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미국의 빈 라덴 20년 추적기

아프간 용병과 순항미사일, 회유와 협박 총동원된 희대의 ‘인간 사냥’

  • 홍순명│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전문위원 sergeyevich@gmail.com

    입력2011-05-18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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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싱턴은 왜 타국에서의 군사작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빈 라덴을 사살했을까. 파키스탄에 대한 협조 요청이나 재판 회부 같은 다른 방식은 과연 불가능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간 국제 테러활동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경험한 일련의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9·11 테러를 계기로 급선회한 미국의 대(對)테러 정책 변화가 그 핵심에 놓여 있다. 전직 미 고위관료들의 회고록을 통해 속속들이 들여다본 미국과 빈 라덴의 20년 전쟁사(史).
    미국의 빈 라덴 20년 추적기

    5월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참모들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오바마 대통령, 마셜 브래드 웹 합동특수전사령부 준장, 데니스 맥도너 국가안보부보좌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1993년 4월, 리처드 클라크 당시 백악관 대(對)테러담당 특별보좌관은 외신 요약을 훑어보다 쿠웨이트를 방문 중이던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를 저지했다는 기사를 발견한다. 중앙정보국(CIA) 등 어떤 기관에서도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던 클라크 보좌관은 의구심을 품고 현지 대사관을 통해 사실 여부를 탐문한다. 결과는 사실. 쿠웨이트 당국이 적발한 음모를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다.

    걸프전 직후였던 당시 이라크 정보부는 쿠웨이트 국왕과 부시 대통령의 행렬 주변에서 도요타 승용차에 장착된 폭탄을 원격 폭발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문제의 차량이 사소한 사고를 냈고, 쿠웨이트 경찰에게 폭탄이 발견된 것이었다. 미국은 쿠웨이트 정부를 한참이나 다그친 뒤에야 수사내역을 브리핑 받고 용의자 및 증거물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걸프전을 통해 이라크의 점령에서 쿠웨이트를 구해냈건만 쿠웨이트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백악관은 경악했다.

    전직 CIA 요원인 로버트 베어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테러범의 체포와 관련해 미국에 비협조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책 ‘악마와의 동침(Sleeping with the devil)’에는 루이스 프리 당시 FBI 국장이 코바르 소재 미군 막사 폭탄공격에 대해 조사를 시도했던 당시의 모습이 기술돼 있다. 프리 국장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내무장관은 홍해 연안의 자기 요트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대신 내무보안기관에 소속된 하급관리만을 보냈다. 1997년에는 수배 중이던 헤즈볼라 지휘관 이마드 무그니야가 사우디에 입국한다는 첩보가 입수됐지만, 미국의 체포작전이 시작되자 사우디 정부가 아예 그의 비행기를 다른 곳으로 회항시킨 일도 있었다.

    카타르 또한 미국을 좌절시켰다. 베어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카타르는 지명 수배 중인 알카에다 테러범 10여 명을 초청했다. 카타르 정부가 알카에다에서 가장 위험한 행동대장 칼리드 셰이크 무하마드를 숨겨주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한 FBI는 카타르에 무하마드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무하마드는 카타르 정부의 고용인 신분이었지만, 카타르는 그를 찾을 수 없다고 둘러댄 후 해외로 빼돌렸다. 도하를 찾았던 FBI 요원들은 허탕만 쳤고 시간을 번 무하마드는 훗날 9·11테러를 총지휘하게 된다. 클라크 전 보좌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FBI 체포팀은 카타르 국왕의 은밀한 체포 허가를 받고 작전에 임했지만 정보가 왕궁 어디선가 새나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다. 1990년대 중반 빈 라덴은 사우디에서 추방돼 수단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의 체류를 둘러싸고 미국의 외교적 압력이 가해지자 수단은 그를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신병을 인도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1996년 사우디는 빈 라덴을 넘겨주겠다는 수단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빈 라덴은 당시 사우디에서 너무 인기가 높았으므로 그를 체포하면 혁명을 자극할 위험이 있어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베어의 관측이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9·11테러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사우디에서는 이 사건 연루자들에 대해 단 한 건의 기소도 이뤄지지 않았고 쓸 만한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중동 국가들의 이중 플레이

    최근 파키스탄 영토 깊숙한 곳에서 벌어진 미국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과 관련해 다양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타국에서의 특수부대 습격작전은 주권침해가 아닌가, 생포해 재판을 받게 하는 대신 사살한 것이 과연 정당한가 등에 대한 논쟁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논객인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이라크 특공대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집에 침투해 그를 암살하고 시신을 대서양에 버렸다면 어땠을까 자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라크 정보부가 실제로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미국이 빈 라덴을 사살하는 과정에서 이렇듯 논란의 소지가 큰 방식을 택한 이유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꽤 먼 길을 가야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제 테러활동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워싱턴이 겪었던 일련의 경험이 대표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국제법과 국내법을 준수해가며 완벽하게 깔끔한 방식으로 테러 지도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미국이 의구심을 품게 된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 아닌 빈 라덴에 대한 추적 시도와 실패, 그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그의 9·11테러였다.

