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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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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중국의 혼란 ]

전진(前秦) 황제 부견이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나자(470년) 북중국은 일시 통일이 이루어진다. 고구려도 숙적 연나라의 멸망을 다행으로 여기며 전진의 존재를 존중하여 영토분쟁 문제로 두 나라 관계를 악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북쪽에 신경을 쓰느라 남쪽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남쪽 영토를 끊임없이 잠식하고 있는 백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 급한 일이었다.

고구려는 이제껏 시조를 같이하는 일가 나라라 하여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었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평양까지 북침해 고국원왕을 쏘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은 과거 연나라에 대해 가졌던 감정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수림왕이 거의 매해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 북변의 땅을 빼앗았던 것이 이런 사실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소수림왕 13년(383) 8월에 부견은 남조 동진(東晋)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려고 112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벌(南伐)의 길에 나섰다가 회수(淮水)의 남쪽 지류인 비수(肥水) 싸움에서 동진 재상 사안(謝安)의 전략에 말려들어 불과 8만 군사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 사건은 이렇게 전개된다. 부견의 아우로 전진의 총사령관이던 부융(融)이 동진의 선봉장 사현(謝玄)으로부터 비수 강가에 진을 친 그의 군대를 조금 물려주면 남군(南軍)이 비수를 건너가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이에 부융은 비수를 건너는 남군을 섬멸하고자 자신의 군대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는데, 대군이 전쟁에서 패하여 후퇴하라는 줄 알고 서로 밟고 달아나는 바람에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생겨버렸다.

사현은 숙부인 사안의 밀명을 받고 이런 꾀로 북군(北軍)을 교란시킨 다음 정예 경기병 8000명을 거느리고 비수를 건너 달아나는 대군을 추격,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에 북군은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며 완전 괴멸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부융은 말이 거꾸러져 피살되었고, 부견은 화살에 맞은 채 필마단기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실 이때 부융으로부터 편지 내용을 보고받은 부견의 참모들은 모두 강가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면서 이런 제의를 일축하려 했다. 그러나 부견이 철기(鐵騎, 무쇠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 수십만으로 물을 건너는 적들을 물 속으로 몰아넣어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오만이 겨우 8만 군사에게 대패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00만 대군이 괴멸하자 전진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피정복 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전진과 대권을 다투다 멸망한 전연의 모용씨들이 제일 먼저 반기를 든다. 우선 전연 문황제(文皇帝) 모용황(慕容, 297∼348년)의 다섯째 왕자로 남벌군의 선봉장을 맡았던 평남(平南)장군 모용수(慕容垂, 326∼396년)는 자신의 군대만은 온전하게 지키고 있다가 고향에서 성묘(省墓)하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와 연나라 구도인 업()성을 차지하려다 실패한 다음, 고구려 고국양왕 원년(384) 1월에 중산(中山)에서 후연(後燕)을 재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전연 경소제(景昭帝) 모용준(慕容儁, 319∼360년)의 제4왕자이자 모용수의 조카인 모용홍(慕容泓, ?∼384년)도 북지장사(北地長史)로 있다가 관중(關中) 지방으로 도망쳐, 관중으로 강제 이주된 선비족들을 모아 화음(華陰)에서 반기를 들고 같은해 3월에 서연(西燕)을 건국한다.

그러자 부견이 남색의 상대로 삼을 만큼 극진히 사랑했던 모용준의 막내 황자 모용충(慕容 359∼386년)도 평양(平陽)태수로 있다가 하동(河東)에서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부견이 머물고 있는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황하 건널목인 포판(蒲坂)을 공격한다.

결국 부견은 모용홍의 뒤를 이어 서연왕이 된 모용충의 공격을 받고 다음해인 고국양왕 2년(385)에 수도 장안을 포기하고 오장산(五將山)으로 피란해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부견은 후진(後秦)왕 요장(姚)이 보낸 장군 오충(吳忠)에게 사로잡혀 선위(禪位)를 강요받다가 불응하고 신평(新平)의 절에서 목매달려 죽고 만다. 고국양왕 2년(385) 8월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중국은 다시 사분오열(四分五裂) 상태로 되돌아간다. 후연, 서연, 후진, 서진(西秦), 후량(後凉), 북위(北魏), 서량(西凉), 북량(北凉), 남량(南凉), 하(夏), 북연(北燕), 남연(南燕) 등 많은 나라들이 계속 일어나 분립하게 된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소수림왕과 근구수왕이 소수림왕 14년(384) 11월과 4월에 함께 돌아가고 고국양왕과 침류왕이 등극하여 새 시대를 열어간다. 백제는 그해 7월에 근구수왕이 돌아가고 침류왕이 등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고부 겸 등극사(告訃兼登極使)를 동진(東晋)에 보내게 되는데, 9월에 이 사신 행차가 되돌아오는 배편으로 서역 승려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옴으로써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다.

