 유럽과 수많은 전투를 벌여온 ‘유럽의 공적(公敵)’이었다. 이 때문에 터키의 가입은 빨라야 10년, 혹은 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등 여러 회원국이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회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만일 한 회원국에서라도 가입이 거부되면 터키는 회원국이 되지 못한다.

    농업 지원금 갈등

    유럽연합은 크로아티아와도 가입협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연합은 터키와 크로아티아 외의 회원국 확대에는 당분간 유보적인 자세를 취할 것임을 내비쳤다. 2006년 12월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에서 회원국 수반들은 “유럽연합 기구가 추가 회원국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당분간 유럽연합의 추가 확대는 어렵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 발칸반도의 몇몇 나라가 유럽연합의 문을 두드려왔으나 가입협상은 당분간 어렵다는 게 EU의 분위기이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추가로 늘어날 경우 효율적인 운영이 어려워진다는 것 외에 또 다른 문제점은 예산이다. 2004년 가입한 10개국 가운데 중·동부 유럽 8개국의 1인당 GDP는 기존 15개 회원국의 3분의 1 수준. 유럽연합 예산은 주로 농민 지원과 낙후된 지역개발 지원에 사용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이 EU의 신규 회원국이 될 경우 예산의 우선순위를 다시 짜야 한다. 그러나 기존 회원국인 프랑스나 아일랜드, 덴마크 등도 공동농업정책의 커다란 수혜국이다. 이들이 공동농업정책 지원액 축소에 반대할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

    올해 EU 예산은 1260억유로(약 157조원)이다. 이는 전체 회원국 GDP의 1% 정도로, 가난한 회원국의 처지에서 EU의 지원은 큰 선물이다. 1973년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아일랜드는 당시 9개 회원국 가운데 최빈국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아일랜드는 농민 및 낙후지역 개발 지원용으로 매년 국내총생산의 6%에 육박하는 예산을 지원받았다. 지금 아일랜드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유럽공동체 가입에 힘입은 바 크다.

    유럽헌법의 탄생

    EU의 확대는 제도개혁과도 관련이 깊다. 2002년 4월 중·동부 유럽과 키프로스, 몰타 등 10개국이 가입조약에 서명하고 2년 후 비준을 거쳐 유럽연합 회원국이 됐다. 이들의 가입협상 과정에서 유럽헌법조약이 논의되고 체결됐다.

    유럽연합은 아직 연방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회원국들은 조약을 체결해 문제를 해결한다. 로마조약이나 유럽연합조약 등이 그 예. 유럽헌법조약은 각 조약에 흩어져 있던 유럽연합의 권한, 예컨대 행정부 기능을 하는 집행위원회의 권한이나 유럽의회, 각료이사회의 권한을 한 곳에 모아 정리하면서 유럽연합에 새로운 권한을 부여했다. 이제까지의 유럽통합 과정은 엘리트 중심으로 시민의 실질적 참여가 제한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10개국이 한꺼번에 회원국이 되면서 이를 제도개혁과 연계시켜 헌법조약을 논의하고 채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논란 끝에 헌법조약은 2004년 6월 서명됐다. 주요 내용은 EU 대통령과 외무장관의 지위와 권한, 다수결 도입이다. 우선 EU 대통령을 보자. EU이사회(European Council)는 각 회원국 정부 수반이 모여 주요 정책의 지침과 EU 방향을 결정하는 기구로, 보통 1년에 2번 회담이 열린다. 이전까지 EU 정상회담 의장과 각료이사회 의장은 회원국이 6개월간 돌아가면서 맡았다. 이러다보니 업무의 연속성이나 의장의 빈번한 교체로 국제무대에서 EU의 대표가 불분명해졌다.

    또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국가가 의장국을 맡을 때와 베네룩스 3국 등 소국이 의장직을 수행할 때 의장국의 업무추진 능력에서 비교가 되곤 했다. 이런 단점을 없애기 위해 헌법조약은 EU이사회 상임의장을 임명할 것을 규정했다. 정식 명칭은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이지만 통칭 ‘EU 대통령’이라 한다. 이사회에서 각 회원국 수반이 각 나라의 인구수에 비례해 투표를 하는 가중(加重)다수결로 상임의장을 선출하고 임기는 2년 반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EU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주재하고 공동외교안보정책에 대해 EU를 대변한다.

