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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떠나살기|시인 최영미의 속초일기

나의 바다를 찾아서

  • 최영미 시인

나의 바다를 찾아서

난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 들고 축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오후 세 시 쯤, 햇살은 적당히 따뜻하다. 아침처럼 눈이 부시지는 않지만 아직 태양의 온기가 남아있어 스웨터를 걸치지 않아도 된다. 성탄절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들이 다 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길 건너 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속초 시장기 축구대회를 느긋이 앉아서 구경하며, 새삼 이곳으로 이사오길 잘했다고 흐뭇해 한다. ‘로열박스가 따로 있나? 이 소파가 특등석이지. 암. 그렇고 말고.’ 운동복을 입고 연습하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선수들이 정식 유니폼을 입고 뛰며 휘슬을 달고 따라다니는 주심도 있어, 진짜 경기를 보는 실감이 난다.

빨간 셔츠를 입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공격하는 팀이 속초중학인지 설악중학인지 궁금하지만, 굳이 밑으로 내려가 알아보진 않을 것이다. 오늘 나는 조금 피곤하다. 방학이 시작된 12월21일부터 근 일주일간 교대로 찾아오는 친구와 선배 가족에게 날마다 똑같은 코스로 관광안내를 했다. 그래도 아까 해변에서 파도를 보고 옷이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던 아이들 생각을 하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그 아이들도 내가 처음 바다를 발견했을 때처럼 신비로운 그 마력에 끌렸을까? 내가 그놈의 원고 때문에 좀 더 편하게 사람들을 대접하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다.

실력이 비슷비슷해 공은 대개 하프 라인 주위를 왔다갔다 할 뿐,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골이 터지지 않아 지루해지면 멀리 설악산을 쳐다보거나, 고개를 30도쯤 돌려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내가 잠깐씩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갑자기 슛이 터지고 전반전이 끝난다.

축구광인 내게 이건 ‘덤’으로 주어진 선물 같은 거다. 처음 이사 올 땐 이런 낙이 있으리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학교가 코 앞에 붙어있어 좀 시끄러울 것 같아 걱정을 했었다. 학교 운동장이 거의 공설운동장이나 다름없어 하루종일 사람들로 북적댄다. 새벽부터 조깅하는 아저씨들이 있는가 하면 가끔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하고, 낮에는 교련이나 체육수업 받는 학생들로 붐빈다. 밤에도 조용하지 않다. 라이트를 훤히 밝히고 훈련연습 중이거나 벌을 받는 풍경을-얼마전엔 ‘원산폭격’도 있었다-거의 매일밤 목격할 수 있다. 운동장 네 귀퉁이에 높이 솟은 인공조명이 너무 강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을 때는 커튼을 쳐야하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구경거리가 있어 심심하지는 않으니까.

물치의 비릿한 바닷내음을 맡았을 때 왜 그리 가슴이 뛰던지

난 단지 서울이 싫어서, 일산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싫어서 떠났을 뿐, 속초가 특별히 좋아서 이사를 결심한 건 아니었다. 지방으로 거처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몇년 전부터 했었다. 그러다 작년 여름에 일산의 아파트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본격적으로 이사갈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 난 어디로 갈지 몰라 대한민국 이곳저곳을 물색하고 다녔다. 제주도, 거제도, 전주, 춘천, 원주, 속초, 경주…전주와 춘천을 빼곤 전부 내가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다 좋은 곳이었지만 실제로 생활을 하려면 한두 가지 걸리는 게 있어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사 날짜는 닥쳐오고 초조해지던 어느날 밤, 난 전국지도를 펼쳐놓고 눈을 감았다. 손으로 아무데나 찍어 정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아 호기를 부렸지만, 그런 ‘우연’에 의지할 만큼 진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추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별다른 연고가 없는 춘천으로 거의 마음을 정하고 계약을 하러 갔을 때, 어수선한 게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호반을 끼고 있는 그 도시에 가득한 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이 다 갈 무렵, 속초행 비행기를 탔다. 물치에 내려 비릿한 바닷내음을 맡았을 때, 왜 그리 가슴이 뛰던지…. 마치 오래 그리워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그 순간 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느낌 하나만 믿고 덜커덕 집을 샀지만, 속초에서의 시작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포장이사가 잘못되어 컴퓨터 프린터가 깨졌고, 노트북을 분실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았지만 하드가 망가져 있었다-그보다 더 큰 일은 집에 비가 새는 것이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침, 깨어나보니 베란다 바닥에 홍건히 물이 괴어 있었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가 지었다는 아파트는 알고보니 부실투성이였다. 베란다 천장과 벽에 금이 가 빗물이 스며들고, 홈통과 바닥의 배수시설도 엉망이었다. 방의 장판이 습기로 썩어들어가는데, 구월에 웬 비는 그리 무섭게 퍼붓던지. 며칠 잠을 설치며 걸레란 걸레는 모두 동원해 물을 훔쳤다. 심란하여 그 좋다는 산과 바다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누가 내 주소로 위장전입 신고를 해 등기가 제때 나오지 않아 속을 어찌나 태웠던지.

