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테러학교 된 이슬람 교육기관 ‘마드라사’ 폭탄배낭 메는 영국·미국의 엘리트 청년들

파키스탄 ‘테러 유학’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gabjini3@hanmail.net

    입력2011-10-20 10: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현재 1만50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슬람 교리만이 아니다. 상당수 학생이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실전 테러 훈련을 받고 있다. 7~19세의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건 주로 폭탄제조 기술, 자살폭탄 테러 방법 등이다. 고국을 찾는 상당수의 파키스탄계 영국 젊은이도 이런 과정을 거쳐 ‘이슬람 전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과 영국 등에서 각종 테러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10년째 하고 있지만,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이렇게 소리 없이 세력을 넓히고 있다.
    테러학교 된 이슬람 교육기관 ‘마드라사’ 폭탄배낭 메는 영국·미국의 엘리트 청년들

    중무장한 탈레반 군인들

    2005년7월7일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지하철·버스 동시다발 자살폭탄 테러로 56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7월7일에 발생했다고 해서 ‘런던 7·7테러’로 불리는 이 사건의 범인은 4명이었다. 테러범들은 4.5㎏짜리 폭탄배낭을 메고 킹스 크로스 역에 집결해 각자 목표물을 향해 흩어진 후 폭발물을 터뜨렸다. 테러범들은 현장에서 전원 사망했다. 유혈이 낭자했던 그 사건의 범인 4명은 모두 파키스탄계 영국인이었다. 이 테러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한 내국인에 의한 자살폭탄 공격이었다. 런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피폐화된 바 있고 1970~90년대는 북아일랜드공화군(IRA)의 잇단 테러로 몸살을 앓은 적은 있지만, 자국민에 의해 안보를 위협당한 건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영국판 9·11테러로 불린 이 사건의 범인들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영국 북부 리즈의 가난한 동네에 살던 모하마드 시디크 칸, 셰자드 탄위르, 저메인 린지, 하시브 후세인이었다. 리즈 시는 인구의 15%가 이슬람계로, 상가 2층을 임차해 운영하는 이슬람 기도회나 임시 모스크가 있는 도시다. 이슬람 출신 이민자들을 적극 포용해온 영국은 이민자나 이민 2세들이 테러의 주범으로 떠오르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테러를 주도한 이들이 영국의 보통 젊은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과 축구에 열광하는,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영국의 보통 젊은이들이다.

    마드라사에서 테러 훈련

    영국 런던 시내 동부 외곽에 있는 퀸즈로드 104번지. 런던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은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거리 한쪽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히잡을 쓴 여성들이 지나가는 광경이 우리가 알고 있는 런던 시내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이 거리에 사는 파키스탄인들이 자주 가는 미용실 바로 옆집에 와히드 자만 가족이 산다. 와히드는 파키스탄계 이민 2세로 의대를 다니는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식 문화 속에 성장했으며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항공기 폭파 음모 주모자라는 사실은 영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다. 와히드는 2006년 적발된 항공기 연쇄테러를 모의했으며 런던발 미국행 민간항공기 7편에 대해 폭파를 기도했다. 그와 테러를 모의했던 공범들은 500㎖의 음료수 용기 안에 폭탄의 재료가 되는 액체를 담아 비행기가 이륙하면 기내에서 폭탄을 제조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탑승 직전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유럽을 시작으로 주요 국제선 항공노선에서 100㎖ 이상 액체의 기내 반입이 금지됐다. 똑똑한 수재였던 와히드가 테러범이 됐다는 사실을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믿지 못했다. 와히드의 친구인 아민은 “그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성실하고 조용하며 공부에 열중하는 학생이었다. 그와 테러를 전혀 연관지을 수 없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7·7테러 사건을 주도한 네 명의 젊은이와 와히드는 다른 영국 청년들과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 국가의 이민 2세로 의대생이나 엔지니어 같은 촉망받는 엘리트였으며, 테러 실행 전에 파키스탄을 방문해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를 거쳐갔다. 시디크 칸과 셰자드 탄위르는 파키스탄 마드라사 동기동창이었다. 또 항공기 폭파 음모 용의자 와히드도 대학을 가기 전 단기간이지만 파키스탄에 있는 마드라사에서 공부했다.

    그럼 이들이 공부했다는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어떤 곳일까.

