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밀착분석

‘세컨더리 보이콧’ 칼갈이 미·중 치킨게임 시작됐다

‘이단아 트럼프’의 도발적 행보

  • 황일도 | 화정평화재단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6-12-20 17: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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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통령선거 후 곳곳에서 울리는 시그널이 심상치 않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21호 채택과 함께, 오바마 행정부가 공들여 만들고도 휘둘러보지 못한 대중(對中) 간접제재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워싱턴 조야에 들끓는다. 갈등을 불사해서라도, 혹은 갈등을 유발해서라도 미중 관계의 주도권을 차지하겠다는 새 백악관 주인의 히든카드가 대북 압박일지 모른다는 우려도 쏟아진다.
    중국은행(Bank of China). 지금은 중국인민은행에 자리를 내줬지만, 한때 중화민국의 국책은행이던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은행이다. 이용자 수 3억9000만 명, 자산 규모 세계 10위권으로, 이 은행 홍콩지점은 홍콩과 마카오의 발권은행 기능도 담당한다. 공상은행, 교통은행 등과 함께 흔히 중국 5대 국유은행으로 통칭되는, 명실 공히 중화권을 대표하는 금융회사 중 하나다.



    못 꺼내 든 날카로운 칼

    2013년 7월 북한 선박 청천강호는 쿠바에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북한으로 가던 중 설탕포대 밑에 미그기 동체와 미사일 부품 등을 숨긴 것이 적발돼 파나마 당국에 7개월간 억류됐다. 이후 진행된 유엔 안보리 차원의 조사는 싱가포르 해운업체가 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싱가포르 정부는 2014년 6월 연루된 자국업체 관계자를 기소했다.

    문제는 이 해운업체와 북한의 자금 거래를 처리해준 은행이 바로 중국은행이라는 사실. 유엔 대북제재의 기본 골격에 따르면 중국은행 역시 사법 책임을 피해가기 어렵지만,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이와 관련해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2016년 2월 10일 미국 연방 상원은 ‘북한 제재와 정책 강화 법안(North Korea Sanctions and Policy Enhancement Act)’을 통과시켰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및 사치품 관련 거래에 연루된 제3국 기업이나 개인 금융기관을 제재 대상으로 지목해 미국 기업이나 은행이 아예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개념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법안 통과 후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오바마 행정부는 이 정책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다. 가장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도 휘둘러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이를 본격 가동할 경우 자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재무부 등 미국 정부 내에서 거듭 제기돼왔기 때문. 적잖은 전문가가 ‘말로만 을러댔을 뿐 실제 적용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2016년 9월 무렵 대북 핵 물자 수출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된 중국 기업 랴오닝훙샹그룹에 대해 미국 정부가 제재를 선언한 것을 두고 ‘세컨더리 보이콧 본격화’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수출 당사자인 훙샹에 대한 제재는 직접 제재일 뿐 세컨더리 보이콧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미국이 중국은행에 이 칼을 들이민다면 어떻게 될까. 2005년 마카오 소재 소규모 은행이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미국 재무부의 자금세탁 관련 제재가 이후 어떤 파장을 남겼는지 돌이켜볼 때, 자산 규모가 173조 원(2013년 기준)에 달하는 중국은행을 상대로 비슷한 제재가 이뤄질 경우 그 후폭풍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 은행이 달러화 결제를 못한다면 중화권 경제 전체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고, 2014년 기준으로 5550억 달러(약 670조4000억 원)를 넘어선 미중 교역도 심대한 타격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겉으로는 서슬 퍼래 보이던 오바마 행정부가 칼을 꺼내 들지 못한 이유다.



    “판이 바뀌었다”

    관점을 바꿔보자. 만일 백악관이 중국에 대한 고강도 압박을 계획한다면, 미중 교역의 중심축을 흔드는 시나리오를 원한다면, 이를 통해 중국과의 갈등을 본격화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세컨더리 보이콧은 가장 훌륭한 카드 중 하나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단서는 나왔지만 후폭풍을 우려해 꺼내놓지 않은 모든 중국 주요 기업의 대북제재 위반 사례를 단죄하겠다고 나설 경우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순식간에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쯤에서 눈치 챘겠지만,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전임자와 달리 이러한 상황 전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 어쩌면 미중 간의 갈등 고조를 내심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징후마저 속속 감지된다. 한마디로 ‘판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트럼프 당선인이 그간 중국의 무역이나 환율정책과 관련해 쏟아놓은 비판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대선 과정에서는 중국의 환율 조작, 불법 수출보조금 지급, 대미 무역 흑자 등을 문제 삼으며 중국산 제품에 4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고, 당선된 이후에도 외교·안보 라인 주요 직위 하마평에 반중(反中)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인사들이 줄줄이 거론됐다. 심지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우정을 과시한 것조차 중국을 외톨이로 만들겠다는 계산에 따른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정도. 그간에도 남중국해, 통상,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등을 놓고 충돌한 두 나라 사이의 대립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격화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오라스콤 회장 사임의 비밀

