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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집, 글로벌 현장

美 에인절 아일랜드(Angel Island)를 가다

샌프란시스코 ‘천사의 섬’과 나라 잃은 조선인 흔적

  • |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美 에인절 아일랜드(Angel Island)를 가다

  • ● 이민자 배척의 역사가 서린 섬
    ● 일제에 맞선 조선 청년 난민
    ● ‘아모리 미국이 조타 기로 이쳐럼도 구차한가’
    ● 이민국 나무 벽에 새겨진 조선 이름
티뷰론 선착장에서 바라본 에인절 아일랜드(왼쪽) 풍경. 오른쪽 앨커트래즈섬 뒤로 샌프란시스코가 보인다.

티뷰론 선착장에서 바라본 에인절 아일랜드(왼쪽) 풍경. 오른쪽 앨커트래즈섬 뒤로 샌프란시스코가 보인다.

6월 30일 토요일 낮 12시 50분. 미국 샌프란시스코 티뷰론(Tiburon) 선착장엔 10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섬 ‘에인절 아일랜드(Angel Island)’로 가는 여객선을 타려는 이들이었다. 티뷰론에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 정각에 ‘에인절 아일랜드호’가 같은 이름의 섬으로 출발한다. 티뷰론을 떠나 에인절 아일랜드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5분. 바다만 없다면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깝다. 

에인절 아일랜드는 면적이 3.1㎢로 서울 여의도(2.9㎢)와 비슷하다. 섬 주위를 둘러 조성돼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섬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은 천사에 비견될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옆으로 내려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에는 돛을 올린 요트와 모터보트 10여 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천사의 섬에 건설된 미국 이민국

그러나 19세기 말 이 섬은 미국에 오려던 수많은 이의 발걸음을 돌려세운 이민국이 있던 곳이다. 1891년 에인절 아일랜드 선착장에 미국 연방정부 검역소가 문을 열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오는 선박은 이곳에서 짐 소독 과정을 거쳐야 했다. 승선한 사람도 대부분 콜레라, 페스트, 황열병 등의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검사받았다. 문제가 있으면 검역소에 세워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병을 전파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은 뒤에야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가기는 더 어려웠다. 에인절 아일랜드 왼쪽 비탈진 언덕 아래에는 낡고 오래된 2층 건물이 있다. 1910~1940년 이민국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이민자가 세운 나라인 미국은 건국 초기 이민에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1875년 이민자 규제를 규정한 ‘아시안 배척법(Asian Exclusion Act)’에 이어 1882년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하며 이민 규제를 강화했다. 1873년 장기 불황이 시작되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하던 때다. 

당시 이민 규제의 주요 대상은 법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시아인, 특히 중국인이었다. 1910년 미국 전역에서 운영된 이민국 사무실은 모두 19곳이었는데, 태평양을 거쳐 오는 사람 대부분은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을 거쳤다. ‘천사의 섬’ 이민국은 최대한 많은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중국인의 입국을 거부하고자 만든 장소였던 셈이다. 이 공간은 입국 허가 또는 거부 결정이 날 때까지 그들을 사실상 가둬두는 수용시설로도 쓰였다. 

그런 까닭에 에인절 아일랜드는 미국의 이민자 차별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로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공영방송 PBS는 5월 말 에인절 아일랜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중국인 배척법’을 방영하기도 했다.


난민이 된 조선 청년의 초상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샤워장 나무벽에 새겨져 있는 중국인 이민자의 시. 1970년 이 시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이 건물에서는 총 200여 편의 중국어 시가 발굴됐다.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샤워장 나무벽에 새겨져 있는 중국인 이민자의 시. 1970년 이 시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이 건물에서는 총 200여 편의 중국어 시가 발굴됐다.

우리에게 에인절 아일랜드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건 이 섬에 당시 ‘나라 잃은 백성’이던 조선인의 흔적 또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한 선박 ‘몽골리아’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한 건 1913년 7월 9일. 중국인이 대부분이던 승객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 지척에 있는 에인절 아일랜드로 옮겨졌다. 당시 중국인 승객 사이엔 조선인 청년도 6명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학생이라고 밝혔지만 학생임을 증명할 서류는 물론 여권조차 없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했지만 청년들은 자신들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 조선 청년이 이민국 심사관 앞에 섰다. 

“왜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것인가?” 

“나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기 전에 조선을 떠났소. 그러니 나는 일본 국민이 아니오.” 

“그럼 당신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나라 없는 사람(a man without a country)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나라 없는 사람이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에서 취조를 받은 최초의 조선인 학생 난민이었다. 에리카 리 미네소타대(University of Minnesota) 교수와 주디 융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UC Santa Cruz) 교수의 저서 ‘에인절 아일랜드(Angel Island)’에는 이들 조선인 난민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두 교수는 모두 에인절 아일랜드에 수용됐던 중국인 이민자의 딸로 아시아인 이민자의 역사를 연구해왔다. 