동진은 그 전해에 비수에서 전진의 백만대군을 격파하여 국망의 위기를 모면하고 종주권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백제에 불교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때 이미 도안의 제자인 혜원(慧遠, 335∼417년) 등이 동진으로 내려와서 중국화된 불교를 동진에 전면 확산시켰던 터였기 때문이다.

[ 광개토대왕의 웅비 ]

한편 고구려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4만 군사를 동원, 요동성과 현도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킨 뒤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온다. 전진의 토벌군과 싸우느라 정신 없던 후연왕 모용수는 모용족의 근거지인 요서 용성(龍城)을 아우인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지키게 했는데, 모용좌가 요동성의 위급을 알고 사마(司馬) 학경(景)을 보내 이를 구원하고자 했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요동성과 현도성이 고구려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당황한 모용수는 아우 모용농(慕容農)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요동성과 현도성을 되찾게 하지만 이도 잠깐이었다.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375∼413년)이란 영웅이 출현하여 17세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나자(391년) 즉시 사방으로 영토 확장을 도모해 갔기 때문이다.

5월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다음해(392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성을 빼앗고, 9월에는 북쪽으로 글안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포로로 잡은 다음, 본국인으로서 글안에 붙잡혀 있던 백성 1만여 명을 구출해 돌아오며, 11월에는 다시 백제의 해상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7도(道)로 포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백제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용병술에 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막아볼 생각도 못 하여 한강 이북의 모든 부락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갔다.

광개토대왕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뻗어 가려면 우선 남쪽의 근심을 미리 막아야 하므로 이렇게 과감하게 백제를 정벌함으로써 그 기세를 꺾어놓았던 듯하다. 영락(永樂) 3년(393) 8월에 백제 아신왕의 장인인 진무(眞武)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대규모 반격을 가하여 해상요새인 수곡성(水谷城) 등 빼앗긴 성들을 되찾으려 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이를 가볍게 물리친 다음 평양에 9개 사찰을 건립하여 남진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4년(394) 7월에도 수곡성 탈환을 위해 쳐들어온 백제군을 물리친 다음 8월에는 이 부근에 7개 성을 더 쌓아서 백제를 방비하게 했다. 또 영락 5년(395) 8월에 백제 좌장군 진무가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해오자 광개토대왕은 직접 7000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가로 나가 이를 격파하니, 백제는 8000여 군사를 이 싸움에서 잃었다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영락 6년(396) 병진년에 왕이 직접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내려가서 백제 연안의 18개 성을 공격해 빼앗으니 백제왕이 할 수 없이 남녀 1000인과 가는 베 1000필을 바치며 광개토대왕에게 의지하여 이후에는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므로, (왕이)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인질로 잡아 회군했다고 한다. 또 이때까지 백제로부터 빼앗은 성이 58개이고 촌락은 7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백제는 해상으로 연결돼 있던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남침을 견제하려고 영락 7년(397) 5월에 태자 전지(典支)를 왜국으로 보내 군사를 빌려오게 한다. 영락 9년(399) 8월에 백제가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복수하려고 전국에서 군사와 군마를 크게 징발하니 백성들은 그 고역을 못 이겨 신라로 많이 달아났다.

백제는 호구가 크게 감소할 지경에 이르자 왜군으로 하여금 신라를 먼저 침공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다급해진 신라 내물왕은 사촌아우인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한다. 광개토대왕은 즉각 평양으로 내려와 본영을 차린 뒤, 다음해인 10년(400)에 5만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 왜 연합군을 쓸어버린다.