시공사인 모 건설에 진정서를 보내고 내용증명이다 뭐다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런저런 문제로 사람들과 싸우느라 처음 한두 달은 정신이 없었다.

생활문화가 서울과 완전히 다른 점도 한동안 내가 고전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선 한번 뭘 하기로 했으면, 다음에 그걸 변경하기가 무지무지 어렵다. 안방 유리창을 갈아끼우려 사람을 불렀다가 며칠 뒤 주문을 취소하려 했더니, 곤란하다는 대답이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결국 유리를 갈지도 않은 채 유리값 전액을, 하지도 않은 시공비까지 합쳐서 물어줘야 했다.

서울의 백화점에서 쇼핑하던 버릇대로 함부로 물건을 샀다가는 큰일 난다. 서울의 상점들처럼 물건 치수가 다양하지도 않고 한번 반품이 들어오면 다시 팔릴지가 불투명해, 환불은 커녕 교환도 잘 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영수증을 주고받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아 한동안 난 골탕깨나 먹었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면 상점 주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기 사람은 내가 다 알아요. 계약서요? 영수증이요? 그런 것 없어도 다 기억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기억이 잘못 되어 한번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다. 붙박이옷장을 주문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엉뚱한 장롱이 배달되어 한바탕 승강이 끝에, 이번에도 또 내가 지고 말았다. 소비자센터에 고발하고 본사에 내용증명을 띄워봤자 제대로 된 계약서가 없는데 무슨 증거로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낯선 거리에서 더듬거리는 이방인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포구가 아니었다. 어릴 때 잠시 살아 그래도 고향 비슷한 곳이라고 찾아왔지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간판들만 즐비한 낯선 거리에서 나는 많이 더듬거렸다. 때로는 외지인이라고 따돌림도 당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라 유동인구도 많지만, 속초 토박이를 제외하면 이곳 주민 대부분은 이북 출신이다. 주로 함경도에서 피란온 사람들이 청호동 등지에 정착해 살고 있다. 관광으로 흥청대는 호텔과 콘도, 횟집과 순두부 촌을 조금만 벗어나면 산골이고, 금방 가난한 어촌이 나온다.

동네가 좁으니 집을 나서 조금만 움직여도 같은 얼굴을 여러번 마주칠 수밖에.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며칠 전 나를 어디서 태웠으며 그때 내가 어떤 상황이었다는 걸-친구가 와서 터미널로 급히 마중나가는 길이었다-낱낱이 내게 환기시키는 기사 아저씨가 있어 놀란 적이 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냐는 내게 그 아저씨 왈, “목소리가 특이해서요. 여기 사람 같지 않았거든요.”

여긴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다. 십분에서 이십분 기다리는 건 보통이고, 아침 저녁 통학시간이 지나면 삼십분 가까이 기다릴 때도 있다. 게다가 노선도 다양하지 않아, 바로 옆에 있는 노학동을 가는데 시내를 거쳐 버스를 갈아타고 빙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급할 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곧 속초 시내 모든 택시기사들이 다 나를 알아볼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운전학원에 등록을 한 첫날, 셔틀버스를 모는 강사들끼리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거수경례를 하는 광경이 어찌나 생경해 보이던지. 서울 같으면 그냥 손을 흔들거나 창을 열고 ‘어이-’ 인사하고 지나갈 텐데. 아침에 원장 앞에서 ‘열중 쉬어!’ 자세로 도열한 강사들은 모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군부대가 많아 그런가. 여긴 아직도 군사문화의 잔재가 많다.

처음엔 유독 그 학원만 보수적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몇달 뒤 미시령 밑의 콘도로 차를 몰고가는데 입구의 경비원이 내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는게 아닌가.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를 따라서 군대식으로 인사를 한 뒤에 씁쓸했다. 사소한 일 같지만 문득 깨우쳐지는 게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문화란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 바로 생활문화가 아닐는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전면허를 딴 날, 어찌나 기뻤던지. 당장 물치의 바닷가로 가서 회를 한 접시 시켜 먹고 자축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파도소리를 들려주며 자랑했다. 그 즈음 내 관심은 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차를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 거리에 나가면 차의 뒤꽁무니만 눈에 들어왔다. 씽-, 하고 달리는 게 예뻐 보이면 뒤표지판을 읽느라 한참을 길거리에 서있곤 했다.