    현재 파키스탄에는 이슬람 교리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세운 마드라사 수천 개가 전국 각지에 있다. 문제는 대다수 마드라사가 강경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극단적인 반서구·반기독교 사상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곳에선 코란과 샤리아라는 이슬람 율법의 엄격한 실천을 강조하며, 현재의 불합리함은 모두 미국 중심의 반테러 전쟁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은 모두 이슬람 학살 종교전쟁이라는 것이다. 또 마드라사에선 이스라엘을 악의 근원으로 규정하면서 이슬람의 모든 신도가 이에 대항하는 성전(지하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주로 아프간 등지에서 온 전쟁고아이거나 이슬람 성직자가 되려는 예비 신학도다. 9·11 이후 이들의 사상은 더욱 과격해졌다. 미국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조했으며 아프간-파키스탄의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운영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드라사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나온 신학생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마련된 훈련 캠프에서 실전 테러 훈련을 받기도 한다.

    휴가나 친척 방문을 위해 고국을 찾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은 연간 40만명에 달한다. 영어밖에 모르는 이들이 모국의 문화를 경험하는 계기를 갖고자 파키스탄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방문자는 부모나 친척의 권유로 파키스탄 마드라사를 방문한다. 파키스탄 지오TV에서 일하는 라힐 기자의 얘기다.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해외의 파키스탄 교민들을 위한 코스도 갖추고 있다. 영어와 파키스탄 언어인 우르드어 통역을 두기도 하고 영어 코란도 완비하고 있다. 짧은 시간 내에 집중 코스를 거치게끔 완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마드라사 과정을 끝내면 테러 훈련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폭탄 제조 기술이나 자살폭탄 테러 방법 등의 실전 기술을 배운다. 이런 훈련 캠프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부족 자치 지역에 여러 군데 설치돼 있다. 마드라사나 테러 훈련소 방문자들은 영국 정보국이나 파키스탄 정부에 적발되지 않는다.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이 매일 수백 명이 넘는 상황에서 이들을 일일이 추적 감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이 되면 방학을 맞아 파키스탄 방문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파키스탄계 영국 젊은이가 하루 최고 1000명에 달한다.

    자살폭탄 테러 방법 훈련

    테러학교 된 이슬람 교육기관 ‘마드라사’ 폭탄배낭 메는 영국·미국의 엘리트 청년들

    이라크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 현장

    2007년 겨울, 파키스탄 취재차 도착한 이슬라마바드 공항에서 필자는 두 명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들은 청바지에 영어 문자가 쓰여있는 티셔츠를 입고, 출입국 수속을 마친 뒤 공항 대기실에서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교육을 많이 받았으리라고 느껴질 정도로 얼굴도 반듯했고 영국식 영어와 말투에서 교양이 묻어났으며 예의도 상당히 갖추고 있었다. 22살 동갑의 이들은 영국 명문 의대생들이었고 부모님의 고향인 파키스탄을 처음 방문한다고 했다. 그리고 파키스탄 언어를 익히기 위해 석 달간 페샤와르 시내에 있는 마드라사를 방문한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었다. 공항 대기실에는 이들 말고도 같은 비행기로 도착한 듯한 여러 명의 또래 젊은이가 있었다.