[ 동시에 출현한 두 마리 용 ]

그런데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375∼413년)과 같은 영웅이 태어날 당시에 내몽고 지역에 살던 선비족 탁발부(拓跋部)에서도 탁발규(拓跋珪, 371∼409년)라는 영웅이 출현한다. 광개토대왕보다 4살 위인 탁발규는 16세 때인 고국양왕 3년(386) 1월에 벌써 내몽고 화림격이 부근의 성락(盛樂)에서 대왕(代王) 위에 올랐고, 26세 때인 광개토대왕 영락(永樂) 6년(396) 7월에는 황제를 일컬으며 북위(北魏)를 건국한다.

이후 탁발규는 모용수(慕容垂, 326∼396년)가 재건한 후연을 계속 공략하여 영토 대부분을 빼앗으니, 후연은 영락 7년(397) 10월에 수도였던 중산(中山)까지 함락당한다. 결국 후연의 제2대 황제인 모용보(慕容寶, ?∼398년)는 선대의 고향인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쫓겨오게 되고, 여기서 그는 영락 8년(398) 10월에 외척인 난한(蘭汗)에게 피살당한다.

이에 그 아들 모용성(慕容盛, 373∼401년)이 난한을 죽이고 겨우 발해만 북부 일대의 요서지방을 차지하여 후연의 명맥을 잇게 된다. 또 이해 정월에는 모용수의 아우인 모용덕(慕容德, 338∼405년)이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인 활대(滑臺)에서 자립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하고, 영락 10년(400)에는 현재 산동성 익도현(益都縣)인 광고(廣固)를 도읍지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렇게 북위에 의해 북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긴 모용씨들은 동북쪽의 요서와 동쪽의 산동반도 약간씩을 차지한 채 각각 나뉘어 연나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모용씨들의 세력이 극도로 약화돼 요서도 지키기 힘들게 된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5만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기 위해 1월에 사신을 보냈는데, 광개토대왕이 저들에게 보낸 문서가 매우 오만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용보의 아우인 표기대장군 모용희(慕容熙, 385∼407년)가 2월에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요동 지방에 있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함락하고 5000여 호의 백성을 요서로 옮겨간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남벌(南伐)에 주력하기 위해 짐짓 틈을 내주었던 것인데, 모용성은 여기서 있는 힘을 모두 허비하고 다시 서북쪽 고막해(庫莫奚)까지 정벌하느라 인심을 잃고 만다. 결국 영락 11년(401) 8월에 좌장군 모용국(慕容國)과 전중(殿中)장군 진여(秦輿) 및 단찬(段讚) 등이 금위병(禁衛兵)을 거느리고 모용성을 습격하려다 발각돼 처행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후 처형된 자들의 자제들이 다시 밤중에 모용성을 습격해 중상을 입혀 죽게 만들었다. 그때 모용성의 나이는 29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그의 막내 숙부인 모용희가 제위를 계승한다.

이렇게 후연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광개토대왕은 5만 군사로 백제와 신라 및 왜를 완전 제압한 다음 서서히 공격 목표를 서쪽으로 바꿔나간다. 영락 12년(402)에 요하를 건너 숙군성(宿軍城)을 들이치니 후연의 평주(平州)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음해(403) 11월에도 연나라를 쳐서 땅을 빼앗으니 후연 황제 모용희는 영락 15년(405) 1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워낙 방비가 삼엄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모용희는 영락 16년(406) 12월에도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했지만 무수한 사상자만 낸 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모용희는 모용보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다음해인 영락 17년(407) 7월에 모용보의 양자인 고운(高雲, ?∼409년) 등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고운은 그의 조부 고화(高和)가 고구려 왕족으로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고, 고운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 모용보가 태자로 있을 때 동궁시위로 들어가 모용보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다. 모용보는 자신의 성인 모용씨를 내려줄 정도로 고운을 무척 사랑했다. 이런 인연으로 고운은 모용희가 모용보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하자 중위(中衛)장군 풍발(馮跋) 등과 함께 모용희를 제거했던 것이다. 이에 풍발 등은 고구려 왕손인 고운을 추대하여 천왕위(天王位)에 오르게 하니, 모용씨의 후연은 막을 내리고 고씨의 북연(北燕)이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영락 18년(408) 3월에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했고, 고운도 시어사(侍御使) 이발(李拔)을 사신으로 보내 답례하였다. 고구려 왕족이 일시 만주대륙을 모두 장악했던 때의 일이다. 그러나 북연 천왕 고운은 등극한 지 불과 2년 만인 영락 19년(409) 10월에 총애하던 신하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이에 시중 풍발이 이들 흉인(凶人)을 처단하고 자립하여 북연의 대통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대왕은 북연과 영토분쟁을 일으킬 수 없으므로 부득이 서쪽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다. 영락 19년(409) 7월에는 동쪽에 독산성(禿山城) 등 6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킨 다음, 20년(410)에는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동부여 정벌에 나서 64성 1400촌락을 공략하여 수중에 넣는다. 이로써 고구려 영토는 요하 이동의 흑룡강 상류 전역과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만주대륙, 그리고 한강 이북의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아직 황제를 일컬을 만큼 충분한 영토는 아니었는데 애석하게도 광개토대왕은 겨우 39세의 나이로 영락 23년(413) 10월에 갑자기 돌아가고 만다. 대륙으로 웅비하려던 동쪽의 용이 승천의 순간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부왕인 영락대왕, 즉 광개토대왕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그 능을 전례없는 규모로 축조한다. 피라미드형의 7단 석축에 제3단의 상면을 바닥으로 삼아 석실을 경영한 구조인데, 하단의 한 변 길이가 30m이고 높이가 13.5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도판 1).

