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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의 족쇄,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라”

‘양심적 지식인의 살아 있는 표상’노엄 촘스키 인터뷰

  • 장영준 중앙대 교수·언어학

“가난한 자의 족쇄,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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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한국민이 아니라 국제투자가들입니다. 한국민들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은행과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비용을 국민이 떠안은 셈이지요.” 》
노엄 촘스키 교수의 연구실 정면에는 버트런트 러셀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나를 지탱한 세 가지 열정은 사랑의 갈구, 진리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라는 러셀의 매니페스토와 함께 -. 비서의 안내를 받아 잠시 기다리자 촘스키 교수가 예의 그 유명한 미소를 지으며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촘스키를 소개하는 상투적 꼬리표는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뉴욕타임스), ‘인류 역사상 여덟 번째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시카고 트리뷴) 등 언론의 평가로부터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가장 예리하고 끈질긴 사회비평가’라는 학계의 평가까지 무척 다양하다. 지금까지 1000여 편 이상의 논문과 8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세계 유수의 대학과 기관으로부터 수많은 명예학위와 영예상을 받았다.

변형생성문법으로 알려진 촘스키의 언어이론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로 쓰여진 ‘언어이론의 논리구조’가 1955년에 발표된 이래 기존 언어학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서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구조주의 언어학은 촘스키의 새로운 언어이론으로 일거에 대치됐고, 변형생성문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 언어학의 대명사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촘스키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4년 베트남전 반대 데모와 그가 66년 ‘뉴욕타임스’에 발표한 ‘지식인의 책무’란 에세이를 통해서였다. 이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사회비평가로 미국의 개입주의적 외교정책이 내포한 야만성을 신랄하고도 끈질기게 폭로하고, 동티모르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왔다.

촘스키 교수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심각한 왜곡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 중에서 언어학 관련 저서는 고작 스무 권 남짓이다. 나머지 대다수 저작들은 사회비판과 정치분석, 언론분석을 다루고 있으며, 언어학 강의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정치 강연에 할애하고 있다. 평소 그의 언어학 강의에는 전세계에서 300∼500명의 학자가 참석하지만, 그의 정치강연에는 2000∼3000명의 청중이 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도 그는 ‘최소주의’라 불리는 자신의 언어이론을 한층 심화하며 왕성하게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방대한 양의 책자와 세계 도처에서 하는 강연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본질과 폐해를 파헤치는 작업에서부터 코소보나 르완다 등에서의 인권유린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강대국에 의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이면 베트남이건 남아공이건 니카라과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실태를 고발하는 그의 철저한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더 나이만은 “세상이 제정신이라면 촘스키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는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인물에게 노벨상을 바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1955년 MIT에 자리를 잡은 이래 언어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미국 외교정책 비판과 인권운동을 포함한 끝없는 도전을 시작한 이래 거의 반세기 동안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온 촘스키의 삶은 현대판 오디세이아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 촘스키, 정치비평가 촘스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근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건강은 아주 좋습니다. 며칠 전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곳에서도 아주 많은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28년 생이시니까 올해 72세가 되시고….

“잠깐만요. 장교수는 내 나이를 늘리는군요. 미국 나이로는 아직 71세인데, 아마 한국 나이로는 72세가 되겠군요.”

―그렇군요. MIT에서 교편을 잡으신 후 현대언어학의 창시자로, 또 끈질기고 철저한 사회비평가로 활동하신 지 올해로 약 45년이 되었습니다. 질풍노도 같은 교수님의 삶을 회고한다면 어떤 보람이나 아쉬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군요. 제 말은 성취가 있었다면 그것은 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언어학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구조주의로 대표되던 45년 전과 비교해볼 때 언어학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연구 주제와 토픽들이 떠올랐지요. 오늘날의 연구 성과는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45년이 아니라 단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주제들이 오늘날 연구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언어뿐 아니라 시지각이나 인지과정을 포함한 인간 본질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분석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45년 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는 행동주의 과학이 압도적으로 군림하던 시기였습니다. 행동주의와 학습만능주의가 지배적인 세계관이었어요.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언어 및 언어관련 학문은 극도로 얄팍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물의 배열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모든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주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요한 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언어학적 측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정치적인 면에서 같은 질문을 드린다면 어떻습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 사회가 좀더 문명화했고, 일정 부분은 그런 조류가 계속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동적 흐름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고,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말은 소위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점점 더 공격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에 족쇄를 매야”

―화제가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씀을 나누기 전에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교수께서는 전기나 자서전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후세를 위해 회고록을 집필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그런 계획은 없습니다. 사실 엄청난 회고록 집필료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입니다.”

―온 세상이 뉴 밀레니엄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는 야만적인 대소 규모의 전쟁, 전체주의 실험, 인권유린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실험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수께서는 지난 세기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밀레니엄이란 단어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장교수께서 질문을 하시니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수밖에요. 20세기의 교훈은 19세기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교훈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조간신문을 보면 르완다의 학살에 대한 유엔의 자세한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이런 학살로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교수께서 미국에 있다면, 미국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이러한 학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교훈은 국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국가 권력을 제한할 수 있어야 국가가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참여야말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것을 60년대에는 다른 용어로 부르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명령을 맹종한다면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일부 관측가들은 촘스키 교수를 무정부주의자로 보지만, 그 스스로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 자처하면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사상적 젖줄을 대고 있고, 루소·훔볼트·오웰 등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의 찬미’에서 묘사한 무계급의 평등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무정부주의적 사회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버트런트 러셀과 존 듀이를 흠모하는 그를 통해서, 우리는 에밀 졸라처럼 앙가주망(사회참여)을 통한 좋은 사회건설을 제1의로 삼았던 지식인의 한 전범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 초국적기업(megacorporations)들은 ‘테크노피아(technopia)’를 노래하고 있고, 많은 지식인들은 ‘초위기(megacrisis)’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떤 것입니까?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류가 한순간에 파멸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 온갖 수단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핵무기나 다른 대량 살상무기가 그 한 예지요. 그리고 그런 위험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소보에서의 폭격은 핵 확산의 위험성을 증가시켰음이 명백하지만, 이런 사실은 미국에서는 잘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보호국인 이스라엘에서조차 전략분석가들이 이런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류파멸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여간 이러한 대량 살상무기의 위험에 더하여 환경파괴야말로 인류를 파멸시킬 정도에 이르렀고,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장기적인 과제라고 볼 수 있다면, 21세기에 뿐 아니라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들이 있습니다.

현재 아프리카에는 에이즈로 인해 400만, 곧 4000만이 될지도 모르는 고아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의약품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세계의 엄청난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수백만 여성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여 출산 과정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정말 시급한 문제들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라는 미국에서조차 약 3000만명이 배고픔을 겪고 있고, 25%의 아이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 빈부격차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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