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출판화제|다카하시 도오루의 ‘조선의 유학’ 재평가

아직도 극복 못한 식민철학의 굴레

  • 조남호 서울대 철학 강사

아직도 극복 못한 식민철학의 굴레

1/2
  •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노골적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한 악질적 식민 관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주리주기론을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한 최초의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조선의 사상을 연구했는가? 주리주기론은 그의 손에서 어떻게 식민철학으로 변질했는가? 황국정신에 기초하여 유학을 연구하고 국민 도덕의 본의를 천명하여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명륜학원 교육목표)이 제국주의자의 연구 목적이었다. 21세기 한국 철학의 과제는 다카하시를 극복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
“다카하시 교수는 우리말은 썩 잘 했지만, 곧잘 조선인을 멸시하는 통에 질색이었다. 다카하시는 대구고보 교장으로 있을 때, 자녀들이 학생으로 있는 양반집에 찾아가 문집을 공짜로 적잖이 수집했다.”(신석호의 증언 ‘경성제국대학’ 다락원, 110쪽)

“조윤제가 다카하시 교수의 출장명령을 받고, 제주도로 민요채취를 다녀왔는데, 이 조사한 내용을 모두 내놓으라고 명한 것이다.”(같은 책, 197쪽)

“졸업을 앞두게 되니 그때까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취직 문제가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2강좌 주임(실제로는 제1강좌였음-필자) 다카하시 선생을 찾아가 의논했다. 어학 담당인 오구라 선생을 찾는 것이 도리였겠지만, 그런 문제에는 다카하시 선생이 적임자였다. 다카하시 선생의 주선으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됐다. 경성사범학교 교유(교수)자리였다.”(‘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일석 이희승 회고록’ 창작과 비평사, 94쪽)

경성제국대학 학생에게 다카하시 도오루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다카하시를 백안시하면서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다카하시는 매우 문제가 많은 학자였고, 학자적 자질을 의심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학문적 연구에 힘을 쓰는 이판(理判)교수가 아니라, 교육 행정일을 담당하는 사판(事判)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카하시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경성제국대학의 현실적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이러한 점이 다카하시를 잊혀진 인물로, 아니 잊고 싶은 인물로 만들게 했던 것 같다.

황국신민 만들려고 식민철학 연구

다카하시의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외에 한성중학교 교사, 조선 총독부 촉탁,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장, 경학원 강사, 혜화전문학교 교장, 명륜연성소 소장을 지낸다. 주로 교육과 관련 있는 직책으로 정치나 외교분야와 같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특히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의 전신이 되는 학교들을 세우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울러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에 자문 노릇을 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위상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다카하시는 이러한 행정가적 능력만 있었던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사상사(思想史)’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점이야말로 그를 지금에 와서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이유다.

다카하시가 처음부터 조선 사상사를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뿌리 깊은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동경제국대학 지도교수였던 다케베 돈고(建部遯吾)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진화론에 입각한 우등과 열등 이론에 따라 그는 철저히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했다.

그가 ‘조선인’이란 글에서, 조선의 사상을 고착성과 사대성으로 파악한 것도 ‘열등’한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조선 총독부 촉탁 자격으로 조선의 종교를 조사한 것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는 총독부 명령으로 합병 직후 유생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삼남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의병장의 책상에 ‘퇴계집’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조선 유학을 연구하게 된다. 또 사고(史庫) 조사를 위해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면서 승려들의 근면하고 바른 행동을 보고, 조선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조선에 대한 다카하시의 부정적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조차 ‘황국신민’을 만든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조선 사상사를 3부작으로 구상했다. 조선의 불교, 조선의 유학, 조선의 특수 종교가 그것이다. 그중 조선의 불교만 완성되고 나머지 둘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다카하시는 ‘이조불교’를 써서 조선 불교사를 정리했다. 신라나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 불교는 실제적으로 거의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조선 불교라는 불모지에 학맥을 정리하고, 조선 불교가 어떻게 국가와 관계를 맺었는가를 상세히 논하였다. 일종의 교리사라기보다는 정치사 혹은 사회사적 연구였다(앞으로 다카하시의 조선 불교에 대한 연구도 곧 번역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조선사상연구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유학이었다. 퇴계학파를 주리파, 율곡학파를 주기파로 규정한 그의 이론이 아직까지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인용되는 점만 보아도 그의 연구는 상당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카하시도 조선 유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조불교’를 쓴 다음, ‘이조유학’은 쉽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 유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자학이라는 보편적 틀 속에 규정돼 있는 조선 유학을 연구하려면 중국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 부분이 부족했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서평에서 그가 “조선 유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그 논쟁이나 학파의 대립에 대해 일가견 있는 비판을 하려면, 시비 모두 근본으로 소급하여 송학 특히 주자학을 구명하고 이에 덧붙여 변치 않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마도 자신에 대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예의 철학으로 이용당한 주리주기론

