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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푸젠성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闽 - “사장 못 되면 남자 아니다”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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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실용적, 세속적

푸젠은 강절(江浙·장쑤성과 저장성) 지역과 함께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강절의 학문은 풍요와 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푸젠의 학문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방도였다. 따라서 강절 문화는 귀족적이고 이론적이며 고아했으나 푸젠 문화는 서민적이고 실용적이며 세속적이었다.

장쑤 쿤산(昆山) 출신의 대학자 고염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의를 위해 학문을 했지만, 푸젠 취안저우(泉州) 출신의 선비 이탁오(李卓吾)는 관리가 되는 목적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먹고 입는 것이 인륜”이라며 당대 사회의 위선에 돌직구를 날렸다.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朱熹)도 푸젠의 대학자다. 주자는 대의를 중시하는 유학과 실리적인 푸젠 문화를 조화시켰다. 당시 푸젠에선 고시 준비를 위한 참고서 출판업이 성행했고, 주자는 인기 수험서 저자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탁월한 중국역사서지만 너무 방대했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핵심 정리집으로 고시생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사서집주(四書集註)’도 인기 해설서였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강사가 ‘하룻밤에 읽는 자치통감’, ‘공무원시험에 꼭 나오는 논어’ 등을 펴낸 셈이다.

태국을 여행하다 푸젠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관광객이 으레 찾는 사원이나 옛 성터 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태국 물건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자기가 앞으로 무역상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서양 여행자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사업가 기질이 대단했다.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그 얘기를 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역사와 문화보다 돈과 음식에 관심이 많아.”

상인 문화가 발달한 푸젠의 딸다웠다. 농사로 먹고살기 힘들고, 공부를 잘해 과거 급제하기도 어려운 푸젠인은 일찍부터 장사에 나섰다. 푸젠인은 “장사 속에 황금의 집이 있고 옥 같은 얼굴의 가족이 있”으며, “사장이 되지 못하면 용감한 남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산이 많아 상업이 발달한 면에서 푸젠성과 안후이(安徽)성은 닮았다. 내륙지역인 안후이 상인들은 강으로 풍요로운 강절 지역에 갈 수 있어 국내 상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해안 지역인 푸젠 민상(商)은 바다로 나가 해외무역을 했다.

푸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한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이 거의 비슷한 거리에 있다. 무역의 중심이 될 만한 곳이다. 송·원대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던 취안저우는 10만 명의 아랍 상인이 살던 국제무역항이다. 아프리카·아랍·아시아를 두루 여행한 대모험가 이븐 바투타는 취안저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최대의 항구”라고 극찬했고, 마르코 폴로는 “후추를 실은 배 1척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갈 때 취안저우에는 100척이나 들어온다”고 경탄했다.

고구마,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 들어오는 창구였고, 해외 우수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인재 풀’이었다. 정화(鄭和)의 대항해는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90년이나 앞서 동남아,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케냐까지 이르렀다. 이때 정화는 취안저우에서 아랍 선원을 고용해 천문항해술을 활용하고 이슬람권의 현지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푸젠인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조정의 의구심을 샀다. 농업이 아닌 상업에 힘쓰고,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며 이상한 물자가 유통되는 푸젠은 매우 수상한 곳이었다.

‘해금령’ 비웃은 생존의지

명나라는 물자의 국외 반출과 해외 교류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나마 해외무역 창구인 시박사(市舶司)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나라는 왜구가 시박사에 나타나자 “왜구의 재난은 시박사에서 일어난다”며 시박사를 폐쇄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때부터 왜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푸젠 순무 담륜이 말한 대로, 푸젠인은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굶어 죽으나 해적질하다 죽으나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인만이 왜구가 아니었다. 푸젠·저장·광둥의 현지인도 해적이거나 해적과 한통속인 경우가 많았다. 해적이라 불렸지만 실상 합법적으로 장사할 수 없는 상인인 경우가 많았다. 취안저우의 관료 임대춘은 탄식했다. “연해의 도시와 향촌 사람은 모두 해적이다. 해상의 뱃사람과 상인은 모두 해적이다. 주나 군을 다스리는 장관 좌우의 서리는 모두 해적이다. 연해의 빈민은 모두 해적이다.”

왜구를 막겠다고 먹고살 길을 막아버리자 멀쩡한 백성들조차 왜구가 됐다. 해금령(海禁令)은 전혀 실효가 없었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됐다. “판자 하나라도 바다에 들어오는 것을 불허했지만, 강 입구를 막을 정도로 큰 배가 들어왔다. 소량의 물건도 외국인이 가져가는 것을 불허했지만, 큰 배는 아이들과 아름다운 비단을 가득 싣고 갔다.”

해적질도 하다보면 실력이 느는 법. 급기야 명나라 말기 해적 정지룡은 황제에게 푸젠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훗날 명나라가 망했을 때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했을 만큼 푸젠의 실력자였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구랑위 섬에서 바라본 샤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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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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