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인식하나

  • 김학준│동아일보 고문 hak@donga.com│

    입력2010-09-01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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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인이 칭송하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 지리적 통합 이뤘으나 심리적 통합 미흡
    • 동독 출신 노년층 통독 불만 표시 비율 상대적으로 높아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인식하나

    독일 통일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오는 10월 3일에 독일인들은 통독 20주년을 맞이한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 때 미국의 주일대사로 봉직했던 에드윈 라이샤워 전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해 많은 세계적인 석학들과 정치가들은 독일의 통일은 주변 열강의 반대 때문에, 특히 소련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언했었다. 그러나 그 숱한 비관론을 깨뜨리고 독일은 1990년 10월 3일에 통일을 성취했다. 패전과 분단으로부터 45년 만의 쾌거였다. 서독의 입장에서 볼 때, 건국 41년 만에 동독을 흡수하면서 통일을 실현한 것이다.

    독일의 통일이 현실로 나타난 뒤 여러 관찰들이 때때로 보도됐다. 그 관찰들 가운데 하나는 일정한 규모의 독일인들이 통일에 대해 실망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환호하던 독일인들 가운데 통일의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관찰이 보도되곤 했다. 그러한 경향은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고 어떤 관찰자는 덧붙였다. 과연 이 관찰은 정확한 것인가?

    잘사는 서독 낙후한 동독

    필자는 지난 6월 30일부터 7월 31일까지 1개월에 걸쳐 독일 베를린의 자유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책들을 읽었다. 필자는 독일 알렉산더·폰·훔볼트재단의 후원으로 1988년 5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독일 뮌헨대학교 동유럽연구소에서 ‘남북한관계와 동서독관계의 비교’라는 주제를 연구했었고, 1988년 12월 1일부터 1989년 2월 28일까지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국제법연구소에서 ‘오스트리아 중립화 모델과 한반도’라는 주제를 연구했었다. 그 인연의 연장선 위에서, 훔볼트재단은 통독 20주년의 시점에서 필자 내외를 독일로 다시 초청했다. 필자가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심을 보이자, 훔볼트재단은 필자를 통일독일의 수도에 위치한 자유대학교의 한국학연구소로 연결해주었다.

    이 연구소는 2년 전에 창설됐다. 자유대학교가 한국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해 역사문화과학대학 산하 동아시아학부에 한국학과와 더불어 이 연구소를 개설한 것이다. 학과장 겸 소장에는 한국국적의 이은정 교수가 초빙됐다. 이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진덕규 교수의 지도 아래 학사와 석사를 받은 뒤 독일로 유학해 괴팅겐대학교에서 정치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할레대학교에서 정치학 교수자격취득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교수의 지휘 아래, 10명 안팎의 석사들 및 박사들이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고 있으며 몇몇 학사들이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조교로 봉직하고 있다.



    필자는 이 연구소를 거점으로 삼아 주제에 접근했다. 우선 독일인 학자들을 약 20명 만났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지난날의 동독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고 어떤 다른 사람들은 지난날의 서독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어떤 학자들은 필자의 연구주제에 대해 이미 깊은 연구를 마치기도 했다. 따라서 그 학자들이 이미 발표한 논문들은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는 베르너 훼니 박사다. 그는 자유대학교에서 중국의 대외정책을 전공해 정치학박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 이른바 양안관계(兩岸關係), 즉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분단 중국’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분단 한반도’에 대해서도 연구를 계속해, 남북한관계의 장래에 대해 필자에게 좋은 분석들을 제시했다.

    면담과 대화도 유익했지만, 여행 역시 유익했다. 우선 베를린의 여러 곳들을 여행했다. 베를린은 통독 이전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던 곳이어서, 통독에 대한 독일인들의 인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했다.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인식하나

    베를린장벽은 붕괴했으나 심리적 통합은 아직 미흡하다.

