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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새 세기를 맞으며

성장신화는 이제 그만, 그늘의 진실’을 보자

  • 이정우 철학자·시인

성장신화는 이제 그만, 그늘의 진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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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기보다는, 특정한 발견이나 발명을 통해 대중 위에 우뚝 서려고 애쓰기보다는, 20세기의 화려한 문명이 남겨놓은 그 숱한 쓰레기, 상처, 고통을 돌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이제 그만! 제발 그만 가자고, 잠시 숨을 돌리고 성장에로의 질주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 돌아보자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20세기는 성장의 세기였고, 또 (발전이 아닌) 발달의 시기였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강하게”를 추구한 세기였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전통 사회와 20세기의 현대 사회를 가르는 차이는 이런 급격한 성장·발달의 도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높이 올라간 성장의 수치 아래에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물질문명의 일방적 확대, 제국주의, 파시즘, 좌우 대립이 남긴 상처, 인간의 대상화, 소외, 규격화, 그리고 문화와 교육의 황폐화 같은 쓰레기 말이다.

앞으로의 시대에 던져진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뒤를 돌아보는 것,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거대하게 쌓여 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것, 새로운 창조에 몰두하기보다는 지나간 시간이 배태한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것, 요컨대 성장의 빛보다 그 빛이 만들어낸 그늘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리라. 우리 시대는 성장보다 치유를 갈구한다.

모든 것을 해체시킨 디지털 기술

20세기는 무엇보다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이 현저하게 달라진 시대였다. 17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 인식이 19세기에 이르러 실질적인 물질적 변화를 야기시킨 것이다. 17세기 과학 혁명은 ‘함수’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과학은 사물의 운동에서 양화(量化)가 가능한 측면만을 뽑아낸다. 그 기법으로서 분석과 측정이 동원된다. 이렇게 추상화된 양들 사이에 성립하는 일정한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과학적 세계 인식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때의 관계란 정적인 공간의 관계가 아니라 동적인 시간의 관계다. 즉, 함수란 서로 상관적으로 변화하는 양들 사이에 시간을 매개변수로 해서 관계를 설정하는 기법이다.

함수는 시간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 시간에 일정한 함수값을 대입하면 그 시간에서의 운동 상태가 도출된다. 이것이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근대 과학은 사물을 양화·분석하고, 그 결과를 함수로 표시하고, 함수를 사용해 사물의 운동을 예측하게 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19세기에 이르러 17세기의 과학 혁명이 기계 조작에 직접 응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낭만주의자들은 세계의 기계화에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얄궂게도 19세기의 기계 문명은 차라리 낭만적으로 보인다. 초보적인 기계들을 사용한 자동차나 배, 농기구 등을 보면서 우리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낀다.

20세기에 이루어진 기술 문명은 19세기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편으로 현대 기술문명은 기계적 차원이 아니라 전자적(電子的) 차원의 기술이며, 다른 한편으로 물체를 조작하는 기술이 아니라 생명체를 조작하는 기술이다.

전자적 조작은 디지털 혁명에 의해서 선명하게 그 얼굴을 드러냈다. 디지털 기술은 모든 사물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배합한다. 모든 것이, 레고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듯이 재편성된다. 인류가 몇 만년, 몇 십만년 동안 친숙하게 보아왔던, 그리고 그와 달리 존재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이 세계,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개체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이제 산산이 해체되려 하고 있다.

이제 하나하나의 개체가 각자의 본질·정체성을 가지고서 영원의 상하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생각은 무너진다. 모든 형태의 배합과 조작이 가능해진다. 하늘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이(理)의 체계는 와해되고 모든 것이 기(氣)의 바다로 녹아들어갔다가 다시 재편성된다. 이러한 기술이 시뮬레이션이나 영상(映像)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실질적 사물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때 생겨날 가공할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바야흐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욕망의 삼각형’을 제어하라

기계는 인간의 바깥에 있다. 인간이 아무리 기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해도, 기계들이 자신의 바깥에 있는 한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대상, 환경, 도구의 차원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생명체 자체가 기계처럼 측정되고 조작되고 해체되고 재조립되기 시작한 오늘날, 생명과 물질을 가르던 오래된 분절선은 흐려지고 개체의 내면성은 흐트러진다. 인간 복제는 이런 흐름의 극한이다. 생명 조작이 무책임한 자들의 손에 내맡겨질 때, 이제 한 인간의 정체성, 기억, 감정, 사랑, 요컨대 삶과 죽음을 수놓는 모든 것이 와해될 것이다.

