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 후난성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湘 ‘중국의 스파르타’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1/4
  • 후난은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고향이다. 마오의 불같은 성미는 ‘적과 싸울 때도 칼을 쓰고, 친구를 사귈 때도 칼을 쓴다’는 후난의 후예답다. 이런 저항정신은 오늘날 후난에도 살아 있다. ‘마오의 박물관’ 창사 박물관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을 버젓이 전시한다.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펑황고성의 뱃사공.

라메이즈 라~ 라메이즈 라~ 라메이즈~ 라메이즈~ 랄랄라~(辣妹子辣,辣妹子辣,辣妹子,辣妹子,辣辣辣)”

가무잡잡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날씬한 몸매, 섹시한 건강미를 물씬 풍기는 후난 아가씨가 경쾌하게 노래한다. “후난 아가씨는 매워, 후난 아가씨는 맵지, 후난 아가씨는 맵고 화끈하고 열정적이라네.”

마오쩌둥이 “고추를 안 먹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不吃辣椒不革命)”고 했을 정도로 후난인은 매운 것을 즐겨 먹는다. 네 줄기 강물이 교차하는 쓰촨(四川)의 아가씨가 촨메이즈(川妹子)라 불리듯이, 후난 아가씨는 라메이즈(辣妹子)라고 불린다. 공교롭게도 ‘매울 랄(辣)’은 경쾌한 유성음이라 노래의 맛을 한껏 살린다. 랄랄라!



중원의 밖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후난(湖南)성의 약칭은 ‘강 이름 상(湘)’자다. 후난성은 중국 최대의 호수이던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있고, 장강 최대의 지류인 상강(湘江)이 흐르는 땅이다. 중국 남부답게 산지가 많아 서북쪽은 무릉산맥, 서쪽은 설봉산맥, 동·남쪽은 남령산맥으로 둘러싸였다. 평야지대는 총면적의 20%에 불과하지만, 동정호와 상강의 풍부한 물이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다.

“후난에 벼꽃이 피면 천하의 기근이 끝난다”고 할 만큼 후난의 농업생산력은 높았다. 북방인이 아침에 꽈배기튀김이나 죽으로 끼니를 때울 때, 후난인은 아침부터 쌀밥을 든든하게 먹었다. 현대사회의 번잡함이 후난을 지배하기 전까지 후난에서 아침에 죽을 먹는다는 건 삼시세끼 먹을 쌀이 없을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었다. 중국에서 쌀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답게 쌀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런 풍족함은 훗날 개발된 후에야 진가를 발휘한다. 애초에 초나라의 중심이던 후베이(湖北)성부터가 중원과는 판이한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후베이는 중원과 맞붙고 교통이 편리해 중원과 교류하며 상당 부분 닮아갔으나, 후난은 멀고먼 변방이요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미개척지였다. 후난성에 중국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인 형산(衡山)이 있다. 오악은 중원의 세력권 범위를 상징한다. 즉 후난성의 중간인 형산 지역까지는 중원의 세력이 가까스로 미치지만, 그 아래로는 세상의 바깥(世外)이었다.

오지(奧地) 후난은 유배와 피난으로 이곳까지 흘러든 이들에게 비탄과 수심을 더했다. 초나라 충신 굴원은 후난에 유배되자 “세상은 취해 있는데 혼자서만 깨어 있다”고 노래하며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고,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 외롭고 고단한 신세를 한탄했다. “가족과 벗에게서도 소식 한 글자 없고, 늙고 병든 몸이 의지할 것은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미개척지 후난에 대한 두려움은 남송시대 시인 엄우(嚴羽)의 노래 ‘답우인(答友人)’에서도 드러난다. “상강의 남쪽으로 가면 다니는 사람 없으니, 장우만연으로 흰 풀이 난다네(湘江南去少人行, 瘴雨蠻烟白草生).” 장우만연(瘴雨蠻烟)이란 남방 오랑캐 땅의 독기 서린 연기와 비를 일컫는 말이다. 멀쩡하던 장정들이 후난에만 가면 별다른 이유 없이 픽픽 쓰러지니 중원인들은 남방 땅에 독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개척지인지라 정글의 모기와 벌레가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옮겼기 때문이리라. 중국 전역에서 개발이 상당히 진척된 남송시대까지도 후난은 중원인에게 경외의 땅이었다.



人傑의 요람

이 거친 땅에 일찍이 정착한 이들은 먀오족(苗族)이다. 중원의 황제(黃帝) 세력에 밀려난 동이(東夷)의 치우 세력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중원인에게는 세상의 밖이었지만, 먀오족에겐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산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산 속의 풍부한 물은 곡창지대를 가져다줬다.

먀오족이 정착한 후난에 남방의 맹주 초나라가 나타났다. 그러나 초나라의 중심은 후베이였고, 후난은 아직 유배지로 활용됐다. 여기 사람들은 상강의 지류 멱라강에 몸을 던진 굴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물고기가 그의 시신을 먹지 않도록 강에 밥을 퍼부었다. 이 활동은 오늘날 단오제(端午節)가 됐다고 전한다.

한나라는 후베이와 후난을 형주(荊州)로 묶었다. 당시 형주의 중심은 양양과 강릉 등 후베이 지역이었고, 미개척지 후난은 남형주로 따로 불리기도 했다. 미개척 상태에서도 후난의 생산력은 이미 돋보였다.

사마상여는 ‘자허부’에서 “운몽(雲夢, 초나라의 큰 연못 7개 중 하나)은 사방 900리에 이르고, 들짐승과 물고기, 온갖 산물이 말할 수 없이 풍부하다” 했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사(長沙)는 초의 곡창”이라 했다. 장사는 오늘날 후난의 성도(省都)인 창사다.

후한 말 동오의 손견은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장사 태수로 임명돼 관록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탁 타도 등 중원의 일에 신경 쓰느라 장사에서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난세에 형주를 평화롭게 지킨 유표가 죽은 뒤, 삼국지 3대 주인공인 유비·조조·손권이 형주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인다. 후베이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고 주유와 조인이 강릉 공방전을 벌이는 등, 후난의 지배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유비가 형남(荊南) 4군에 손을 뻗쳤다. 조운은 영릉·계양,장비는 무릉을 차지한다. 관우는 황충과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장사를 장악하고 맹장 황충과 위연을 얻는다. 위와 오가 강릉에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유비는 재빨리 형남 4군을 석권한 것이다.

손권은 이릉대전으로 유비를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한 후 동정호에 수군 조련을 감독하기 위한 누각 악양루(岳陽樓)를 세운다. 그러나 이후 남형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4대 거점인 형남 4군 이외에는 먀오족 등 원주민의 세력이 강해 실질적인 지배력이 곳곳에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

중국 전역이 개발되고 교통·무역로가 발달하면서 후난도 점차 중요해진다. 후난은 영남(광둥·광시성) 지역과 중원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후난은 개발되면서 더욱 풍요로워져 호상(湖湘) 문화가 피어난다. 창사의 악록서원은 송나라 주자와 명나라 왕양명이 가르침을 편 곳이다. 송·명을 주름잡은 유학자들이 성리학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초나라의 인재들, 이때부터 성하였다(惟楚有材,於斯爲盛)”라는 악록서원의 자부심이 부끄럽지 않다. 명나라 최고의 명재상 장거정,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해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증국번,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등 명·청·현대를 주름잡은 인물이 후난에서 나왔다.


1/4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댓글 창 닫기

2018/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