    미국의 빈 라덴 20년 추적기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해외에 숨어 있는 테러범을 체포하기 위해 미국이 제일 먼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해당 국가의 사법기관에 협조를 요청해 체포하고 신병을 인도받아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본 사례들은 왜 미국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없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중동국가 대부분은 미국의 대테러 작전에 협조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곤란한 부탁에서 빠져나갈 궁리에 골몰했다. 심지어 해당 국가 정부기관들은 테러조직에 대해 온정적이거나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편집장을 지낸 스티브 콜의 퓰리처상 수상작 ‘유령 전쟁(Ghost Wars)’에 따르면 여기에는 국내법적인 한계도 작용했다. 앞서 살펴본 1996년 수단 사건에서, 당초 미국은 수단으로부터 빈 라덴의 신병을 직접 인수해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다. 백악관이 법무부에 투옥을 위한 법적 근거를 문의했지만,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현재 확보된 증거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연방검사들은 비밀리에 빈 라덴의 테러리즘 후원 혐의에 대한 대배심 조사를 고려하고 있었으나 미국 국내법은 검사가 조사 중인 내용을 다른 정부기관에 알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백악관은 관련 내용에 접근할 수 없었고, 미국 관료들은 ‘법률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의 통상적인 노력’으로는 빈 라덴 투옥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를 다른 중동 국가가 대신해주기를 기대하고 사우디와 접촉했던 것. 이 시기 빈 라덴은 사우디에서의 반정부 선동으로 추방당한 신세였으므로 사우디야말로 그를 투옥할 명분이 가장 높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우디조차 몸을 사렸다.

    이후 미국은 비밀리에 이집트와 요르단에도 빈 라덴을 체포해 구금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이들 역시 거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수단이 빈 라덴의 신병을 인도하겠다고 나선 저의조차 의심스러웠다. 다른 중동 국가들이 그를 구금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수단 정부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전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결국 빈 라덴은 수단 정부가 내준 전세기를 타고 세 명의 부인을 포함한 일가족, 가재도구, 재산, 추종자들을 태워 아프가니스탄으로 안전하게 이주하는 데 성공한다. 짐이 많았던 나머지 전세기는 두 차례나 왕복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8년, 빈 라덴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 위치한 미국대사관을 동시 폭파해 ‘대미(對美) 성전’의 포문을 열었고, 2000년에는 예멘에서 미 해군 구축함 콜 호에 자살폭탄보트 공격을, 2001년에는 9·11테러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1996년에 미국이 협조를 요청했던 중동 국가 가운데 한 나라라도 그를 투옥하고 관련자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면 오늘날의 알카에다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빈 라덴을 직접 사살한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공개비판을 받고 있지만, 1996년의 미국은 사법질서를 준수하려다가 빈 라덴을 놓친 셈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당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