기술 문명의 이러한 폭풍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기술 자체이기보다는 자본이다. 자본이 노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욕망이며, 그 도구는 상품이다. 자본은 대중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욕망을 자극해 일으키고, 그 욕망을 채워줄 상품을 만들어낸다. 기술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바람이나 어떤 가치, 도덕이 아니라 자본이 제시하는 ‘프로젝트’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엄연히 구분됐던 과학과 기술은 오늘날 이런 와류 속에 들어가 한덩어리가 되었다. 여기에 매스미디어가 가세한다. 상품의 가치는 기술에 의한 사용 가치만이 아니라 광고에 의한 상징적 가치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본과 과학기술,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형성하는 욕망의 삼각형은 확대 재생산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안고서 질주한다.

이러한 현대의 상황은 바로 몇십 년 전까지의 우리 삶의 풍경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뒷동산에서 꽃을 키우고, 두레박으로 우물에서 물을 퍼먹고, 앞개울에서 가재를 잡던 그 풍경들, 대나무 빗자루로 고추잠자리를 잡고, 겨울에 토끼를 쫓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모여 이야기 잔치를 벌이던 그 풍경들 말이다. 하긴, 세상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사람들의 심성 또한 변한다. 문제는 그 변화의 폭이 세상과 심성의 자연스러운 성숙을 훨씬 넘어서 가속도를 붙여서 증폭할 때, 인간의 정체성이 분쇄기에 들어간 바위처럼 산산이 부서진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은 그 폭을 더 넓히기 위해 계속 질주하기보다는 거꾸로 방향을 돌려 그 넓어진 폭이 배태한 숱한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돼야 하지 않을까? 화학 약품들이 버려놓은 물과 공기, 고엽제에 고통받는 상이 군인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숱한 지역에서 마루타가 돼야 했던 사람들, 기계에 손이 잘려나가고 허리가 부러진 그 많은 노동자들…. 20세기의 기술 문명이 가져온 상처를 어떻게 일일이 나열할 수 있으리. 이 무수한 상처를 뒤로 한 채 오로지 성장 제일주의의 페달을 밟고 또 밟는다면, 우리 앞에는 단말마의 고통만이 쌓여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술 자체만은 아니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과 매스미디어로 형성된 삼각형을 제어할 수 있는 사상적·제도적 장치일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의 술책, 기술 문명이 가져올 가공할 결과들,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환상들을 대중에게 일깨워줄 수 있는 사상의 창출과 이 삼각형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창출. 물질의 가공이 더 이상 기술·자본의 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견제할 수 있는 인문적 사상과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 = 짓밟힌 시절

물질 문명에서의 상처 못지않게 역사에서의 상처 또한 깊다. 크고 작은 전쟁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제국과 식민지, 이런 식의 양분법이 20세기 전체를 수놓아왔다. 우리는 이 시대를 분열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역사는 늘 분열된 집단들의 싸움으로 점철됐으며, 전쟁이 없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분열은 인류 전체를 양분한 심각한 분열이었으며, 20세기의 전쟁은 고도화된 기술에 의해 치러진 잔혹한 전쟁이었다. 역으로 숱한 전쟁들 자체가 기술 문명을 배태했다. 이런 식의 갈등이 남긴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 삶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런 비극의 씨앗 역시 구체적으로는 19세기에 뿌려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있기 전까지 대다수 문명들은 각자의 코드를 통해 삶을 영위했으며, 각자의 이념(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 불교 등등)에 입각해 살아왔다. 그러나 19세기에 형성된 물질적 힘은 각 문화 사이에 그어졌던 선을 지워버렸으며, 이후 세계사는 유럽과 미국의 세계 지배와 이들에 동화(同化)되려는 식민지들의 맹목적 근대화로 치달았다.

20세기는 제국주의와 더불어 시작됐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 부르지만, 유럽 바깥의 식민지들은 바로 그들이 수천년, 수만년 동안 살아 왔던 문화적 토대가 깡그리 짓밟힌 시대였다. 우리의 문화에서도 서낭당이 교회로, 의원이 병원으로, 서당이 학교로, 엿이 사탕으로 바뀌었다. 비서구 지역은 서구가 이룩한 근대성을 삶의 모델로 삼았으며, 따라서 비서구 지역들은 서구의 재현으로서 존재해온 것이다.

따라서 서구적 사유가 공산·사회주의와 자본·자유주의로 갈라졌을 때, 서구의 재현으로서 존재했던 비서구 지역들도 그렇게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은 제국주의의 연장선 상에서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서구 지역 국가들은 삶의 유형을 자생적으로 구성했던 것이 아니며, 이미 작성된 두 답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시즘 역시 제국들의 전선(戰線)에서 형성된 군사적 지배 양태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얄궂은 것은 이 파시즘이 패배하고 비서구 지역들에 ‘해방’이 찾아왔을 때, 그 혼란을 틈타 서구 파시즘이 이들 비서구 지역에서 재현됐다는 점이다. 마치 나열된 성냥들에 연달아 불이 붙듯이, 현대사는 19세기가 뿌린 재앙의 불씨를 활활 일으켜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고통과 상처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역사에 각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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