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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상하이

부자도시의 열등감 국제도시의 고단함

沪 아편전쟁이 바꿔놓은 어촌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부자도시의 열등감 국제도시의 고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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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이에서 눈치 없는 말을 하면 “너 외지인이지?”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만큼 상하이인들은 자신을 중국과는 별개의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고 이 첨단 도시의 삶이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상하이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50년을 모아야 한다.
부자도시의 열등감 국제도시의 고단함
“어떻게 여기서 여자친구를 만들 수 있지?”

상하이 인민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서양 친구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훙커우 공원,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지? 녀석은 인민공원에 가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 밖의 구체적인 정보는 전혀 몰랐다. 그저 소문 하나만 듣고 오다니! 서양인의 모험정신과 연애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100년 전 서양인들도 일확천금의 소문만 믿고 상하이를 찾았겠지.

‘절대甲’ 상하이 호구

하여튼 신기한 얘기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여러 게시물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게시물에는 사람들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다. 이름, 나이, 학력, 경력, 키 등등. “여기는 그저 인력시장 같은데? 직업 구하는 사람들의 정보 같아.” 이렇게 말하자마자 불현듯 깨달았다. 인력시장은 인력시장인데, 노동력이 아니라 배우자를 구하는 거라면? 저 많은 정보가 결혼 정보라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중매쟁이라면?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다.

다시 찬찬히 게시물을 훑어봤다.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호구다. 상하이 여자는 ‘후뉘’로 따로 분류했고, 다른 지역 여자는 호구 말고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창저우의 재주 있는 여자(常州才女)’는 피아노 10급이고 전국청년성악 1등상을 탔다. 아버지는 ‘외지’의 공안, 어머니는 정부의 부국장으로 집안도 빵빵하다. 저장성 여자는 부모가 사업가로 집도 있고 차도 있다며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물론 나이가 제법 많은 여자들도 있지만, 조건 좋은 20대 초반 여자도 많았다. 중국 여자는 대체로 20대 중반에 결혼한다.

부자도시의 열등감 국제도시의 고단함
신랑감 후보 역시 상하이 호구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외지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건 당연했다. 상하이 호구를 얻기 위해서니까. 의외는, 상하이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거였다. 이 경우는 호구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상하이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상하이 여자들의 고집이 읽힌다.

결혼시장에서 상하이 호구, 상하이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 그 서양 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중국 여자들이 남자친구가 아니라 진지하게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것에 우선 실망. 그리고 콧대 높은 중국 여자들의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없어 절망했지.

상하이의 약칭은 ‘강 이름 호’자다. 송강(松江) 하류 지역인 상하이를 지칭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통발을 뜻한다. 물고기를 잡고 살던 어촌. 바로 최첨단 국제도시 상하이가 지닌 ‘출생의 비밀’이다.

전쟁이 선물한 번영

‘삼국지연의’의 애독자라면 송강농어라는 말이 귀에 익을 것이다. 조조가 잔치를 열었을 때 불청객 도사 좌자가 나타나 “잔치라면 송강농어 정도의 별미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딴지를 걸었다. 동진의 대사마(국방부 장관) 장한(張翰)은 고향의 농어가 그리워 낙양의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때 장한은 “가을바람 불어와 경치 아름다울 때, 오강에는 농어가 살찐다네(秋風起兮佳景時, 吳江水兮魚肥)”라고 노래했다.

송강농어는 송강의 자랑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오늘날의 초거대 국제도시 상하이는 원래 농어밖에 자랑할 게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청나라 말기까지 상하이에는 열 갈래의 도로밖에 없었고, 인근의 쑤저우가 중심이라 ‘작은 쑤저우(小蘇州)’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상하이의 발전은 아편전쟁(1840~42)에서 비롯됐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상 그 자유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아먹을 자유였다. 영국 국회가 아편전쟁에 대한 결의안을 논의할 때 토리당원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릴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의회 투표 결과는 찬성 271표 대 반대 262표. 아홉 표 차이로 아편전쟁 결의안이 통과되자 글래드스톤은 “262… 영국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라고 한탄했다.

영국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으로 청군을 격파하고, 난징조약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조계지를 얻었다. 영국은 난징조약을 기념해 상하이 중심가를 난징루(南京路)라고 이름 붙였다. 치욕의 이름이지만 난징루는 세계적인 번화가로 성장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인 아편전쟁은 상하이의 개항과 번영을 가져왔다.

개방 후 20년도 안 돼 상하이 수출액은 중국 무역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1870년에 이르니 중국 최초이자 최대의 무역 항구인 광저우는 상하이에 비하면 구멍가게처럼 보이게 됐다. 당시 광저우가 중국 무역의 13%에 머무른 반면, 상하이는 63%로 중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상하이는 전기, 수도, 전차, 가스등 등 최첨단 기술과 문물을 서양과 거의 동시에 도입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지 반 년 만에 상하이도 영화를 상영했다. 1930년대 상하이 사람들은 재즈를 들으며 댄스홀에서 찰스턴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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