    필자 내외는 특히 동베를린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필자가 이 지역을 처음 여행한 때는 1988년 10월이었다. 이때는 통독 이전이어서, 서독에 속한 뮌헨에서 자동차를 타고 동독으로 들어간 뒤 동독 국토 안에 위치한 서베를린을 먼저 방문하고 거기서 동베를린으로 들어갔다. 이 여행은 필자로 하여금 동서독 사이의 발전격차를 쉽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간단히 말해, ‘잘사는 서독’과 ‘덜 잘사는 동독’을 확인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격차는 통독 2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여전했다. 통일 이후 통독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통해 지난날의 동독이 생활여건에서 훨씬 개선되도록 노력을 했고, 그 결과 도로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베를린 한 곳만 놓고 보아도, 옛 동베를린지역이 옛 서베를린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기가 덜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 거리

    옛 동베를린의 거리를 걸으면서 ‘스탈린 거리’가 ‘프랑크푸르트 거리’로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스탈린이라는 이름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1953년 3월에 소련의 철권독재자이면서 동독을 포함한 소련권의 최고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죽은 이후 소련권에서 최초로 반소(反蘇)운동을 전개한 곳이 바로 동베를린이었다. 그 운동은 곧바로 탄압됐으나,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소련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았다. 그런데 동독의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동독이 서독으로 합류함과 동시에 통일이 실현된 데 이어 소련이 해체되자, 베를린 시민들은 ‘스탈린 거리’라는 이름을 없앤 것이다.

    독일인들은 또 동독의 초대 대통령 빌헬름 피크 그리고 동독의 집권공산당이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초대 서기장 및 2대 대통령 발터 울브리히트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들의 이름이 들어갔던 거리 또는 광장은 다른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 일련의 일들은 소련이 해체된 뒤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환원시킨 것을 연상시킨다. 레닌그라드 시민들만이 아니라 러시아 국민들은 유서 깊은 제정러시아의 300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사랑한다. 그들은 소련의 건국과 더불어 소련건국의 아버지 레닌의 이름을 따서 개명됐던 이 도시의 이름을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분단 이전의 시기에 사회주의운동 또는 공산주의운동을 이끌었던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 ‘카를 리프크네히트 거리’는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독일은 사회주의의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다.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제의와 노력에 자본가들과 역대 부르주아민주주의정부들의 화답이 결합돼, 독일은 사회복지에서 또는 사회안전망구축에서 선진적인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한 만큼, 독일인들은 19세기 이후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독일의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을 결코 잊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주의의 시조로 평가되는 카를 마르크스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독일의 한 작은 도시 켐니츠(Chemnitz)는 동독에 편입되면서 ‘카를 마르크스 시’로 개명됐었다. 그러나 공산정권의 붕괴 이후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을 버리고 옛 이름을 되찾았다. 이 경우를 제외하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동베를린의 ‘카를 마르크스 거리’는 존속하고 있으며, 동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에 세워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거대한 동상 역시 존속하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도 마르크스는 때때로 인용된다. 예컨대, 경제위기가 발생하거나 예견될 때 어떤 논평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인용하곤 한다. 대학에서도 마르크스는 강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대학의 경제학 강의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은 주류이론으로 다뤄지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이론은 경제분석의 한 작은 부분으로 다뤄질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잠시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일 앞으로 대한민국의 주도 아래 남북이 통일됐다고 할 때, 북한의 여러 지명(地名)들에 들어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름들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아버지의 이름을 딴 김형직군이나 김정일 생모의 이름을 딴 김정숙군과 같이 김일성 일가의 이름들이 들어간 군(郡)의이름들을 원래대로 되돌리자고 하지 않을까? 김일성대학 그리고 김일성의 동지 김책의 이름을 딴 김책공과대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이름들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필자 내외는 이은정 교수와 함께 7월 4일에 동베를린의 외곽에 위치한 포츠담을 방문했다. 이곳은 1945년 여름에 미국과 영국 및 소련의 정상들이 만나 이른바 포츠담 선언을 채택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 포츠담 선언은 1943년 11월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함으로써 ‘노예상태의 코리안들에게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을 부여할 것’임을 다시 다짐했다. 필자는 이 포츠담 선언이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카이로 선언을 훨씬 더 구체화하는 합의를 포함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이곳을 떠났다.

