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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단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다시 들여다보는 분단 책임

  • 최영호 | 하와이대 명예교수∙역사학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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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한반도 분단 원인과 관련해 제3의 시각을 제기하는 논고(論告)를 보내왔다. 기존의 소련 혹은 미국 책임론과 달리 일본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게 요지.
  • 최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 전쟁에 패하더라도 천황을 보호하고 한반도를 계속 지배하겠다는 망상을 품었다.
  • 그래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국 대신 중립 관계인 소련을 활용하려 했다.
  • 그 바람에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고 소련군의 기만적인 참전(參戰)으로 분단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편집자>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내년이면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분단의 근본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은 이렇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소련군은 북한에 이미 진주했지만 미군은 멀리 오키나와에 겨우 도달했을 뿐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미국이 제의하고 소련이 받아들여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했으며, 그 결과로 한반도가 분단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분단 근원 규명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분단의 결정적 원인은 소련이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 대일전쟁 참전권을 확보한 데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은 막대한 인명과 자원을 희생해 거의 단독으로 태평양전쟁 승리를 성취했다. 일본과 소련은 사실 중립조약의 동반자였다. 최후의 순간에서 불과 1주일 전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군사를 진입시켰다. 만약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이 끝났으면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분단 또한 있을 수 없었다.

1945년 봄 전세는 일본에 극히 불리했다. 5월 초 독일이 항복했으며, 6월 오키나와가 함락됐다. 일본은 전쟁을 더는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인했다. 1945년 6월 일본은 패배를 인정하고 전쟁 종결의 길을 모색한다. 이때 일본이 미국과 접촉해 강화의 길을 찾았으면 소련의 참전 없이 전쟁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은 미국을 기피하고 소련에 접근해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강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다. 일본의 이러한 선택은 스탈린에게는 황금의 기회였다.

日蘇중립조약의 운명

태평양전쟁 중 일본과 소련은 상호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이 조약은 1941년 4월 비준됐는데,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평화와 우호관계를 유지해 상대방 영토의 보전(保全)과 불가침(不可侵)을 존중한다 △제3국과 군사행동이 일어날 때 분쟁기간 중 중립을 지킨다 △조약의 기한은 5년이고, 만기 1년 전 폐기 통고를 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5년간 연장한다.

소련과 일본이 맺은 이 조약이 알려지자 세계 열강은 경악했다. 조약 체결 이전까지 소련, 일본은 서로 적성국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 시베리아 출병(1918~1922), 장고봉 전투(1938), 노몽항 전투(1939) 등 군사적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돼 있었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1937년 방공협정(防共協定), 1940년 삼국군사동맹(三國軍事同盟)을 체결했다. 독일, 이탈리아는 소련을 적성국으로 봤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은 중국에 무기를 제공하는 등 중국의 대일 항쟁을 직접 지원한 유일의 강대국이었다. 이렇듯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일본과 소련이 중립조약을 맺었으니 세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중립조약을 맺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은 장고봉, 노몽항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소련의 군사력을 재평가했다. 또한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유럽전쟁이 시작돼 세계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독일이 프랑스,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를 위협했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 지역이 주인을 잃고 힘의 공백지가 됐다.

일본은 중요한 선택에 직면했다. 이른바 ‘북진(北進)’ 혹은 ‘남진(南進)’ 중 택일하는 게 그것이다. 북진론은 소련과 대결해 만주, 몽고,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을 차지하자는 것이었으며, 남진론은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 진출하자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앞으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면 동남아시아의 자원, 특히 석유가 필요하다고 봤다. 게다가 동남아시아는 주인 없는 공백지가 돼가고 있었다. 더구나 유럽전쟁 초기 대승리에 기고만장한 히틀러는 영국 세력을 약화하는 계략으로 소련에는 이란과 인도 방면, 일본에는 동남아와 버마(현 미얀마) 지역으로 진출하라고 권장했다. 이른바 립벤트롭(Ribbentrop) 복안이 그것이다.[‘대동아전쟁전사(大東亞戰爭全史)’ 56p]

일본은 결국 남진론을 택했다. 1940년 7월 27일 대본영은 어전회의에서 ‘시국처리요강(時局處理要綱)’을 채택하면서 “독일, 이탈리아와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고 대소국교(對蘇國交)의 비약적 조정(飛躍的調整)을 기도한다”고 결정했다.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우호적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동시에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공작과 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했으며, 홍콩과 버마에서 영국 세력을 배제하기로 했다. 덧붙여 “남방 문제 해결을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결정했다.[대본영기밀일지(大本營機密日誌) 38~40p]

이렇듯 ‘남진’ 정책을 결정한 일본은 궁극에 진주만 공격에 나서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가장 유의한 것이 소련의 태도였다. 일본은 소련의 행동이 전쟁 수행에 치명적 영향을 줄 것으로 봤으며, 소련과의 전쟁은 절대 회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소련과의 중립조약은 이 정책의 시발점이었다.

한편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로부터 항상 위협을 느꼈다.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이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스탈린은 극동에서 일본의 위협을 제거해 양면 공격을 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일본이 이러한 시점에서 중립조약을 제의했으니 스탈린은 그것을 대환영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일소중립조약(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蔣介石)가 회담해 전쟁 후 동아시아의 새 질서를 논의했다. 세 정상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또한 전후 일본 영토는 원래의 일본 열도에 한정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 독립시키기로 약속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장래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연합국의 공식 합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면담에 참석한 해리먼은 회고록(‘Special Envoy to Churchill and Stalin’)에서 스탈린은 유럽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밝히면서 독일을 패배하게 한 후 시베리아의 군사력을 세 배로 증강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1943년 11월 스탈린은 이렇듯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무시하고 일본과 전쟁을 하기로 미국에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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