그리고 장수왕은 태왕의 평생 위업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높이 5.4m, 각 면 너비가 1.5m의 거대한 네모기둥 형태의 자연석을 다듬은 다음 사방 표면에 10여cm 크기의 글자로 비문을 가득 새겨놓았다(도판 2).

비석의 석질은 녹색을 띤 회색 응회암이다.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위예법(魏隸法)에 바탕을 두었으나 삐침을 극도로 자제하여 전한(前漢) 고예(古隸)의 질박웅경(質樸雄勁, 소박하고 씩씩하며 굳셈)한 필의(筆意)를 계승한 듯한데, 네모 반듯하고 근엄한 기풍이 고구려 특유의 미감을 실감케 한다(도판 3).

한편 서쪽 내몽고 지방에서 출현한 또 한 마리의 용인 북위 태조 탁발규는 영락 6년(396) 7월에 북중국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움)한 이래 2년 뒤인 398년 7월에는 수도를 내몽고 지방의 성락(盛樂)으로부터 만리장성 안의 평성(平城)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북중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는데, 39세 때인 영락 19년(409)에 한식산(寒食散)을 잘못 복용해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제하지 못하고 무고한 살생을 자행하다가 16세 난 둘째 아들 청하왕(淸河王) 소(紹)에게 시해당함으로써 그 역시 웅비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동·서에서 출현한 두 마리 용이 각각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게 되니, 여의주를 놓고 직접 한판 승부를 다투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 석가문(釋迦文) 불제자(佛弟子) 모용진(慕容鎭) ]

1976년 12월8일 북한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德興洞)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봉토 석실 벽화 고분이 나왔다. 이에 북한 당국은 1977년 1월에서 2월에 걸친 혹한기에 이를 발굴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1978년 11월21일자 일본 조일(朝日)신문의 보도로 남한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이 덕흥리 고분에서도 안악 3호분, 즉 동수묘에서와 같이 먹으로 쓴 묘지명이 발견되었다(도판 4). 일본에서 1979년에 발간한 ‘조선화보(朝鮮畵報)’ 11월호에 실린 사진과 읽어놓은 문장을 토대로 앞뒤 문맥을 헤아려 복원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감리(○甘里) 석가문 불제자 모용씨(慕容氏) 진(鎭)은 벼슬하여 지위가 건위장군 차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에 올랐는데, 진의 나이 77에 벼슬 살다가 돌아갔다. 영락 18년으로 해는 무신년인데, 12월 신유가 초하루인 25일 을유에 옥관을 옮기니 주공(周公)은 땅을 상보고 공자(孔子)는 날을 택하며 무왕(武王)은 때를 골라서 한번 잘 장사지내 보내게 한 뒤에 부(富)는 7세(世)에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며 벼슬에 나가 날마다 승진하여 지위가 제후와 왕에 이르고 만 가지 공(功)을 쌓도록 하소서.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술과 과실, 쌀과 반찬은 다 쓸어버릴 수 없게 하며 아침마다 소금 된장으로 한 상 차려 먹게 하소서. 기록하고 난 뒷세상에 아무 탈 없이 머물러 살게 하소서(長樂郡 信都縣 都鄕 ○甘里, 釋迦文 佛弟子 慕容氏鎭, 仕位 建威將軍 次小大兄 左將軍 龍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鎭年七十七薨官. 以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 成遷移玉柩, 周公相地, 孔子擇日, 武王選時, 歲使一良葬送之後, 富及七世, 子孫蕃昌, 仕官日遷, 位至侯王, 造藏萬功. 日煞牛羊, 酒果米餐, 不可盡掃, 旦食鹽 食一卓. 記之後世, 寓寄無故).”

