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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허베이성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冀 - ‘800년 수도권’의 비애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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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의 아이콘

형가는 안타깝게도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형가는 칼 한 자루로 강포한 권력과 맞서는 ‘협객(俠客)의 아이콘’이 됐고, 그의 노래는 ‘비분강개의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최약체로서 최강의 심장을 대담하게 노린 허베이는 ‘비분강개하는 장사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허베이 협객은 후한 말 난세에 빛을 발했다. 일세의 효웅(梟雄)인 유비와 연인(燕人) 장비는 탁현 출신이고, 조운은 상산(常山) 출신이다. 굳센 의리로 똘똘 뭉친 이들은 맨 몸으로 당대의 군웅과 치열히 싸웠고 끝내는 나라를 연다.

다만 ‘흙수저’이던 이들이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허베이를 지배한 영웅은 ‘금수저’인 원소였다. 원소는 후한 말 최고의 명문인 원씨 가문의 수장인 데다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 당대 군웅 중 으뜸이었다. 그런 원소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 허베이다. 청년 원소는 절친한 친구인 조조에게 자신의 야망을 밝혔다.

“나는 허베이를 근거로 하여, 연(燕)과 대(代)로 울타리를 삼고, 북으로 사막에 흩어져 사는 무리까지 아우른 뒤에 다시 남쪽으로 천하를 다툴 작정이네.”

그러자 조조는 당차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슬기와 힘을 모아 도리에 맞게 다스려 가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하필 땅의 위치나 넓이겠는가.”

말은 통쾌했지만, 원소는 확실히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다. 기주에서 착실히 힘을 기른 원소는 물량과 보급에서 조조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원소의 참모 허유의 기밀 정보 덕분에 조조는 원소의 보급을 끊고 승리한다. 승전 후 원소 진영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건함이 나오자 조조는 문서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며 말했다.

“원소가 강성할 때에는 나조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흔들렸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느냐?”

그만큼 조조의 승리는 본인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인 관도대전에서 이긴 조조는 원소 대신 중국의 최강자로 자리를 굳혔다.



안에서 무너진 산해관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산해관 부근의 연새호(燕塞湖). 댐이자 저수지, 관광지 역할을 한다.

중국의 역사는 중원 중심의 역사다. 난세가 끝나자 허베이는 동북 변방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이 강성해지면 중원을 뒤흔들 거라던 곽가의 예측은 5호16국과 요·금·원 등 유목민족의 제국을 통해 실현된다.

북방 이민족들이 패권을 잡자 허베이는 매우 중요해진다. 허베이가 유목민족의 근거지인 북방과 가깝고, 한족문화권으로서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으며, 남방 공략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후 현재까지 800년 동안 줄곧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이 됐고, 자연스레 허베이는 ‘800년 수도권’이었다.

수도는 나라의 심장이다. 단 한순간도 기능이 멎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도권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의 방패가 돼야 했다. 산과 바다를 연결하며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천하제일관 산해관(天下第一關 山海關)이 단적인 예다. 산해관은 동쪽으로는 태양을 맞이하고(旭迎), 서쪽으로 베이징에 조배를 드리며(京朝), 남쪽으로 바다와 통하며(通海), 북으로 첩첩이 이어진 산을 바라보는(巒觀) 요충지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보며 찬탄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將臺)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른다.”

한창 떠오르는 태양 같던 기세의 청나라도 자력으로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 산해관이 청의 맹공을 버티는 동안, 산시(陝西)의 풍운아 이자성은 민란을 일으키고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어이없게도 이자성은 베이징을 불 지르고 약탈해 민심을 잃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인 후 이자성에게 패배를 안겼다. 산해관을 넘은 청군은 중국 전역을 석권한다. ‘위엄이 중국과 오랑캐를 누른다(威鎭華夷)’던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내부에서 무너졌다.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신하들은 장성을 수리해 베이징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반대했다.

“역대 중국 왕조 모두 백성을 고생시켜가며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 내란이 일어나 망했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두가 합심하면 견고한 성과 같이 허물어지지 않는다(衆志成城))는 말처럼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국토 수호라는 주장이었다. 영명한 황제 강희제는 아름다운 대의명분과 실질적인 대안을 조화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겨 우리에게도 친숙한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바로 강희제의 만리장성이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들이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피서산장은 국제외교와 합동 군사훈련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피서산장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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