며칠 뒤 새차를 샀다. 그리고 틈만 나면 어디든 차를 몰고 나갈 ‘건수’가 없나, 머리맡에 시청 홍보과에서 구한 관광지도를 펴놓고 밤낮으로 궁리했다. 때로는 걸어가도 될 곳을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가 주차하느라 애를 먹은 적도 있다.

강원도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도이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해안가를 절반으로 뚝 자른 지점에 속초가 위치하고,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북한의 장전항이다. 7번 국도를 타고 고성을 가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고 크게 써붙인 표지판을 보았다. 통일만 되면 이 길을 따라 계속 달려 원산, 두만강, 블라디보스토크, 몽골….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육로로 유럽대륙과도 연결된다. 아-.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친구들과 교대로 차를 몰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꿈에 잠시 난 부풀었다. ‘그날’이 언제일지… 너무 늦게만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결혼반지와 아이 사진 그리고 거짓말

속초 같은 소도시에선 익명으로 존재하는 게 무척 힘들어 여기와서 내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 이곳에서 ‘나’를 그대로 드러냈다간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어딜가나 호기심과 의혹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과년한 여자 혼자 사는 걸 수상쩍게 생각하는 아줌마와 아저씨들 때문에 처음엔 연기를 좀 해야 했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호기심을 피하려 내가 사용한 소도구는 ‘결혼반지’와 ‘아이 사진’이었다. 이사한 첫날부터 백일된 조카 사진을 보란 듯이 거실장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았다. 각종 배달꾼이나 보일러, 가스, 컴퓨터 등 기계를 수리하러 낯선 남자들이 드나들 때마다 어떻게든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아니란 걸 보여주려 애썼다. 단골식당 아가씨의 집요한 심문에 못이겨 결국 내 신분을 밝힌 적도 있다. 결혼했다며 내가 내민 금반지도 믿지 않는 그녀였으니까.

내가 이런 사정을 하소연하면 친구 M은 말한다. “얘. 내 애인 빌려줄테니 하루 날 잡아 속초 시내를 함께 돌면 되잖아.” “정말? 그럴까?”

그러나 막상 그녀가 애인과 함께 날 찾아왔을 때, 난 그 절호의 기회를 활용할 수 없었다. 올 때마다 차가 막혀 길가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야했다. 추석 때 내려와서는 소파를 베란다로 옮기는 등 가구배치를 다시 해준 뒤 쉴 틈도 없이 그날밤 서울로 갔고, 11월에 왔을 땐 단풍구경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럭저럭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갔다. 가끔씩 들러 가볍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생겼고,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며 중요한 생활정보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어디 음식점이 괜찮다든가, 난방비를 절약하는 방법 등. 이곳에서 내가 정을 붙이고 살게된 데는 친절한 이웃들의 도움이 컸다. 우연히 알게 된 C가구점과 이불집 아줌마들, 그리고 마음씨 좋은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내 든든한 ‘빽’이다. 못을 박고 커튼을 다는 등 나 혼자 힘으론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난 조금 망설이다 이분들께 의지한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서울이나 일산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시내를 나갈 때면 부둣가 가까운 가구점에 들러 차를 마시곤 한다. 나보다 한살 위인 여주인은 한자리에서 십년 넘게 장사를 한 데다, 속초로 시집온 지 이십년이 넘어 이 좁은 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훤히 꿰뚫고 있다. 그 감칠맛 나는 말솜씨로 한번 얘기보따리를 풀어놨다 하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손님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는 그녀의 ‘소설’을 듣느라 강릉가는 버스를 놓칠 뻔한 적도 있다. 내가 잠시 눈독 들였던 꽃집 아저씨가 총각이 아니란 것도 그녀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다는 좀 괜찮다 싶으면 철조망이 쳐있고, 아니면 관광객을 위한 해수욕장이 고작인데 너무 개발돼 도무지 매력이라곤 찾을 수 없다. 나는 아직 ‘나의 바다’를 찾지 못했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날 오후, 나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 날을 혼자 조용히 보내게 되어 흡족했고, 뭔가 추억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새해가 되려면 여덟 시간쯤 남아 있었다. 예전부터 가려고 벼르던 조양동 ‘선사유적지’를 답사한 뒤에 청간정에서 월출을 보고, 오는 길에 하일라비치에 들러 저녁을 먹는다는, 제법 근사한 계획을 세웠다.