    이윽고 파키스탄 민속의상을 입은 사람이 공항 대기실로 들어섰고 그는 여러 이름을 호출했다. 그 이름들 중에는 파키스탄식 이름도 있었지만 영어식 이름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큰 버스에 실려 떠났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이렇게 한 차씩 젊은이들을 태우고 마드라사로 데려다주는 전문 브로커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브로커들은 영국에서 모집책과 파키스탄에서 마드라사까지 이동을 도와주는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마드라사는 무료로 운영되며 심지어는 영국에서 파키스탄으로 오는 항공요금과 비자까지 주선해준다. 수소문 끝에 라호르에서 만난 한 마드라사 브로커는 “모든 비용과 나의 수고비는 마드라사에서 받는다. 나는 가족 중심으로 이 사업을 하는데 런던에서는 삼촌이 모집책을 맡고 있다. 삼촌도 파키스탄계 영국 국적자로 런던 인근에서 작은 모스크를 하고 있다. 삼촌이 파키스탄에 올 사람들의 이름과 도착 시각을 나에게 알려주면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마드라사에 요청한다. 예전에는 파키스탄 정부가 학생비자를 잘 주었는데 지금은 런던 테러 사건 이후 마드라사에서 요청하는 학생 비자 발급을 중지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방문이나 관광 비자로 와서 여기서 돈을 주고 연장 신청을 하는 방법을 쓴다”고 대답했다. 필자가 그동안 이렇게 마드라사로 유학 온 사람이 몇 명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셀 수 없을 만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달 후 나는 페샤와르 지역의 마드라사를 취재하다가 공항에서 만났던 그 두 젊은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파키스탄 탈레반에 대해 취재 중이었는데 페샤와르는 탈레반과 연결된 이슬람 세력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방문하게 된 한 이슬람 사원에서 그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페샤와르에서는 제일 큰 곳으로 파키스탄 전국에서 몰려온 수백 명의 학생이 등록돼 있다. 보통 마드라사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와 같이 붙어 있는데 학생들은 모스크와 사원 그리고 건물 뒤편에 있는 일종의 기숙사 건물에서 생활한다. 사원에 들어서자 슬리퍼가 즐비했고 사원 안쪽에 이슬람 전통복장을 하고 토피라고 불리는 하얗고 동그란 모자를 쓴 학생들이 코란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두 달 전 만났던 그 영국 젊은이들도 섞여 있었다. 필자가 두 달 전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옷차림은 반팔 셔츠에 청바지였는데 다시 만난 그들은 파키스탄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라고 생각지도 못하다가 그들이 먼저 알은체를 해서 비로소 같은 인물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달 전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우선 내 옆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여자 옆에 앉는 것은 이슬람이 금기시한다며 한사코 구석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들은 차림새뿐만 아니라 눈빛도 변해 있었으며 필자와 나눈 한 시간여의 대화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불과 두 달 만에, 천진난만한 표정의 평범한 영국 대학생에서 미국을 증오하는 파키스탄 젊은이로 바뀌어 있는 그들의 모습에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젊은이 중 한 사람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이슬람에 반대되는 인생이었으며 지금이라도 알라를 위해 사는 인생이 되고 싶어 그런 결심을 했노라고 밝혔다. 이들은 영국에서 미래가 보장되는 젊은이였다. 명문 의과대를 다니며 장래 촉망받는 의사가 되어 영국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들은 보장받은 미래를 버리고 부모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다.

    문제는, 그 결정이 불과 두 달 만에 내려졌고 이들을 교육한 페샤와르의 마드라사가 급진 이슬람주의를 믿는 곳이라는 데 있다. 그들이 다니던 마드라사는 현재 파키스탄의 급진 이슬람 정당의 주요 간부들이 운영 중이며, 이 마드라사를 졸업한 학생들이 탈레반 병사로 대거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로 유입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필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이곳에서 평범한 학생으로 살 것 같지는 않았다. 불과 두 달 만에 이들의 인생은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마드라사에는 이 두 명 외에도 세계 각국의 이슬람계 서구 이민 2세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두 달 만에 바뀐 인생

    앞서 열거한 영국의 각종 테러 사건을 주도한 젊은이들이 바로 이 파키스탄 마드라사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파키스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파키스탄 내 불특정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해왔으며 테러자금을 송금받은 사실까지 경찰조사에서 드러났다. 2005년 6월 적발된 미국 영국 캐나다 등지의 다국적 이슬람 자생 테러조직에도 마드라사 출신이 많았다. 미국 국방부는 파키스탄 마드라사 가운데 70%가 이슬람 원리주의 교육과 군사훈련까지 겸한 테러리스트 캠프로 추정하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 파키스탄 마드라사로 유입되는 학생들의 연령은 7세부터 19세까지로 대부분 이민 2세다. 이들은 늦어도 고교 졸업 후 1∼2년을 유학하는데 모국의 언어를 배운다든지, 부모의 권유로 파키스탄을 찾는다. 문제는 이들이 파키스탄 마드라사에 유학하는 동안 영국의 모범적인 중산층 서구시민에서 코란으로 무장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키스탄 마드라사에서 엄격한 종교 생활을 하다가 다시 영국으로 온 젊은이에게 영국의 화려한 길거리는 갑자기 세속적인 것으로 비친다. 그리고 신문과 방송을 가득 채운 아프간이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기사는 그들로 하여금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사회에 극도의 반감을 가지게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슬람 교리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테러학교 된 이슬람 교육기관 ‘마드라사’ 폭탄배낭 메는 영국·미국의 엘리트 청년들