    필자 내외는 7월 11일에는 역시 동베를린의 외곽에 위치한 제테닉(Zehdenick)을 방문했다. 조선왕조의 고종 때 오늘날의 직제로 말한다면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봉직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생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아주 작은 도시에서 어떤 독일인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그의 생가가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조선왕조 말기의 조선역사에 일정하게 자취를 남긴 그가 고향에서는 완전히 잊힌 것이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취지의 논문을 써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옹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노력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러한 역사적 독일인의 생가를 찾아내 표석이라도 세워 기념하면서 한국사회와 독일사회 모두가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그 뿌리로부터 살펴보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이은정 교수의 소망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어디 묄렌도르프뿐인가? 고종이 광무황제로 즉위한 뒤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는 고종의 시의(侍醫)로 봉직했다. 그는 조선에서 방역체계가 확립되도록 노력했으며 일반백성들의 치료에도 참여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궁정악대장으로 초빙돼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서양음악의 교육과 전파에 힘을 썼다. 이들의 생가를 찾아내 표석을 세워 독일인들과 한국인들이 이들의 업적을 함께 기린다면 두 나라 사이의 관계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 내외는 7월 21일에 옛 동독의 유서 깊은 종교도시 라이프치히를 여행했다. 우선 성(聖)니콜라이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1989년에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여러 차례 열렸던 곳이다. 공산정권이 무력으로써 또는 강압력으로써 그 집회들을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북돋웠다.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듯, 이 교회를 중심으로 열린 일련의 촛불집회는 동독에서 공산정권의 붕괴를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우리는 곧이어 이 교회에 인접한 토마스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서양 근대음악의 고전으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악장으로 봉직했던 교회다. 성니콜라이교회와 토마스교회를 바라보고 잠시 예배를 올리면서, 필자는 동독의 공산치하에서 교회가 수행한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동독의 교회, 북한의 교회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인식하나

    관광상품으로 전시된 베를린장벽.

    여러 독일인들이 필자에게 설명했듯, 동독의 교회들은 교회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로 박해를 가했던 공산정권에 맞서 전통적인 기독교신앙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교회들은 동독의 공산정권에 굴복하지 않은 최후의 중요한 섬[島]들이었다. 달리 표현해, 동독사회 전체를 철저히 공산통치에 종속시키려던 동독정권의 권력행사는 교회 앞에서 일정한 한계에 직면했던 것이다.

    서독의 교회들은 그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동독에 그러한 교회들이 남아 있었기에 서독의 교회들은 기독교의 정신인 화해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동독의 교회들을 상대로 여러 구상들을 제의했으며, 동독의 교회들은 그 구상들이 동독정권에 의해 수용되도록 비록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나마 노력했다. 동서독 교회들의 시도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통독을 향한 독일 내부의 기반이 형성됐던 것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일찍부터 남북의 화해와 상생을 위해 그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사실과 관련해, 이 연구소를 방문한 전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삼열 박사가 7월 6일에 특강을 했다. 괴팅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아 독일어에 능통하고 독일교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도 밝으며 그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한반도의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이 교수는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한국의 교회들이 전개한 선지자적 발언들과 실천운동들을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북한의 교회들이 과연 지난날 동독의 교회들이 수행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는가 조용히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날 동독의 여러 상황들이 북한의 그것들과 달랐듯, 동독의 교회들과 북한의 교회들 사이에도 차이가 크다. 쉽게 말해, 동독의 공산정권은 기독교 교회들을 전면적이면서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독재정권은 기독교 교회들에 자율적 공간을 조금만큼이라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기로 한다. 독일인들은 통독 2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점에서 통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필자는 한마디로 단순화시켜 대답할 수 없다.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하기로 하겠다. 다만 현재의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대답하기로 하겠다.

    첫째, 독일인들은 동독인이었건 서독인이었건 가리지 않고 대체로 통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통일에 만족해한다. 특히 서독인들의 경우,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념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서독 그 자체를 하나의 ‘완결된 국가’로 키우고자 노력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서독을 민주화된 복지국가로 성장시키고 서방국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평화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 정책이 통독의 기초를 닦은 것이었다고 서독인들은 칭송한다.