조선 멸망의 필연성을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에서 찾은 다카하시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주리(主理)·주기(主氣)’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조선에서 이황이 가장 먼저 언급했다. 이황은 사단(四端)을 주리, 칠정(七情)을 주기로 파악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리(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는 경우가 있는 것은 리를 주로 해서(主於理) 말한 것이며, 사단이 이것이다.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경우가 있는 것은 기를 주로 해서(主於氣) 말한 것이며, 이것이 칠정이다.”

이처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개념적으로 주리와 주기로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와 기로 이루어진 것이며, 같은 종류지만 지나침과 모자람의 유무로 구분될 뿐이라고 한다. 이이는 기대승의 비판을 이어받아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 규정한다.

이황의 사상을 계승한 퇴계학파는 사단과 칠정을 주리주기의 기준으로 삼아,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반대하는 율곡학파를 주기론으로, 자신들은 주리론으로 규정짓는다. 특히 이진상은 “이황이 제창한 학설의 본뜻은 ‘주리’”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자신들의 동일성을 확보하려 하지도 않았고, 퇴계학파를 주리론이라고 규정짓지도 않았다. 율곡학파는 사단 칠정을 주리주기로 분류하는 이황의 방식을 비판한다. “사단은 리의 발동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라는 데서 출발한 이황이, 리와 기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학파는 “사단은 리의 발동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라는 말이 주희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들은 이러한 말이 ‘주자어류’에 단 한 번 보인다고 주장하고, 주희의 이 말은 기록자의 착오거나 한순간의 견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주희의 철학 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주희의 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부분을 골라내 그 진위 여부를 가림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이 올바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것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서 시작하여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거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주리주기론은 퇴계학파가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카하시 도오루가 나타나 주리주기를 철학적·범주적 개념으로 이용하여 조선 유학의 근대적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는 조선 유학의 학파와 지역별 분류를 넘어서 개념적인 분류를 시도한 최초의 성과다.

그는 당시의 일제 어용학자(鄭萬朝·呂圭亨·尹喜求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들이 여전히 퇴계학파를 따르는 남인과 율곡학파를 존숭하는 노론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을 사단 칠정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당파와 철학 이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조선이 멸망한 계기를 당쟁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그는 ‘조선 유학 대관’에서, 조선의 사상이 640년 동안 주자학 일변도로 고착되어 진보·발전성을 상실했다고 하면서, 이를 국민성과 연결짓는다. 또 정당과 학파의 결합이 그 뚜렷한 특징이라고 논한다.

다카하시는 사단 칠정을 기준으로 퇴계(영남)학파와 율곡(기호)학파를 나누고, 그것을 주리주기의 틀에 넣어 조선 철학사에 관철시킨다.