    코란을 읽는 10대 청소년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2006년 사설을 통해 “미국과 영국 등의 대(對)이슬람 강경정책이 계속되면서 이슬람 이민 2세들 사이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일반화하고 있다”면서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이를 극단적 청년 이슬람 전사를 길러내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일간지 다운의 기자 라자 칸은 “파키스탄 내 마드라사에 유학 온 서구 사회의 이민 2세들의 경우 마드라사 졸업 후 두 가지 길이 있다. 이곳 파키스탄에 남아 탈레반의 전사가 되거나 귀국해 서구 사회에서 잠재된 테러리스트로 남는 경우다. 마드라사에서 그들에게 서구 사회에 대항해 지하드(성전)의 길로 가는 것이 올바른 이슬람의 길이라고 세뇌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마드라사 출신 청년들에 의한 테러 사건이 급증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파키스탄 마드라사에 유학 중인 외국인 학생들을 잠재적 안보 위협요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를 길러내는 메카라는 오명을 듣게 된 파키스탄 정부도 당혹스러워한다. 파키스탄으로 급진 이슬람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입국하는 학생의 경우 사전 적발이 쉽지 않다. 마드라사가 1만5000개에 달하고 학생 수도 많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영국 여권을 가지고 파키스탄에 입국하는 사람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미 2005년부터 학생비자 발급을 중단했지만 외국인 유학생을 연결해주는 중간 브로커가 관광비자로 입국한 학생을 마드라사에 입학시키는 경우가 많아 관리를 더 어렵게 한다. 파키스탄이 아프간에 이어 탈레반과 알 카에다의 근거지가 된 상황에서 이들 유학생이 이슬람 극단 세력과 연계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이에 각국 정보 당국자들은 이 파키스탄 마드라사 유학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해 AP통신이 확보한,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 주재 각국 정부 및 보안당국자들의 합동회의록에는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에 각국 보안기구의 신원확인 없이 외국인 학생이 입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함돼 있어 충격을 줬다. 관계자들은 이 학생들이 불법 유학을 하고 있으며 심각한 안보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회의의 결론은 “이들 유학생을 무조건 추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파키스탄 정부가 이 마드라사에 대한 단속을 대대적으로 실시할 경우 엄청난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대대적인 단속이 자칫 마드라사에서 수학 중인 수만 명의 젊은이를 자극하게 되고 이것이 파키스탄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마드라사들도 종교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놓고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있어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파키스탄에서 마드라사는 알라의 학교이기 때문에 이 학교들에 대한 단속이 자칫 정부가 성스러운 신권에 도전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들은 불법 유학생 단속에 협조하기는커녕 브로커들과 합동으로 이들의 불법 체류와 유학을 돕고 있다.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서구에서 몰려오는 유학생들로 날로 번창하고 있다.

    ‘성전’에 뛰어든 영국 의사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최근 테러를 저지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파키스탄을 찾은 외국인 전사와 가족이 북 와지리스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된다고 보도했다. 이들 대부분이 파키스탄 마드라사 출신이다. 필자가 와지리스탄 탈레반 사령관 오마르를 인터뷰할 당시 통역은 그의 주치의로 런던에서 수련의까지 마친 영국인 의사였는데, 파키스탄계 영국인인 그도 이슬람의 성전을 위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고 싶어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와지리스탄으로 온 사람이었다. 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탈레반 전사는 아예 이곳 출신 파슈툰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프간으로 출장 전투를 다녔다. 탈레반 전사들이 아프간, 파키스탄이 아닌 국제적인 전사 그룹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2009년 파키스탄에서 납치되었다가 7개월 만에 탈출한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 지역은 우즈베키스탄·아랍·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민병대 등으로 넘쳐난다”고 증언했다. 파키스탄 현지 ‘AAJ TV’의 인티사르 울 하크 기자는 “파키스탄이 이른바 ‘테러유학’을 온 서양 이민 2세들로 인해 ‘테러 메카’가 됐다. 이 테러 유학생이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이들은 앞으로 서구 사회에서 또 다른 테러와의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파키스탄 마드라사 출신 외국인들은 계속 그곳에 남아 지하드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테러 캠프에서 폭약 제조 기술 등을 포함한 단기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잠재적 아마추어 테러리스트로 사회 곳곳에 섞인다.