    2010년 한국 등 다른 나라들이 북한과의 교역을 중단한 이래, 사실상 독점 수입국이 된 중국은 북한산 원자재를 국제시세보다 헐값에 사들여 상당한 이득을 챙겨왔기 때문. 이쯤 되면 5차 핵실험 이후 이번 제재결의 합의까지 미국과 중국이 80일이 넘는 줄다리기를 거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간의 북중 교역 관행에 쐐기를 박을 수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제대로 실행될 수 있느냐’다. 2321호가 규정한 수입 보고 의무를 최대 수입국인 중국이 주로 질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안보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중국이 이를 얼마나 제대로 집계하는지 확인할 수단이 없다.

    중국 세관이 매달 발표하는 데이터에는 2014년 1월부터 대북 원유 수출이 ‘0’으로 잡혀 있지만, 비공식 계정을 통해 이전과 다름없는 물량의 원유 지원이 이뤄지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석탄 수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장부에서만 지운다 해도 밖에서는 검증할 방법도, 처벌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워싱턴이 과연 이를 모르고 이번 제재안에 합의했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할 또 하나의 시그널이 있다. 북한 휴대전화 사업을 주관해온 오라스콤(Orascom)의 최근 행보다. 8년 전 이동통신 독점 사업권을 따내 고려링크라는 회사를 설립한 뒤 240만 대가 넘는 휴대전화 시장을 만들어낸 당사자다. 쟁점은 이집트에 기반을 둔 이 다국적회사의 대표이자 북한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나기브 사위리스 회장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 지분 구조가 복잡하긴 하지만 주요 투자자 역시 미국인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게 해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 압박에 앞선 ‘집안 단속’

    엄밀히 말해 고려링크는 오라스콤이 지분 75%, 북한 체신성이 세운 조선체신회사가 지분 25%를 가진 합작회사다. 2010년 발효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제재 행정명령 제13551호는 ‘북한 당국이나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는 기관이나 조직과의 상업적 거래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북한과 오라스콤의 합작사업이 큰 성공을 거둬온 8년간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심지어 오라스콤의 일부 계열사는 같은 기간에 미국 국방부와 계약해 납품했다는 기록도 있다. 미국이 겉으로는 제재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 관련 기업의 대북 활동조차 방관한다는 비판이 쏟아진 배경이다.

    제재결의 2321호가 통과된 직후인 12월 4일 오라스콤은 “사위리스 회장이 2017년 1월 1일부로 회장직을 사임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임의 이유는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하루 전에는 북한 내 금융 자회사인 오라뱅크를 미국 해외자산통제국의 제재로 폐쇄하기로 했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미국 재부무 해외자산통제국(OFAC)을 비롯한 실무 부처가 본격적인 대북제재로 중국을 압박하기에 앞서 ‘집안 단속’부터 실시한 결과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혹은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본격화할 압력을 의식한 오라스콤의 선제행동일 개연성도 충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로써 미국 정부가 그간 고조돼온 ‘이중잣대’ 비판을 해소해 명분상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는 점. 중국은행 같은 초대형 기업을 상대로 세컨더리 보이콧을 본격 가동할 경우 ‘미국 기업인은 놔두고 왜 우리만 갖고 난리냐’고 중국 측이 반발할 근거를 제거한 셈이다.

    이번 제재결의 2321호가 본격 가동된다 해도, 심지어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중국을 압박한다 해도 북한이 핵 개발 행보를 멈출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베이징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북중 밀착이 더 공고해질 것이라는 예상마저 나오는 형국.

    12월 5일 워싱턴의 대표적인 안보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세미나에 참석한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활용할 경우 중국이 이에 대한 보복에 나설 수 있고, 여기에 미국이 또다시 반발하는 식의 ‘치킨게임’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대북제재 본격화에 얽힌 트럼프 행정부의 진짜 속내는 북핵 문제 해결보다는 ‘미중 관계 재조정 과정에서의 주도권 장악’일지 모른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표류하는 한국

    12월 2일 트럼프 당선인은 그간 철칙처럼 여겨져온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깨고 직접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전화통화를 하는 파격 행보에 나섰다. 중국 관영 언론의 즉각적인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정작 트럼프 본인은 트위터를 통해 “중국은 위안화 평가절하나 미국 제품에 대한 세금 부과, 남중국해 군사시설 설치 때 우리에게 괜찮겠냐고 미리 물어봤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정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태평양 전체에 걸쳐 갈등의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어느새 한반도는 미중 대립의 주무대로 떠올랐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은 외교 컨트롤타워를 잃은 채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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