그러면 다카하시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을 살펴보자. 우선 다카하시의 주장은 조선 철학사 전체를 포괄하는 도식이 되기에 적절치 못하다. 이것은 다카하시 자신이 이미 사단 칠정을 기준으로 조선의 모든 유학자를 영남(주리)과 기호(주기)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기준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따로 분류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퇴계학파에 속하지만 사단 칠정에 대해서는 이이의 견해를 취한 경우이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율곡학파지만 이이를 비판했으며, 임영(林泳, 1649~ 1696)·조성기(趙聖期, 1638~1689)·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율곡학파지만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절충’한 경우로 분류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단 칠정에 대한 각 학파의 입론 차이를 주리주기로 명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단 칠정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학파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카하시에 따르면 사단이 칠정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감정과 일반적인 감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기심성(理氣心性)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황은 사단(도덕적인 감정)을 칠정(욕망 전반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감정)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단은 리를, 칠정은 기를 주로 한다. 이것은 리가 기의 움직임(發)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고로 연결되고, 당연히 이황의 철학은 주리론이 된다. 이이는 리발(理發)을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이는 “어떻게 칠정 중에서 순수하고 완전하게 리에 해당하는 사단이 발생했는가?”란 문제를 제기한다. 이이의 논지는 기가 곧바로 리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리와 기의 대립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연의 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기에는 본연의 기가 있어, 그것은 순수하고 청명하여 리를 싣고, 리 그 자체로 움직여 그대로 정(사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 ‘본연의 기’에 대한 관심은 늘 율곡학파의 중심 과제가 됐다. 그러나 이이가 “담일 청허한 기는 없는 경우가 많다”고 언급하고 있듯이, 율곡학파는 ‘본연의 기’를 리와 같은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카하시는 이황과 이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사람의 리기설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차이는 선한 정과 악한 정의 근원을 주로 리 쪽에 두는가, 기 쪽에 두는가에 있다. 즉 이황은 리 그것에도 약간의 발동을 인정하기 때문에, 리가 충분히 기를 지배한다면 정(情)은 모두 리발(理發)이 되고 선하게 된다. 그것과 반대로 리가 기를 충분하게 지배하지 못하여 만약 기에 질 때는, 정은 기발(氣發)이 되고 위태로워져 악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의 수양은 결국 리를 왕성하게 하여 항상 언제 어느 곳에서나 기를 지배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것에 대해 이이는 리는 운동도 없고 작용도 없어 단순히 형식적인 조리이고, 하늘이 만물을 생기게 하여, 만물에 리를 부여하는 데 절대 공평하여 더하거나 뺌도 없다. 그리고 본연지성에 나아가서 본다면 사람과 사물의 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情) 즉 마음의 작용에 선악이 생기는 것은 본연지성, 즉 리의 있고 없음과 많고 적음 때문은 아니다. 오직 리를 타고서 이것을 구체화하는 바의 기의 성질에 달려 있다. 맑은 기가 타면 리는 똑바로 나와 정이 선하게 되고, 탁한 기가 타면 리는 가리워 정이 악하게 된다. 여기서 도덕 수양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각각 기질을 변화 개선하여 탁한 기를 맑고 순수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이는 성인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그 기질을 변화시켜 성인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의 기질은 학문, 즉 수양으로 말미암아 그 중요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이는 사람의 수양에서 기를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황이 처음의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이는 처음의 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황은 마음의 본성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주리론으로 나눌 수 있고, 이이는 본성에 초점을 두면서도 기의 수양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주기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구분은 가능하지만, 주리주기의 도식적인 구분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황·이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기가 리를 은폐하는 것을 극복하고, 리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리가 올바르면 기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하는 것이 주자학의 기본적인 사고다. 이러한 사고는 이이와 이황의 공통된 기반으로, 결코 어느 한쪽만 강조하지 않는다.

다카하시는 이러한 견지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전체에까지 확장시켜, 이황의 주리론은 유성룡(柳成龍),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남한조(南漢朝), 유치명(柳致明), 이원조(李源朝)를 거쳐,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心卽理)’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했다.

한편 이이의 주기론은 김장생(金長生),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을 거쳐 임성주(任聖周)의 ‘성즉기(性卽氣)’에서 최고봉에 달한다는 것이다.
1/2
조남호 서울대 철학 강사
목록 닫기

아직도 극복 못한 식민철학의 굴레

댓글 창 닫기

2018/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