    2009년 필자가 방문했던 다른 파키스탄 마드라사에서는 12세 미국인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미국인 아버지와 파키스탄 어머니를 두었으며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미국 애리조나에서 파키스탄으로 온 지 1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윌리엄이라는 그 아이의 미국 이름 대신 살렘이라는 파키스탄 이름으로 바꾸고 페샤와르에 있는 마드라사로 그를 보냈다. 아이는 하루에 7시간씩 마룻바닥에 앉아 코란을 암송한다. 현지 말이 서툴러 하루에 두 시간씩 현지어와 아랍어 교육을 받고 있고 마드라사는 무상으로 이 교육을 윌리엄에게 제공한다고 했다. 그 아이가 다니던 마드라사에는 세계 29개국에서 온 10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이 1000여 명의 파키스탄 학생과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이 마드라사는 파키스탄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급에 들어가는 학교다. 다른 이민 2세들과 달리 금발에 백인 피부를 가진 윌리엄은 유창한 미국식 영어로 자신이 테러리스트 교육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미국보다 이곳이 더욱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인터뷰 당시 학교 관계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12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아이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그의 어머니도 아이가 미국에서보다 더 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아이와 엄마가 만족할 만한 교육이라고 하는 데야 할 말이 없지만, 윌리엄이 다니던 마드라사는 탈레반 사이에서 명문 학교로 이름 높은 곳이었다. 이 마드라사 출신 중에 아프간을 주름잡는 탈레반 사령관이 여럿 배출되었으며 아프간 탈레반 대통령 급인 물라 오마르도 이 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와 관련된 웹사이트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 군대와 맞싸우는 이슬람 성전과 자살폭탄 테러를 열렬히 찬양하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글이 올라와 있다. 윌리엄이 앞으로 배우고 나아갈 길이 자명해 보였다.

    이 마드라사에는 파키스탄의 이슬람계 학교와 서방 출신 학생뿐만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도 많았다. 이들 중에는 거의 무료로 마드라사에서 이슬람 교육이나 언어를 배우는 학생도 많았다. 마드라사에서 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 국가들의 기부 때문이다. 특히 걸프만 국가 등 산유국의 부유한 계층으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이 이 마드라사에 전해진다. 학생 수가 많을수록, 학생들의 활약이 뛰어날수록 더 많은 기부금을 그들에게 받아낼 수가 있다. 그래서 각 마드라사는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며 서구 사회의 이민 2세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가난한 이슬람 국가의 학생들에게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유학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들의 출신 국가 중에는 테러조직이나 이슬람 반군과 전투를 벌이는 나라도 많다. 소말리아나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다. 특히 태국은 남부의 일부 이슬람 세력이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파키스탄에 국한되어 있던 이슬람 급진주의는 이런 식으로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

    무상으로 테러교육

    파키스탄에서 마드라사를 다니던 유학생 중에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다. 그는 이름 대신 ‘미국인 탈레반’으로 유명한 존 워커 린드다. 9·11테러 직후 아프간전쟁이 한창이던 2001년 11월 아프간 북부 마자리 샤리프에서 북부동맹의 한 군벌인 도수툼 장군의 지배지였던 ‘콰라-이-잔기’ 요새에서 미국 CIA 요원들이 탈레반 포로 심문 도중 발견한 존 워커 린드는 당시 20살이었다. CIA 요원들은 그의 영어 실력과 발음이 거의 미국인과 유사하다고 판단했지만, 린드는 자신이 영국인이며 압둘 하미드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드러난 진실은 그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 탈레반이라는 것이었다.

