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 안후이성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皖 ‘와호장룡’ 무대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2/3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산월족이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언이다. 제갈각은 300명의 토벌대를 4만 명의 정병으로 불렸지만, 이는 제갈각이 제갈양의 조카답게 재주가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성공이다.

안후이인의 강인함은 청말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중국 남부를 석권했던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것이다. 허페이인 리훙장이 조직한 안후이 의용군인 회군(淮軍)은 증국번의 후난성 의용군인 상군(湘軍)과 쌍벽을 이뤘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전쟁영웅이 된 리훙장은 청의 군권을 장악한 북양대신이 되어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청을 되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훙장을 제외한 다른 성과 세력들은 수수방관했다. 일본이 류궁다오를 점령했을 때 광둥 수군 소속의 배를 접수하자, 광둥에선 청일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배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정황을 보고 어느 서양 평론가는 말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리훙장 한 사람과 전쟁을 한 것이다.”

비록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지만 리훙장은 중국의 근대를 열었다. 그가 주도한 양무운동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무기와 기계의 도입만으로는 중국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청일전쟁으로 밝혀지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고, 그조차 실패하자 아예 신체제 신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정경유착으로 ‘官商’ 별명



또한 리훙장이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조직한 회군은 근대 군벌의 시작이었다. 전란의 시기에 각 지역에서 군벌들이 등장해 일제의 침탈을 견뎌냈고, ‘현대판 초한지’였던 국공내전을 거친 이후에는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국민당이 대만을 차지하게 됐다. 청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조직한 사병(私兵)이 훗날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과 대만을 만들어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수련(양자경)은 표국을 운영한다. 표국은 산적 등으로부터 물건과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며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업체다. 경호업체와 물류업체가 합쳐진 격이다. 물류업에 종사하는 수련은 강호인인 동시에 후이저우 상인, 즉 휘상(徽商)이다.

안후이 남부 후이저우는 산이 많아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은 적고 인구는 많으니 농사 아닌 길로 먹고살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후이저우는 산으로 막혔으면서도 강으로 트여 있었다. 신안강은 전당강으로 이어져 저장성 항저우로 갈 수 있고, 창강(창江)을 통해서는 장시성 파양호로 갈 수 있었다. 또한 후이저우에는 질 좋은 삼나무와 대나무가 많고, 차를 재배하기도 좋았다. 후이저우인은 고향의 특산물인 삼나무, 대나무, 차를 배에 싣고 다른 지역에 가서 장사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장사하는 후이저우인들은 중국의 대표적 상인인 휘상이 됐다. 물론 이런 성장과정은 만만찮아서 “전생에 덕을 쌓지 않으면 후이저우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지를 떠돈다”는 속담이 생겼다.

휘상은 고향 특산물을 내다 파는 보따리 장수로 시작했지만, 자본금과 경험이 쌓이면서 방직, 소금, 금융 등 다방면에 손을 뻗쳤다. 명대(明代)에 “휘상이 없으면 도시를 만들 수 없다[無徽不成鎭]”는 말이 생겼고, 휘주 방언은 중국 금융업계의 공용어가 됐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휘상은 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유상(儒商)이라고도 불렸다. 휘상들의 꿈은 큰돈을 벌고 은퇴해서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고 좋은 집과 사당을 지어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휘주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朱熹, 주희의 고향은 오늘날 푸젠성이지만 당시 휘주는 푸젠성의 일부 영역까지 포함했다). “진상(晉商, 산시 상인)은 관우를 섬기고, 휘상은 주희를 추앙한다.”

휘상이 학문을 장려한 것에는 실용적 목적도 깔려 있었다.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관리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쌓았다. 친해지다보면 작게는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크게는 이권을 챙기거나 불리할 때 보호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휘상은 정경유착을 일찍부터 실현해 관상(官商)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휘상이 건륭제에게 화려한 생일상을 바치자 건륭제는 “부유하도다, 휘상들이여, 짐도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겠노라!”라며 감탄했다.

휘상의 경제력은 휘주 문화도 활짝 꽃피웠다. 휘주 건축양식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영화 ‘와호장룡’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안칭의 가극인 황매희(黃梅戱), 휘주의 가극인 휘극이 탄생했다. 문방사우 생산도 발달해 쉬안청(宣城)의 종이, 서현의 먹과 벼루는 선지(宣紙), 휘묵(徽墨), 흡연(흡硯)으로 불리는 명품이다.

2/3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목록 닫기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