    EU 외무장관은 EU의 개발원조 업무와 공동외교안보정책을 담당하게 된다. 집행위원회 대외담당위원과 공동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로 나뉘었던 업무를 한 사람이 맡게 되어 업무의 효율성도 높이고 외교 분야에서 EU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게 됐다. EU 외무장관은 각 회원국 외무장관들이 모이는 각료이사회를 주재하고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집행한다.

    이제까지 EU의 대외정책은 경제와 외교로 나뉘어 집행됐다. 개발원조는 EU집행위원회 대외담당 집행위원이, 그 밖의 주요 국제 문제는 공동외교안보담당 고위대표(통칭 ‘미스터 유럽’, 현재는 하비에르 솔라나)가 맡아왔다. 경제와 통상은 집행위원회가 회원국으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아 행사해왔다.

    이러다보니 개발원조와 공동외교안보정책의 일관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즉 공동외교안보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개발도상국의 인권 개선을 전제로 개발원조를 약속하는 데 반해 개발원조를 담당하는 집행위원회 대외담당위원은 인도적 차원에서 무조건적 지원을 강조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EU는 당초 EU이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인구 60%, 회원국 수의 50% 이상이 찬성할 때 가결한다는 가중다수결 제도를 선택했다. 그러나 몇몇 강대국이 담합해 주요 의제를 결정할 수 있다며 폴란드와 스페인 등 중간 규모 국가와 약소국들이 반발하자 가중다수결에 인구수를 포함해 결정하는 이중다수결 체계를 선택했다. 따라서 중요 정책과 규정의 채택은 4억5000만(25개 회원국 기준) 인구의 65%와 25개 회원국 가운데 15개국(55%) 이상이 지지해야 한다. 또 전체 인구의 35%, 4개국 이상의 동의로 의제 채택을 반대할 수 있다.

    헌법조약의 암울한 미래

    그러나 새 유럽헌법조약은 비준될 전망이 불투명하다. 2005년 5월말 프랑스, 6월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이 헌법조약은 부결됐다. 한 회원국에서라도 조약을 거부하면 효력이 발생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당시 유럽연합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스에선 오는 5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그러나 우파의 사르코지 현 내무장관 혹은 사회당 후보인 루아얄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든 헌법조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묘안이 없다. 헌법조약을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하려면 문제가 된 조항들을 수정해야 하는데, 다른 회원국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에 가입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EU 헌법조약을 비준한 회원국은 25개국 중 18개국. 아직 비준에 들어가지 않은 국가들도 문제다. 포퓰리즘에 빠진 폴란드 정부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유럽연합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아직 헌법조약 회부에 대한 구체적 일정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이 헌법조약을 거부한 이후 헌법조약 국민투표 회부 일정을 연기했다. 올여름 물러나는 토니 블레어 총리와 달리,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은 유럽통합에 소극적이다.

    순회의장국인 독일은 오는 6월말까지 헌법조약의 구체적 추진 일정을 내놓을 계획이다. 여기에서 현재의 헌법조약을 폐기하든지 아니면 일부 수정안을 내든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준을 마친 회원국들은 “헌법조약 논의와 비준도 겨우 이뤄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문이 약화됐는데 이를 수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수정론에 반대하고 있다.

    EU는 2009년에 유럽의회선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전에 헌법조약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일부 수정으로 결론이 난다면 회원국들은 어느 부분을 수정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논의해야 한다. 비록 긴 협상과정에서 헌법조약이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겠지만, 현재의 조약 초안은 유럽통합 과정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문서라는 점에서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미국과 EU의 오묘한 역학관계

    유럽통합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정치적, 역사적 이유 때문에 스스로 유럽국가(a European power)가 됐다. 미국으로선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전쟁으로 얼룩진 서유럽의 단결이 절실했다. 미국은 서유럽의 단결을 적극 지지했고 유럽에 미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서유럽 국가 간의 분쟁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제 EU는 미국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규모도 큰 시장이다. 이에 따라 유럽은 1970년대부터 미국과 자주 무역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에는 구유럽과 신유럽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EU는 현재 미국과 제도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년에 2회 유럽이사회와 각료이사회의 순회의장국 의장과 EU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정기 회담을 갖는다. 분야별로도 교류가 활발하다. 미국도 국제질서 유지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는 유럽연합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EU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최대 원조국이다.