    그 뉴스가 미국에 전해지자 그렇지 않아도 9·11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미국 사회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애국심으로 들끓어 빈 라덴과 탈레반에 협조하는 그 어느 나라도 용서가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런 판국에 미국인으로 탈레반이 된 린드의 존재는 미국인 사회에 충격 그 자체였다. 린드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의료복지사인 어머니를 둔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16세 때. 주변의 권유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18세에 부모가 이혼한 후 방황하던 그는 단순히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예멘에 갔다. 그러나 예멘에서 진실한 이슬람을 배우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에 가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그는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이슬람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코란과 파슈툰어 등을 배웠다. 그 와중에 그는 자연스럽게 탈레반 관계자나 아프간 종교지도자들과 접촉하게 됐고, 이들의 ‘순수 이슬람 국가’ 건설 이념에 매료돼 이슬람 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빈 라덴의 테러훈련캠프에 합류, 칼리슈니코프 소총을 쏘는 법 등을 배웠다. 또한 탈레반 전사로 카슈미르로 파견돼 인도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존 워커 린드는 탈레반 전사로 밝혀진 최초의 미국인이다. 그는 파키스탄에 유학생 신분으로 와서 점차 탈레반 전사가 되는 전형적인 단계를 거친 테러 유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부모를 둔 린드는 왜 탈레반 전사가 되어야 했을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그가 자란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8세 되던 해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미국 사회에서 이혼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그는 그로 인해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한창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 그는 내성적인 성격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도피가 필요했고 그것을 색다른 종교인 이슬람에서 찾았다. 그는 항상 외로운 상태에서 공허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가 이슬람 사원을 가면 그곳의 모든 사람이 환영해주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그렇게 그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이후 파키스탄에 유학 와서 자연스럽게 탈레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탈레반이 통제하는 아프간이 이슬람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참된 이슬람 국가라고 했다. 그는 “이슬람을 공부하던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아가며 훈련하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분별력이 약한 10대 후반의 그가 무조건적으로 마드라사의 교육을 받아들인 결과 그는 아프간에서 탈레반 전사로 활동할 것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린드는 2001년 12월 체포 직후 미국으로 송환돼 국가 반역죄로 사형 종신형이 운운되다가 지금은 금고 20년의 선고를 받았다. 현재 10년의 형기를 남겨두고 있다.

    런던 7·7테러 사건의 젊은이들이나 항공기 폭파 음모 사건의 와히드는 또 어떻게 테러리스트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 파키스탄 이민 2세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완전한 영국인이었다. 더군다나 명문 의대나 엔지니어 등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였다. 그런 그들이 영국에서 자생적 테러를 고착화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민 2, 3세가 느끼는 차별과 사회에서의 소외감을 들 수 있다. 비록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인으로 자랐지만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유색인종으로 혹은 이슬람 국가 출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느끼며 자란다.

    런던에 거주하며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레바논 이민 2세 이브라임(34)은 “나와 나의 아들처럼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곳에서 학교에 다녔고 영어도 완벽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영국 사회에 동화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내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언제든 차별에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 같은 전문직 종사자는 그런대로 괜찮은 보수와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이슬람 이민 2세들의 실업률은 심각하다. 실제로 영국 내 무슬림 청년의 실업률은 25%에 달한다. 같은 또래의 영국 젊은이 실업률이 2.8%인 데 비하면 매우 높다. 세계 경제가 침체기로 들어서며 영국 국내 경제 상황도 심각해진 현재는 더욱 무슬림 청년들의 실업률이 높아가고 있다. 직업을 갖지 못하는 무슬림 청년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결국 영국 내 잠재적 폭탄이 되는 것이다.

    무슬림 청년 실업률 25%

    또 다른 이유는 무슬림의 보수성이다. 몸이 아무리 영국이나 유럽 등 서구 사회에 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과 머리는 고국에 있다. 서구 사회에서 살면서도 이슬람 종교의식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도 많고 가족들에게 이슬람식으로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영국에 살고 있는 파키스탄이나 카슈미르 출신 무슬림의 경우, 여자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사원에도 출입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 성향이 강하다. 그렇다보니 독일 프랑스나 노르웨이 같은 선진국에서도 이슬람 가정의 자녀들은 자유연애가 허락되지 않고 정혼을 해야 한다. 심지어 자유연애를 하는 이슬람 가정의 딸들은 명예 살인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파키스탄 이민자들은 극단에 가까운 종교적 보수성을 지키고 있으며 그들은 영국 국적자라 하더라도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좇는 영국 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크다. 이들의 자녀들도 토니 블레어 총리가 부시 행정부와 공동전선을 구축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혹은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점에 적개심을 품고 있다.