    1998년 대사관 동시폭파 사건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정부의 주요 표적으로 떠올랐다. 이때의 워싱턴은 더 이상 다른 중동국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를 추적하기 위해 상상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탐사보도기자 밥 우드워드는 저서 ‘부시는 전쟁 중(Bush at War)’을 통해 당시의 주요 시도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40명 정도의 미군 특수부대를 헬리콥터에 실어 1500㎞를 날아간 뒤 야간기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행정부는 1980년 카터 대통령 시절 처참한 실패로 끝났던 주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이나 1993년 소말리아에서의 블랙호크 헬기 격추 사건에 대한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 역시 이렇듯 까다로운 작전에 난색을 표하기는 마찬가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백악관은 특수부대 1개 소대와 순항미사일을 갖춘 해군 함정을 상시 대기시켜놓고 있었지만, 이들을 활용하려면 최소한 6~10시간 전에는 빈 라덴의 다음 소재지를 파악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당시 CIA가 기대를 걸고 있던 카드는 ‘GE/SENIORS’라는 암호명을 가진 아프간 용병 30여 명이었다. 1인당 월 1만달러의 엄청난 보수를 받고 빈 라덴 추적 작업에 임했던 이들은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작전 가능한 정보’, 다시 말해 특수부대가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시간 동안 그가 한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SENIORS 팀의 리더는 CIA 측에 빈 라덴 일행을 사살하고 바로 현장에서 이탈하는 매복작전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CIA는 이를 승인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백악관과 법무부가 CIA에 내린 암살금지령 때문이었다. 허락된 것은 그를 생포해 사법당국에 넘기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법률준수에 대한 미국 특유의 민감함에 정치인·관료들의 안전제일주의가 결합하면서 9·11 이전에 기획됐던 빈 라덴 체포 혹은 암살 작전은 여러 차례 무산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국민 대부분은 빈 라덴이 누군지 알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기회 상실은 대부분 별 탈 없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9·11 테러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후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 유권자들은 왜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거나 테러 공격을 막지 못했는지 답을 원했고, 이제라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 법률적으로 무난한 수단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던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사법적으로 허용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빈 라덴을 잡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다는 게 9·11 이전의 미국이었다면, 이후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알카에다를 분쇄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게 미국의 대테러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얼마간의 문제점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1 직후 조지 테닛 당시 CIA 국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알카에다의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본부는 아프간에 있지만 활동영역은 세계 60개국에 걸쳐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한 번에 하나씩 그들을 솎아내야 한다. 다른 나라들이 선택하도록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비협조적인 중동국가들을 움직이려면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국무부는 곧바로 ‘우리 편에 설 것인지 아닌지를 택하라’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파키스탄과 탈레반에 전달하기 위해 나섰다.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워싱턴을 방문한 파키스탄 정보부장에게 “이것은 흑과 백의 선택이며 회색은 없다”고 윽박질렀다. 미국과 함께할 것이냐, 아니면 폭격을 받고 석기시대로 돌아갈 것이냐는 협박이었다. 결의를 의심하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빈 라덴을 보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켜버렸다. CIA 국장은 사우디를 찾아가 섭정 압둘라 왕세제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그들이 당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고 위협했다.

    아프간의 매 사냥터

    이후 미국이 기획한 빈 라덴 체포작전의 형태 역시 극적으로 변화했다. 한마디로 법률적 정당성 따위는 크게 개의치 않는 과감한 방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능한 한 합법적으로 수행했다는 포장을 위한 노력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빈 라덴이 사살된 직후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작전을 둘러싼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당일까지도 상황은 55대 45였다. 빈 라덴이 거기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고, 그가 없다면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다. 우리는 분명 타국 영토에 들어가 헬리콥터를 착륙시키고 군사작전을 펼쳤다. 만약 그 건물에 머무르고 있었던 게 빈 라덴이 아니라 두바이 왕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작전을 결정하는 데는 많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얽혀 있었다.”

    언뜻 들으면 이해가 쉽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왜 갑자기 ‘두바이 왕자’를 들먹인 것일까. 알고 보면 이는 클린턴 행정부 시기였던 1998년 말 진행됐던 한 사건으로 인해 나온 말이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영화 ‘블랙호크다운’으로 유명해진 1993년 모가디슈 전투의 충격으로 인해 특수부대 작전과 자국군의 인명피해를 과민할 정도로 꺼렸고,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전술로 그러한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순항미사일 활용을 골랐다. 문제는 빈 라덴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시 클라크 전 보좌관의 회고록 내용이다.

    “기회가 세 차례 있었지만 모두 결론이 쉽지 않았다. 처음 두 번은 정보의 확실성을 문제 삼으며 테닛 국장이 반대했다. 마지막 기회의 경우 테닛 국장과 내가 위성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고, 결국 이 건물이 테러리스트의 은신처가 아니라 호화 이동주택인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빈 라덴이 아니라 중동의 다른 우방국가에서 매 사냥을 즐기러 온 사람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예정된 공격은 취소됐다.”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 등의 명문가에서는 대대로 매사냥을 귀족 스포츠의 하나로 즐기는 전통이 있다. 부유한 중동 왕족들은 겨울이면 파키스탄에 날아와 원정 매사냥을 즐겼고, 파키스탄 정부는 방대한 면적에 대해 배타적 수렵허가를 내주며 이들을 환대했다. 아부다비의 왕세자 셰이크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두바이의 셰이크 마크툼 같은 거물들이 모두 매사냥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통째로 세내어 매사냥 캠프로 활용할 정도였다.

    1990년대 중반 이래 파키스탄의 고위급 정치인들은 이들 거물들을 아프간의 매 사냥터로 초청하기도 했다. 함께 사냥을 즐기며 자신들의 혈맹이던 탈레반 지도자들을 거물들에게 소개하고 친교를 맺도록 다리를 놔준 것이었다. 그 결과 막대한 기부금이 탈레반에 흘러들어갔고, 사우디 재벌가 아들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 역시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인물 중 하나였다.