오로지 불확실한 관광지도 하나만 믿고 탐험에 나섰는데, 의외로 쉽게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조양동 동사무소 뒤의 야트막한 야산 입구에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기원전 8세기, 청동기 시대의 움집터 7채와 고인돌 2기를 택지개발사업을 하다 발견해 1992년 강릉대 박물관팀이 발굴했다는 저간의 사정이 꽤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산허리를 길게 휘감은 등산로를 따라 조금 걸어가니, 대나무와 소나무가 제법 우거진 울타리가 보였다. 마치 작은 목장처럼 말뚝을 박아놓은, 그 안이 발굴현장이었다. 평평하고 둥근 정상에 잔디가 심어져 있고, 동서로 길게 뻗은 장방형 집터만 듬성듬성 날흙으로 덮여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담배꽁초와 컵라면 뚜껑, 나무젓가락이 지저분하게 나뒹굴고 있을뿐, 유물도 없고 고인돌도 없었다. 난 혹시 깨진 토기조각이라도 주울까, 유심히 땅을 살펴보았지만 부서진 조개껍질 같은 것만 집힐 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어나 주변을 거닐었다. 바람이 약간 불고 날씨는 흐렸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대나무숲 너머로 청초호와 동해의 푸른 물결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속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 언덕에 서서 난 무엇을 생각했나? 인적없는 그곳에서 난 일종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두 팔을 들어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작게 흥얼거리며 노래도 불렀다. 나의 바다를 찾은 것 같은 기쁨에 약간 들떴던 것 같다.

호수에 유람선이 떠있고, 회전목마가 돌고, 부근 식당과 카페에서 네온사인과 불빛이 명멸했다. 산 밑에 교회를 짓느라 철근과 시멘트를 드러낸 보기 흉한 몰골 위로 삐죽 올라간 십자가상도 보였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는데도 하늘이 부옇고 음산한 게 왠지 세기말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발밑에선 차소리, 음악소리, 확성기에서 호객하는 소리… 각종 도시의 소음이 뒤섞여 윙윙 대는데, 내 등 뒤엔 둥지를 찾는 까치 울음. 그리고 이천팔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파헤쳐져 누워있다. 그 과거와 현재의 극적인 교차 속에서 나는 좀 센티멘털해졌다. 이 모든 걸 기억하며 저 푸른 바다는 영원하겠지. 짧게 인류의 역사가 흘러갔고, 나도 흘러갔고, 당신도 흘러갔다.

안녕 무모했던 날들이여, 안녕 이십세기여

그렇게 달콤한 무상함에 젖어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였다. 잿빛 구름 사이로 태양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빛나는 둥근 해가 머리 위에서 날 굽어보고 있었다. 지는 햇살이라 눈이 별로 부시지 않아 난 얼룩얼룩한 태양의 무늬까지 본 것 같다. 구름과 태양이 서로를 가릴듯 말듯 천천히 움직이며 리드미컬한 드라마를 연출하다, 곧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건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이었고 나는 감격했다.

그날밤 청간정엔 달이 뜨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내 작은 방에 틀어박혔다. 집안의 전등을 모두 끄고 촛불을 밝힌 다음 고요한 가운데 일기장을 뒤적였다. 거기 적힌 “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는다” 는 희랍인 조르바의 맹세를 음미하며 한해를 뒤돌아보았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새천년. 자정이라는 걸 알았다. 베란다에 서서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빨강, 초록, 노랑, 보라… 형형색색의 불꽃들, 인간이 하늘로 쏘아올린 장난감들이 지상의 네온사인들과 섞여 밤하늘을 수놓다 사그라지는 걸 지켜보며 난 아까 보았던 선사시대 집터를 떠올렸다. 배수를 위해 진흙 고랑을 파고 움집을 지어 살았던 사람들을, 불씨 하나 지키려 며칠씩 잠 못 이루고 온 가족이, 씨족이 매달렸을텐데… 그 귀한 생명의 불씨를 몇천년이 지나 우리는 이렇게 낭비하고 있다니. 난 전세계에서 터졌을 어마어마한 양의 불꽃들을 상상했고, 내가 옛날에 헛되이 쏘아올렸던 마음의 불꽃들을 생각했다. 내것이 아니었던 열망들에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난 돌아섰다. 안녕. 무모했던 날들이여. 안녕. 이십세기여.

마지막 남은 포도주를 마저 비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 쓸 글의 첫 문장을 열에 달떠 두드릴 것이다. 저 캄캄한 우주에 가득한 고독만큼, 내 꼬인 위장의 쓰라림만큼 진실한 한 문장으로 새해가 시작되고 새로운 나의 인생이 열릴 것이다. 난, 어둠을 뚫고 나오는 태양. 어둠을 잊지 않는 해가 되고 싶다.

신동아 2000년 2월 호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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