    런던 7·7테러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160만명의 영국내 무슬림 가운데 20%는 자폭 공격을 가하는 범인들의 심경에 공감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다른 여론조사에선 70%가 테러에 관한 정보를 경찰에 제공할 용의가 있지만, 18%는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어떤 충성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응답했다. 영국 정부는 근대 들어 타민족도 수용하는 다양한 다문화주의 정책을 펼쳐왔다. 하지만 지금 영국 정부는 자신들의 다문화 정책이 성공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생적 테러 사건은 영국 사회에서 이민 세대들을 끌어안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이슬람 이민 2세도 사정이 비슷하다. 2009년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이민자로, 콜로라도주 덴버공항 셔틀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나지불라 자지가 뉴욕시내 지하철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모의하다 붙잡혔다. 지난해 3월에는 파키스탄계 미국인인 데이비드 헤드리가 2008년 인도 뭄바이 테러공격을 모의, 지원한 혐의로 시카고에서 체포됐다. 12월에는 파키스탄계 미국인 2명을 포함해 버지니아 주 출신의 미국 청년 5명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를 모의한 혐의로 파키스탄에서 체포됐다. 이들 모두 미국 시민권자이며 미국과 영국 등 서구 국가들의 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고, 파키스탄을 방문해 마드라사에서 공부했으며 테러캠프에서 폭약제조기술 등을 포함한 단기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경력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테러와 관련돼 기소된 전력이 없고, 폭약 제조기술도 조잡한데다 외국 테러단체들과도 별 연관성이 없었지만 수사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되지 않아 전문적인 테러리스트들보다 더 위험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자국민에 의한 테러나 독자적 테러리스트에 의한 공격이 빈발하면서 이제 미국 내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알 카에다만큼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국 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청년 실업률이 갈수록 치솟는 가운데 이들이 느끼는 좌절과 9·11 이후 무슬림을 보는 차별적인 시각이 이 같은 자생적 테러리즘을 늘린 것이다.

    파이잘 샤자드(31)는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한 파키스탄 이민자다. 1998년, 18세의 파이잘은 학생비자로 미국으로 건너와 대학을 마치고 경영전문대학원(MBA) 과정을 이수한 엘리트였다. 졸업 후 그는 유명 화장품 회사 엘리자베스아덴의 품질관리분석가로 일을 시작했으며 이후 마케팅업체 오피니언의 재무분석가로 일을 한 전문직 종사자였다. 그의 삶은 성공적이었고 파키스탄계 미국인 여성과 2004년 결혼해 그해 코네티컷 주 교외에 아름다운 2층짜리 집을 샀으며 슬하에 남매를 뒀다. 2009년 4월에는 미국 시민권도 취득해 파이잘은 미국의 성공한 엘리트로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웃들과 사이도 좋았고 아이들 교육에도 관심을 쏟았으며 아내와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경제적 어려움이 만든 테러리즘

    그런 그가 별안간 미국 신문의 톱뉴스를 장식한 주인공이 됐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일으키려 했다는 뉴스였다. 2009년 5월1일 밤,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폭발물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차량이 경찰에 발견됐다. 타임스퀘어는 즉시 폐쇄됐고 인근을 오가던 시민 수천 명과 관광객이 대피하는 등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다행히 폭발물은 터지지 않아 인명 피해 없이 사건은 종결됐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파이잘을 검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이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 사건의 범인 파이잘이 전문직에 종사하던 성공한 미국 엘리트라는 점이었다. 풍족한 파키스탄 이민자 파이잘은 10여 년간 가족 행사로 파키스탄에 13번을 다녀갔을 뿐, 스타벅스 커피에 더 익숙한 완전한 미국인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남부러워할 만한 직장과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테러리스트라는 무서운 길을 선택한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보려면 그의 과거 행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좋은 직장에서 잘 나가던 그의 인생에 문제가 생긴 건 그가 집을 살 때 빌린 주택담보대출 때문이었다. 2004년 파이잘은 시가 27만3000달러에 2층집을 샀다. 그는 그 집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소시민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대출금이 무려 21만8400달러에 달했다. 2008년부터 미국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지자 그의 집값도 하락했다. 파이잘은 이 여파로 대출금 상환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 정리해고되어 그는 더 이상 집을 위해 대출금을 낼 수가 없게 됐다. 결국 파이잘은 2009년, 가족과 함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돌아갔다. 고향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고향 친구들이 위로를 하며 접근했다. 이들은 모두 탈레반 조직원이었다.

    테러학교 된 이슬람 교육기관 ‘마드라사’ 폭탄배낭 메는 영국·미국의 엘리트 청년들

    아프칸에서 탈레반과 전투를 벌이는 미군들.