    그러나 미국을 보는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은 대립적이다. 프랑스는 미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연합을 건설하려 한다. 독일과 긴밀하게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은 프랑스 혼자 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유럽통합에 있어 미국을 동맹국으로 간주한다. 영국은 더 이상 자국이 유럽인지 혹은 미국인지 하는 양자택일식의 자문(自問)을 하지 않는다. 국익에 맞게, 또 상황에 따라 유럽 혹은 미국을 선택하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을 뿐이다. 영국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중시하며 이를 적극 활용해 국제무대에서 ‘체중 이상의 펀치’를 날릴 수 있었다. 그래서 총리가 보수당에서 나오든 노동당에서 나오든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외교정책의 틀로 삼아왔다.

    이라크 침공으로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의 관계는 다소 소원해졌다. 미국은 유럽통합 과정에서 독일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독일은 EU 최대의 경제대국이다. 러시아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2차대전의 업보 때문에 중·동부유럽의 최대 지원국을 자임하며 여러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더욱이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친미주의 성향이 강하다.

    미국은 이라크 침공 이후 소원해진 독일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독일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중시하고 있다. 2005년 11월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취임 후 첫 방문지로 미국을 선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든, 전략적 합종연횡이든 유럽의 통합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각 나라의 손익계산에 따라 앞으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EU는 동북아 공동체의 실험실

    EU는 헌법조약의 추인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발달한 지역통합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이나 동남아국가연합(ASEAN)도 유럽과 역사적, 정치적 상황은 다르지만 자유무역지대나 관세동맹을 통해 지역통합을 이뤄가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통합이 동북아 협력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물론 유럽과 동북아 지역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이 달라 양쪽을 직접 비교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유럽통합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점은 지도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어떤 나라인가와 그 공동체에 대한 미국의 지지도이다.

    이미 살펴보았듯,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통합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1,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던 독일은 유럽통합으로 국제사회로 복귀했고 통합에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신뢰할 만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반면 프랑스는 2차대전 이후 식민지를 잃고 국제사회에서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유럽통합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패권적 군사동맹을 통해 서유럽의 안보를 보장해주고 그들의 단결과 통합을 지지해왔다.

    이런 점을 동북아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 현실적으로 동북아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그러나 양국의 경제 관계는 매우 원만하지만 정치적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양국은 동북아에서 서로를 가장 큰 적으로 간주해 여러 국제기구에서 적대적 경쟁을 하고 있다.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있으나 구조적 요인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다.

    미국 또한 동북아에서 다자주의가 아닌 양자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택하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중국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관여와 봉쇄의 두 가지 정책을 병행한다. 미국이 동북아 지역에 대해 다자주의 외교를 지지하는 쪽으로 정책 선호도가 바뀌지 않는 한, 혹은 동북아 주요 국가들이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않는 한 동북아의 협력은 쉽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 통합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국가선호도가 바뀌거나 혹은 동북아 협력을 이끌 기구가 발족돼야 한다.

    유럽통합 50년의 현주소
    안병억

    1965년 충남 당진 출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정치학과 박사(유럽통합 전공)

    연합뉴스, YTN 기자

    現 파이낸셜뉴스 국제부 차장


    그렇다면 동북아 협력을 이끌 구심점으로 한국이라는 ‘대안’은 어떨까. 2003년 출범한 ‘참여정부’는 동북아 협력에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표방했다. 그 일환으로 중국, 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의 타당성을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동북아 협력강화라는 외교정책의 방향은 잘 잡았어도 이후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동북아 협력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엔 북핵 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동북아 공동체 구성의 ‘살아 있는 실험실’이 될 유럽통합은 지금도 추진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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