돌아간 때가 영락 18년(408) 무신 12월25일이라 했으니, 고운이 북연의 천왕자리에 있으면서 요서 일대의 모용씨 근거지를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이 해는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4년에 해당하고, 북연은 정시(正始) 2년이었으며, 북위는 태조 천사(天) 5년에 해당했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서는 동수 묘지와는 다르게 동진의 연호는 물론 기타 주변의 다른 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 연호를 쓰고 있다. 이미 광개토대왕이 독자 연호를 가지고 독립자세를 취하며 칭제(稱帝)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던 상황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락 18년이 무신이라 하여 서기 408년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의 기년(紀年)과 일치하니 영락 원년이 서기 391년이고, 이해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것이 분명한 만큼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기년과는 1년의 오차가 있음을 재차 확인해 주고 있다.

봉토석실고분벽화분이라는 무덤 양식은 주인공의 신분을 중국계로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주인공이 두 자의 성을 쓰는 복성(復姓)을 가지고 있고 그 벼슬 이력이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라는 고위직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요서와 요동을 근거지로 나라를 일으켜 한때 북중국의 절반을 차지하고 천하를 다투던 모용씨 일족일 가능성이 높아 지워진 그의 성씨를 모용으로 복원해 보았다.

더구나 벽화 중에는 그가 유주자사로 있을 때 유주 관내의 여러 군 태수와 내사(內史) 등이 내방한 사실을 인물과 함께 기록하고 있어 그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분위장군 연군태수가 내조(來朝; 지방 관리가 임금을 뵙기 위해 대궐로 들어옴)했을 때(奮威將軍燕郡太守來朝時)’ ‘범양내사가 내조하여 주의 일을 의논할 때(范陽內史來朝論州時)’‘어양태수가 와서 주의 일을 논의할 때(魚陽太守來論州時)’ ‘상곡태수가 와서 조하(朝賀, 조정에 나아가 임금께 하례를 드림)할 때(上谷太守來朝賀時)’ ‘광녕태수가 와서 조하할 때(廣寗太守來朝賀時)’ ‘대군내사가 와서 조하할 때(代郡內史來朝賀時)’ 등이다.

사용한 어휘를 보면 주인공이 유주자사라고는 하지만 거의 국왕 행세를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내조(來朝)니 조하(朝賀)니 하는 용어는 임금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모용진이 언제 고구려로 왔던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지만, 그가 광개토대왕에게 중용돼 차소형과 차대형이라는 재상직 벼슬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늦춰 잡아도 고구려가 요동성을 연나라로부터 빼앗는 과정에 항복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고구려가 요동과 현도성을 빼앗을 때 모용진의 나이는 벌써 54세의 노성기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측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모용진(慕容鎭)이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남연의 재상으로 남연에서 활동하다가 남연이 멸망하는 영락 20년(410)에 운명을 같이했다는 사실을 ‘진서(晋書)’ 권 127 모용덕(慕容德) 기(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연의 모용진은 고구려에 와서 둘째 정승자리인 차대형(次大兄)의 지위까지 올랐다가 408년에 먼저 죽은 모용진과는 동명이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고구려에 온 모용진은 자신의 초상화와 생활장면(도판 5)을 무덤의 석실 벽면에 벽화로 남기면서 스스로를 ‘석가문 불제자’라 일컫고 있어 독실한 불교신자임을 표방하였다. 그런 그가 평양 부근에 무덤을 남겼다는 사실과 광개토대왕이 영락 3년(393) 8월에 평양에 9개소의 절을 짓게 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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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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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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