    파이잘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꼬이게 된 것이 모두 미국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고향인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지역이었으며 탈레반과 알 카에다의 수도라고 불리는 와지리스탄과도 거리가 가까웠다. 파이잘은 미국 사회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제 발로 와지리스탄 테러기지를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폭발물 제조 훈련과 테러 훈련을 받았고, 5개월 후 파이잘은 아내와 아이들을 파키스탄에 두고 홀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파이잘이 훈련을 받았던 와지리스탄은 이른바 파키스탄 탈레반의 주요 거점 도시로, 파이잘의 뉴욕 타임스퀘어 폭탄테러가 미수에 그치자 파키스탄 탈레반은 “이번 사건은 우리들이 저지른 일이며 미국 도시들이 공격 목표”라는 성명을 냈다. 미국 정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파키스탄 와지리스탄에서도 미국 주요 도시에 대한 원격 테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뉴욕타임스도 “파키스탄 탈레반과 파이잘의 연루가 확인되면 이 조직은 파키스탄과 아프간 밖 목표물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심지어는 사건 발생 14일 후 알 아라비아 TV화면을 통해 테러기도 전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파이잘의 영상이 방송됐다. 이 영상에는 파이잘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난하며 자살폭탄을 결의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겨우 5개월 만에 그는 완벽한 폭탄 테러리스트가 되어 미국 거대도시 한가운데를 폭파하려 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대출금 상환을 제대로 하고 있었고,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벌어지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결국 경제적인 파탄이 그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이다.

    오바마의 사살 명령

    미국 내 자생적 테러의 대표주자는 예멘계 미국인 안와르 알-올라키(40)이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 이후 최고의 거물 테러리스트로 9·11테러의 배후로 의심받는 급진 이슬람 성직자이자, 2009년 1월 알 카에다 사우디아라비아 지부와 예멘 지부를 통합해 출범한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1년 미국 남부 뉴멕시코 주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었다. 7세에 예멘으로 건너가 이슬람 교육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콜로라도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이어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은 유능한 인재였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의 평범한 교사직을 거부하고 1996∼2000년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이슬람 사원을 운영하며 이슬람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영어와 아랍어에 모두 능통한 그는 서방 국가에서 알 카에다 조직원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다.

    2004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예멘으로 돌아온 그는 2009년 텍사스 미군기지 총격 사건과 크리스마스 미국행 여객기 폭파 기도 사건, 지난해 예멘발 미국행 화물기 폭파 미수 사건의 핵심 배후로 지목됐다. 미국은 그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며 추적했고, 지난해 초 오바마 대통령은 그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렸다. 결국 알 올라키는 9월30일 오전 예멘 수도 사나에서 동쪽으로 140㎞ 떨어진 알 자우프주의 카셰프 인근에서 미군 무인 폭격기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알 올라키 사망 당시 같이 있었던 사미르 칸 역시 파키스탄계 미국 국적자로, 영어로 제작된 알 카에다 웹매거진 ‘인스파이어’를 발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스파이어를 만들다가 예멘으로 들어가 알 카에다 전투요원에 합류했으며 인스파이어에 ‘여생을 지하드(성전)를 위해 투쟁하자’고 쓰기도 했다.

    이 두 거물도 청소년 시절 마드라사를 거쳤다. 사미르 칸은 파키스탄 마드라사를 정식으로 밟은 대표적 테러 유학생이었다. 미국 시민으로 태어나 자란 이 두 사람의 활동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외부 세력에 의한 테러보다 미국 내 자생적 테러로 인한 안보 위협이 더 심각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제 파키스탄 마드라사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사회의 중심에 인간폭탄을 심어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알 카에다는 그렇게 소리 없이 서구 사회로 스며들 수 있었고 이제는 굳이 파키스탄 마드라사를 거치지 않더라도 인터넷과 블로그를 활용해 일종의 통신 교육도 하고 있다. 이제 알 카에다나 탈레반은 미국과 전 세계를 아우르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이 추종자들을 파키스탄 마드라사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자생적 테러 전사를 만드는 중심에 파키스탄 마드라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아무리 전쟁을 해도 정작 자생적 테러를 저지르는 내부의 적인 자국민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다. 서구 사회의 다문화정책이 실패하고 경제 침체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테러 유학생들의 행렬을 멈추기는 더 힘들어졌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미국이 10년간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 들인 막대한 전비와 이로 인한 경제난이 결국 좌절한 이민자들을 테러 유학생으로 내몰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