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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독일 통일 원동력은 포용 정책 아닌 힘의 우위” “서독 경제원조가 동독 민주화 혁명 지연시켰다”

  •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donyoum@naver.com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이 분석한 독일 통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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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1990년 8월부터 3년간 주독일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면서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봤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으로 일했으며 독일 통일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과 평론을 써왔다.
  • 최근엔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라는 제목의 책도 펴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전파된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시각에서 독일 통일을 들여다본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1990년 10월 독일의 통일을 관심 있게 지켜본 이들 중 하나가 바로 한국 국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웠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독일 통일의 교훈이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적극적인 교류·협력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조급한 통일, 흡수통일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경제를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통일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노태우 정부는 독일 통일 다음해인 1991년 12월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서둘러 체결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했다. 생생히 지켜본 독일 통일의 후유증은 한국 사회에서 통일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른바 ‘통일 회의론’이다. 독일 통일의 어두운 측면만이 부각되면서 독일 방식의 통일은 경계하거나 기피해야 할 모델이 됐고, 이러한 인식은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필자는 독일 통일에 관한 한국 사회의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통일의 배경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독 정부가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동독과 적극적인 교류·협력 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다. 독일 통일 이후 4년간 국내 일간지에 게재된 사설 40건을 분석해보면 47%(19건)가 독일의 통일을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화해협력의 산물이라고 평가했고, 32%(13건)가 서독의 정치·경제·도덕적 우월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 이전 서독에서는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CDU)과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사민당·SPD)이 교차적으로 집권하면서 서로 다른 통일정책 혹은 내독(內獨)정책을 추진했다. 기민당의 정책은 서독을 민주적이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친서방 정책으로 ‘힘의 우위’를 확고히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겠다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민당 정부는 소련의 중립화 요구를 거부하고 친미·친서방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주제도의 정착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 1955년에는 통일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1979년 소련이 동유럽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했을 때는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퍼싱-2 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동의하기도 했다.

힘의 우위 > 햇볕정책

특히 ‘여우’라는 별명을 가졌던 기민당 출신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동서 진영 간의 대결이 종결되고 유럽에 협력체제가 정착되거나 소련 경제가 어려워져 소련이 동유럽 지배를 포기하는 경우, 중·소 분쟁이 격화되어 소련이 아시아 지역에 역량을 집중하는 경우에만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여우’가 얼마나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사민당은 소련이나 동독과 화해·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공산정권이 변화해 통일이 가능해지거나 ‘사실상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다. 이에 따라 사민당은 서독의 중립화 또는 동서양 진영을 끊임없이 오가는 ‘시계추 외교’를 모색했고, 서독의 NATO 가입에 격렬히 반대했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이 동서독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 민족의 이질화를 방지하고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교류·협력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화해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동독 주민들의 시위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이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더욱이 정확히 말해 당시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목표를 둔 ‘평화적 분단 관리’ 정책이었다.

일각에서는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주민 간에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져 1989년 동독 혁명과 통일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는 동독 혁명이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 혁명에 성공한 후에야 가장 늦게 일어난 배경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독의 지원이 동독의 민주화 혁명을 지연시켰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동독 혁명 당시 서독 정부가 사민당의 주장대로 동독과의 화해 분위기 손상을 우려해 동독 탈출민의 수용을 제한하고 동독에 경제지원을 했다면, 통일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경제적 지원의 성격이다. 당시 서독 정부는 동독에 대한 각종 지원이 공산정권 강화에 이용될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했다. 동독이 먼저 요청할 때 반드시 대가를 받고, 서독의 지원을 동독 주민들이 알게 하는 방법으로 지원한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특히 무상원조나 현금지원은 엄격히 제한해, 동서독 기본합의서 체결 11년 후인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19억5000만마르크(약 1조2000억원)의 은행차관을 주선해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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