두 학자가 신한민보를 인용해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학생 6명 중 4명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돼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다 가까스로 탈출한 독립운동가였다. 신한민보는 미주 한인들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하고 조국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인 대한인국민회(KNA)가 매주 발행한 신문이었다. 단체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여권, 비자, 학생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 넉넉한 자금 등이 없던 이들이 쉽게 입국 허가를 받았을 리 없다. 게다가 여섯 명 모두 십이지장충에 감염된 상태였다. 당시 십이지장충 감염자는 추방이 가능했다. 다만 그들에겐 ‘가족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들의 생활비를 댈 여력이 충분하며,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해왔다. 특별히 (입국 허가를) 고려해달라’는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의 추천서가 있었다. 또 대한인국민회가 그들의 미국 체류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 덕에 조선인 청년 난민 여섯 명은 병원 치료를 받은 뒤 한 달 만에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들은 운이 좋은 경우였다. 이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가 ‘일본 여권이 없는 조선인의 미국 입국을 허용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에 발맞춰 미국 정부가 조선인에 대한 심사를 점점 강화하면서 조선인 입국자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1917년 7월엔 아예 조선인 이민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여권은 없었지만 학생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와 추천서를 들고 온 조선인 학생 14명은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미국 의회가 1924년 아시아인 입국은 금지하되 학생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소지하고 미국 재외공관에서 비자를 받은 아시아인 학생은 예외로 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300명가량의 조선인이 미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에리카 리, 주디 융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 시절 에인절 아일랜드를 거쳐간 조선인은 가까스로 미국에 입국한 6명의 청년 난민을 포함해 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나무 벽에는 당시 이곳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몇 주, 몇 개월, 길게는 2년까지 섬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들(주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잠자고 생활하던 건물 벽에 새겨둔 시 같은 것이다. 한 중국인이 쓴 시 내용은 이렇다.

‘림(林), 미국에 도착해서/ 붙잡히고 나무 건물에 수용됐고/ 그리고 죄수가 됐네/ 벌써 이곳에서 가을 동안 있었다네/ 미국인들은 내 입국을 거부했네/ 나는 추방 명령을 받았다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겁이 났고 내 나라로 돌아갈 일이 걱정됐네/ 힘 없는 나라 중국의 백성인 우리는/ 자유가 없음에 그저 한숨만 쉴 수 있네.’


‘만리 대양 지틴 손’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2층 숙소 중앙 기둥에서 발견된 한국어. ‘류인발, 구월륙일’이라고 쓰여 있다(위). 
같은 건물 1층에는 과거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 여성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아래 진열된 가방은 당시 조선인 여성 일행의 여행가방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2층 숙소 중앙 기둥에서 발견된 한국어. ‘류인발, 구월륙일’이라고 쓰여 있다(위). 같은 건물 1층에는 과거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 여성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아래 진열된 가방은 당시 조선인 여성 일행의 여행가방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벽에서 우리말로 새긴 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섬에 머물던 조선인이 쓴 시가 이후 신한민보에 게재된 적은 있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서 중국문학을 연구하는 찰스 이간 교수가 발굴한 조선인 유학생 최경식 씨의 시 ‘이민국일야’다. 최씨는 1925년 에인절 아일랜드에 들어와 심사를 거쳐 입국 허가를 받았다. 당시 그는 조선기독대학(현 연세대)을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한 대학 입학 허가를 받은 유학생이었다. 그는 이 섬에서 이런 시를 썼다.

‘만리 대양 지틴 손을/ 철창 장이 웬 일이며/ 소리 내여 우는 비가/ 안타까히 깨우단 말가/ 깁히 잠든 텬사 셤아/ 내 노래를 듯나 마나/ 일쳔 강장 타오르는/ 이국 고객의 푸념일세/ 아모리 미국이 조타 기로/ 이쳐럼도 구차한가/ 내 어머님 알고 보면/ 얼마나 놀나실가/ 망죵들이 쟉란해논/ 국경 이란 언졔 부심고/ 셰게 동포 인류 형데/ 하로 밧비 되고 지고. 사월 삼일 미국 상항 텬사셤 이민국에셔비오는 밤에 최경식’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 건물 2층에는 또 다른 조선인의 흔적도 남아 있다. 군용 이층침대가 놓인 숙소 중앙 기둥에 세로로 새겨둔 문구다. 

‘류인발, 구월륙일.’ 

누군가의 이름과 날짜로 추정된다. 사전 조사를 통해 숙소 기둥 한 곳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공원 직원에게 물었다. 하지만 30여 명의 방문객을 이끌고 이민국 곳곳을 설명하던 공원 직원 리처드 할아버지는 “글쎄, 그런 게 있어? 미안하지만 나는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출입제한 탓에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 문구를 찾아낸 건 가져간 카메라 렌즈의 성능 덕분이었다. 

에인절 아일랜드 이민국에서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한 조선인 여성의 흔적이다. 여성 이민자 물품이 보관돼 있는 1층 숙소엔 1914년 두 딸과 함께 온 조선인 여성의 사진이 ‘KOREA’라는 영문과 함께 인쇄돼 있다. 사진 바로 밑엔 당시 그들이 가져온 여행 가방을 재현한 가방도 놓여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 일본 여권을 발급받아 온 데다 미국에서 식구들이 살 만한 경제적 여건도 갖춘 것으로 판정받아 미국 땅을 밟았다고 한다. 

오후 4시 20분, 이민국 건물을 나와 다시 티뷰론으로 돌아가는 에인절 아일랜드호에 올랐다. 바다 건너 샌프란시스코는 섬에 들어올 때와 달리 안개에 가려 있었다. 안개가 자주 끼어 ‘안개도시(Fog City)’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새로운 삶을 위해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왔던 1000여 명의 조선인도 이 안개를 헤치며 도착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미국에선 ‘천사의 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동아 2018년 8월 호

|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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