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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장성택 숙청 후 김정은의 북한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베이징서 본 북중 관계

  • 장량 │외교안보전문가·정치학 박사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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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北-中 ‘전략적 이해관계의 불일치하의 일치’ 계속될 듯
  • ● 中, 고비 때마다 한반도에 병력 파병… “역사에서 배워야”
  • ● 한반도가 中 영향권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 ● 한국의 북핵 정책 재고해야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2011년 12월 19일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은 정오(正午) 방송을 통해 김정일이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급사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방송을 전후해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이 포함된 특별소조를 구성하는 등 긴박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국은 그날 오후 양제츠 외교부장을 통해 주중국 북한 대사대리 박명호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공동명의의 조문을 전달했다. 같은 날 저녁 장즈쥔 외교부 수석부부장은 베이징에 주재하는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 대사를 불러 북한을 자극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다음 날 환구시보는 사설을 통해 ‘중국은 북한에 가해지는 외부 압력을 막아주는 방패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오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직접 베이징 차오양구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김정일의 사망에 조의를 표했다. 원자바오 당시 총리,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 리커창 당시 수석부총리 등 여타 정치국 상무위원 8명도 모두 조문차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중국은 김정은 체제 및 북한의 안정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러시아 측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해 43만여 명에 달하는 선양군구 소속 신속대응부대를 북한과의 국경에 배치하고, 조기경보기 정찰도 강화했다고 한다.

한반도 개입은 필연

시곗바늘을 64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일방적으로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발이 묶이는 등 패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8월 20일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는 유엔에 “중국은 이웃나라 조선의 상황 전개를 우려하고 있으며, 조선반도 문제에 개입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제3국을 통해 미국에도 “중국의 안보를 위해 조선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의 30여 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리한 끝에 정부를 수립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국가였다.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일패도지(一敗塗地) 상태이던 북한군을 압록강-두만강 유역으로 거세게 밀어붙이자 인민지원군을 빙자한 중국군 30만여 명이 그해 가을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낭림산맥과 적유령산맥, 개마고원 골짜기 깊숙이 매복해 있던 중국군은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측면과 배후를 기습공격해 격파하고 12월 5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이듬해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끊임없는 침략과 ‘태평천국의 난’ ‘염군(捻軍)의 난’ 등 농민반란으로 인해 멸망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음에도 신흥 일본에 맞서 1894년 6월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은 천안과 평양, 랴오둥반도 등 육상과 압록강 하구, 산둥반도의 웨이하이(威海) 앞바다 등의 해상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연전연패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일본에 대만을 넘기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했다.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인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몽골족의 거듭된 침공과 만주족 누르하치의 흥기(興起), 농민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하에서도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명의 육군과 진린이 지휘하는 5000여 명의 수군을 조선에 파병하는 등 1598년 종전 무렵에는 10만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처형 후폭풍 미미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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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7일 중국 단둥시의 압록강단교 앞에서 중국 군인이 근무를 서고 있다. 중국은 2011년 김정일 사망 직후 북한 쪽 국경에 병력 43만 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1950년 6·25전쟁, 1894년 청일전쟁, 1592년 임진왜란 때 등 역대 중국 정권은 한반도가 해양세력의 영향력하에 들어갈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주저 없이 대군을 파병했다. 이들 역대 정권은 내란 상태에 있거나 내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난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국가 안보라는 관점에서 중국에 대한 북한의 비중은 미국에 대한 멕시코의 비중보다 높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중국이 취한 일련의 조치도 중국의 국가 안보라는 시각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김정일의 사망이 야기할 수 있는 북한의 불안정이 자국 안보에 미칠 파급효과를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지난해 2월 감행된 북한의 제3차 핵실험과 12월에 자행된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한국과 미국, 일본, 서유럽 국가의 외교관, 군 장성, 학자, 언론인의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3차 핵실험 실시 이후 일부 한국 언론은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보다 ‘북한의 비핵화’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나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중국이 한국 주도의 통일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다는 보도도 나왔다.

실제로 중국이 대외개방을 지향하고 경제 발전을 계속해나가는 반면, 북한은 폐쇄 ·고립 정책을 고수하며 경제난이 심화하는 데다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권력을 구축함에 따라 북한에 대한 중국인들의 실망감을 넘어선 혐오감은 점점 더 커졌다. 장성택 처형은 안 그래도 북한에 멀어지던 중국인의 마음을 더욱 더 멀어지게 했다. 저우펑안 안후이성 우후시 정협위원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장성택의 처형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문화혁명의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썼다. 그만큼 장성택의 처형은 중국인들에게 북한체제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북한 주민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상당수 중국 지식인은 북한을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로 간주하며, 자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정부로서도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석탄을 포함한 자원 수출입 계약 문제와 함께 나선항 임대차 문제 등을 제기한 김정은 정권이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중국 외교부 훙레이 대변인은 “이것(장성택 처형)은 조선의 내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추수룽 칭화대 교수를 포함한 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중국통(中國通)이던 장성택의 처형에도 북 ·중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북한이 향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중국이 달리 대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1인자인 수령 김정은이 외교 업무도 주관하는 터라 장성택의 전격 처형이 중국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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