    아데나워와 관련해 칭송되는 점은 그가 동독의 공산국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독의 이른바 독일민주공화국을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이 국가가 붕괴한 뒤 서독의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흡수될 때 독일의 통일은 성취된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성취됐다.

    아데나워와는 대조적으로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공산국가들에 대해 과감히 접근하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전개했던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전에 대해서도 독일인들은 높이 평가한다. 그가 통독의 꿈을 안고 동방정책을 전개함으로써 동서독관계에서 전환의 기초를 놓았다고 칭송한다. 그들은 특히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전개하면서 원칙을 중시했음을 강조한다. 동독과 비밀거래를 한다든지 또는 의회를 경시한 채 총리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집행한다든지 따위의 불법적 및 탈법적 방법을 쓰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동방정책을 집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법을 존중하고 의회의 동의를 확보했음을 그들은 강조했다.

    여기서 잠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아데나워와 브란트의 소박한 무덤이다. 아데나워는 지난날 서독의 수도인 본에 위치한 자신의 집 부근의 천주교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묘지의 넓이와 크기는 다른 시민들의 그것들과 똑같다. 브란트는 베를린의 시민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묘지의 넓이와 크기는 역시 다른 시민들의 그것들과 똑같다. 그 무덤들 어디에도 거창한 기념비는 세워지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집권공산당의 지도자들이 보인 행태와 크게 대조된다. 옛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거대하면서 화려한 국립묘지를 건설하고 심지어 그 지도자들을 미라로 처리해, 국민들로 하여금 성인을 추모하는 것과 같은 예배를 올리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마지막으로 독일인들은 헬무트 콜 총리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 콜 총리의 날카로운 정세판단과 과감한 대외정책수행이 결국 급변하던 국내외정세 속에서 통독의 꿈을 실현시켰다는 것이었다. 특히 콜이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그 일환으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본국으로의 귀환 및 본국에서의 정착에 소요되는 경비를 모두 독일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 하여금 독일통일을 지지하게 만들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최근에 팔순을 넘긴 콜은 국가원로로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둘째, 독일인들은 독일의 지방분권형 정치체제가 통독의 충격을 완화시켜주었다고 강조한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통일의 역사가 짧다. 오늘날 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강역에는 여러 독립적 왕국과 공국 등이 존재했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상당한 자율적 통치권을 보유하고 행사했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독일은 지방분권주의를 발전시켜왔던 것인데, 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돼도 자신들의 자율성은 크게 제약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통독에 대해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독일 학자들은 필자에게 설명했다.

    셋째,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통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비율이 높다. 오늘날의 현실이 지난날의 그것보다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로 40대 이하의 연령층에서는 통일에 대한 만족의 표시가 상당히 높다.

    숙제는 심리적 통합

    독일인들은 통독을 어떻게 인식하나
    金 學 俊

    1943년 중국 선양(瀋陽)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켄트주립대 대학원 석사(정치학)

    미국 피츠버그대 대학원 박사(정치학)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제12대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단국대 이사장

    인천대 총장

    세계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동아일보 회장

    現 동아일보 고문


    넷째, ‘지리적’ 통합은 이뤄졌으나 ‘심리적’ 통합은 미흡한 것 같다. 지난날 동독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은 통일독일에서 ‘2등 국민’이 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날 서독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통일 이후 옛 동독의 재건을 위해 통일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많이 베푼 까닭에 자신들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났고 독일 경제가 부담을 안게 됐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심리적 통합’을 어떻게 진전시키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통일독일에서 나타난 이러한 심리적 간격은 우리로 하여금 한반도통일의 미래상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동서독은 서로 사이에 전쟁을 겪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북한은 37개월에 걸친 전쟁을 겪었으며 그 이후에도 군사적 대결을 유지했다. 그 결과 남북 사이의 불신은 참으로 깊다. 그럴진대, 남북통일은 남북 사이의 심리적 조정기간을 넉넉히 두면서 급하지 않은 속도로 추진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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