    클라크 전 보좌관이 전한 ‘세 번째 기회’ 역시 이러한 매 사냥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빈 라덴이 정체불명의 중동 부호들과 사냥을 하고 있으며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것이라는 정보가 모니터링 요원들로부터 올라온 것이었다. 분명 순항미사일 공격이 가능한 기회였지만 문제는 그와 함께 있는 ‘중동 귀족들’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백악관에 올라온 위성사진에는 아랍에미리트 공군 도색을 한 C-130 수송기가 인근 활주로에 서 있는 모습이 똑똑히 찍혀 있었다.

    CIA 작전요원들은 “빈 라덴과 어울리는 왕족이라면 테러자금 공급원일 가능성이 크므로 함께 사살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지만, 클린턴 행정부로서는 수송기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아랍에미리트 왕족을 순항미사일로 공격해 죽인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냥은 일주일 넘게 계속됐지만 백악관은 끝내 결정하지 못했고, 알카에다를 추적하던 CIA 요원들은 상부에 이를 거칠게 항의하다 담당간부 한 사람이 전보조치를 당해야 했다.

    다시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으로 돌아가보자. 클린턴 행정부가 매우 신빙성 높은 정보를 확인한 후에도 망설인 것에 비해, 오바마 행정부는 빈 라덴이 정말 그 곳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타국 영토에서 실패할 위험이 적지 않은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그곳에서 ‘두바이 왕자’가 나온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9·11 이전과 이후의 차이다. 더 이상 국제법이나 외교마찰 따위에는 크게 개의치 않게 된 미국 대테러 정책 변화의 결과물이다.

    파키스탄은 과연 협조했을까

    CIA 빈 라덴 담당 팀장을 지낸 마이클 슈이어는 저서 ‘제국의 오만(Imperial hubris)’에서 국제공조를 통해 진행되는 테러 대응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알카에다와의 싸움에서 미국의 우방은 많지 않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주재국 법률을 준수해야 하는 FBI의 활동방식은 늑대에게 공손히 정보를 요구하는 양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그는 “합법적인 수단에만 의존해서는 빈 라덴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나라 밖에서는 ‘법률적 낭만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도 타국 영토 안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테러조직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유엔헌장 등의 국제법은 기본적으로 각국의 주권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테러나 국제범죄 근절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국제법을 엄격하게 지키자면 해당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랄 수밖에 없지만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각국의 이해관계는 언제나 천차만별이다.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다름 아닌 9·11 이후의 워싱턴이었을 것이다.

    빈 라덴이 사살된 직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아마눌라 살리흐 전 아프간 국가정보부장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아프간 정보부는 4년 전부터 빈 라덴이 이번에 사살된 아보타바드 인근에 숨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에 관한 정보평가를 전달하기 위해 아프간-파키스탄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빈 라덴이 자국의 도회지에 숨어 있다는 살리흐 부장의 주장을 접한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바나나공화국 대통령으로 보이느냐”는 호통이었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살리흐 부장을 향해 달려드는 무샤라프를 몸으로 막아서야 했다.

    빈 라덴 사살이 공개된 직후 일각에서는 왜 미국이 파키스탄 정부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체포를 요청하지 않았는지 따져 묻는다. 파키스탄 또한 당시의 작전이 주권침해라고 항의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본 파키스탄의 태도를 감안하면 관련 정보나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과연 의미 있었을지 사뭇 의심스럽다. 특히 백악관은 설령 은신처를 정확히 알아내 통보한다 해도 서두에서의 사례들처럼 조용히 빼돌릴지 모른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번에 놓치면 언제 다시 찾아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직접 뛰어들든지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이었던 셈이다.

    20년의 결론

    물론 타국 영토 내에서의 일방적인 자력구제가 국제법적으로 논란을 피해갈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보가 잘못됐거나 작전에 실패할 확률은 상존하고, 상대국과의 관계악화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협조하지 않으면 직접 나설 것이라는 확신을 상대에게 줄 수 있을 때에만 최소한의 협조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과 중동국가들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미국은 2010년 한 해 동안 파키스탄에 30억달러 규모의 직접 지원을 제공했다. 당근과 채찍, 어르기와 달래기를 반복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뛰어들기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미국의 복합적인 대테러 정책인 셈이다.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기회와 머뭇거림,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고 9·11 테러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경험한 후에야 도달할 수 있었던 결론이다. 그렇게, 워싱턴은 결국 빈 라덴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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