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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허준 추적 10년의 진실

경상도 아닌 호남 출신, 스승 유이태는 후대 인물

  • 김호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경상도 아닌 호남 출신, 스승 유이태는 후대 인물

  • 《‘소설 동의보감’을 원전으로 한 MBC 인기 드라마 ‘허준’은 얼마나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가? 10년간 허준의 실체를 쫓은 끝에 찾아낸 결론은 허준이 호남을 무대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단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가볍게 다가서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중하고도 날카로운 진실의 심판과 같이 무거운 이미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역사에 진실이 있는 것일까? 또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다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학의 오래된 인식론적 논쟁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최근 미국의 한 급진적인 역사학자가 역사가의 사실(史實) 탐구는 소설가의 창작 과정과 유사하다는 논리를 편 후 급기야 ‘역사=소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역사학과로부터 내쫓긴 적이 있다.

물론 그는 기존 역사학계의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을 겨냥해 이런 비판을 가한 것이지만, 역사학자의 작업이 과연 소설 같은 창작 활동일 뿐일까?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닐까? 물론 창작을 하는 소설가의 어려움이나 그 결실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소설과 달리 역사학은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매우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여기며, 그 작업은 어떤 일이 있어도 중단할 수 없는 역사학의 소중한 과제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역사상 인물 중 한국인에게 친근한 사람으로 허준이 있다. 이미 ‘소설 동의보감’이라는 감동적인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인간미 넘치는 의료인으로 다가섰던 허준, 그러나 과연 소설 속에 그려진 주인공의 모습은 사실일까? 최근 그의 삶을 드라마로 재조명한 MBC 드라마 ‘허준’은 또 얼마나 그의 진실을 전해주고 있을까?

필자는 강의 시간에 간혹 학생들에게 역사의 진실과 허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소설 동의보감’은 이 주제의 단골 소재로 오를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소설 동의보감’ 가운데 역사적 사실은 ▲허준이 의사이다 ▲허준이 선조∼광해군대에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하였다는 사실 등 단 몇 가지뿐이라고 말하는 순간 많은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다. 그럼 도대체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누구냐? 허준의 의학계 라이벌인 양예수는 또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허준의 부모와 형제, 그의 신분은? 등등 학생들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학생들의 반응은 그동안 소설과 드라마 등이 허준을 정확지 않게 그리며 오해를 계속 부풀린 결과였다.

물론 필자는 소설이나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하였다고 해서 그 책임을 추궁하거나 진위 여부를 두고 시비를 벌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가 할 일이 있고 역사학이 지닌 임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혹은 드라마라고 해서 정확한 역사 고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의 논문에 비해 한 편의 소설, 그리고 드라마가 가진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동의보감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학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가로서 허준의 실체를 찾아나선 지 수년. 갖은 고생 끝에 그 컴컴하고 어두운 사료(史料)의 터널을 빠져나가 희미하게나마 허준의 실체를 알게 된 기쁨이 크다. 그리고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 시점에 허준의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려는 역사학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다.

허준을 찾아서

91년부터 허준의 생애를 고찰하기 시작해던 필자에게도 허준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조선시대의 의사에 대해 정말이지 이렇게도 자료가 없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줄곧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한국인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명의 허준이 문집은커녕 어디 출신인지, 누구한테 배웠는지조차 밝혀줄 사료가 없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한국사 자료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자료는 양반과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상층부에 관한 기록일 뿐이다. 중인 이하의 신분층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하였다. 설사 그들이 글을 남겼다 하더라도 양반들의 개인 문집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이것만으로 그들의 역사를 복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 허준의 실체를 찾기 위해 16세기 중·후반 사료를 정말 닥치는 대로 읽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필자는 모래밭에서 동전을 찾는 일을 한 셈이었다. 수년 동안 허준에 관한 기사를 단 한 건도 찾지 못한 적도 있다. 힘이 빠진 필자는 94년 즈음에 허준의 생애를 추적하는 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허준의 생애를 알아보는 일에 정력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16세기의 관인(官人)이자 유학자였던 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만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거기에 허준에 관한 몇 가지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매다가 앞길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을 만난 감흥을 받았다.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 유희춘은 전남 출신의 유명한 학자로 선조연간에 정치가로서도 중요한 활동을 한 인물. 그 유희춘의 일기에 허준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문으로 쓰인 방대한 양의 일기책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읽어나갔다.

‘미암일기’를 독해하는 일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일기체에서 흔히 나타나는 간단한 생략과 축약, 그리고 낯선 인명과 지명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일기는 허준의 생모를 추적할 수 있도록 암시하는 구절 등 허준이라는 보물을 찾는 데 필요한, 암호로 쓴 지도와도 같았다.

먼저 유희춘은 ‘미암일기’에 자신을 방문한 김시흡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두었다.

‘봉사(奉事) 김시흡(金時洽)은 효자 부정(副正) 김유성(金有誠)의 손(孫)이며 허준의 적삼촌 숙부(嫡三寸 叔父)이다’.

이 한 구절은 유희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 토막의 언급으로 말미암아 보물탐험가인 필자는 허준의 가계를 새로 밝혀나갈 수 있었다.

왜 유희춘은 김시흡이라는 사람을 허준과 연결해 기억하려고 했을까? 필자는 유희춘이 돼서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유희춘으로서는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던 허준이라는 정보를 통해 김시흡의 신상을 정리·기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적삼촌 숙부란 말은 도대체 허준과 어떤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간 중단했던 추적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하여 허준의 성장이 전라남도와 밀접하다는 사실,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된 사실, 그리고 또 다른 호남 사림(士林)인 노수신의 영향을 받아 지은 양생론(養生論) 등에서 보여주듯이 허준과 그를 둘러싼 당시 사상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허준의 생모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가장 컸다. 그동안 허준의 어머니는 ‘양천허씨세보’에 근거하여 손(孫)씨 부인으로 알려져왔다. 심지어 모 방송 드라마에서는 허준의 어머니를 퇴기(退妓) 정도로 치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방 양반인 영광김씨 김욱짐의 서녀(庶女)였던 허준의 어머니는 허준의 아버지 허론이 전라도 부안에 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첩으로 시집와 서자 허준을 낳았던 것으로 추론된다.

그런데 허준의 생모가 영광 김씨라는 사실은 필자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다. 필자 역시 영광 김씨이기 때문이다. 영광 김씨는, 필자가 초등학교 입학 후 대학에 다닐 때까지 가까운 친척 외에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만큼 희귀한 본관이다. 그러니 허준의 생모가 영광 김씨라는 사실을 안 순간의 그 운명적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하나 허준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면서 필자는 꿈속에는 허준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허준에 너무 집착했던 탓일까?

허준과 유의태 관계는 근거없다

필자에게는 또 한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굳게 믿게 해준 사건이었다. 1999년 역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던 모 방송국에서 허준을 기획하고 있다면서 도움을 청해왔다. 조선시대 의학사를 전공하는 필자의 조언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조선시대 의료사를 전공했지 허준 개인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력을 많이 들이고도 허준의 생애에 대하여 뚜렷한 소득이 없던 터라 선뜻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약간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연이 되었던지 제작팀을 돕기로 한 필자는 뜻하지 않게 방송국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방송 제작팀이 진주의 얼음골을 찾아나섰다가 진주박물관에서 허준의 생년을 알 수 있는 ‘계회도(태평회맹도병풍)’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허준과 관련이 있는 양 알려진 진주의 얼음골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상상과 허구에 불과한 곳이긴 하지만….

어쨌든 역사학자의 게으름을 언론의 발빠름으로 보완하였다고나 할까. 박물관에서 우연히 얻은 도록은 1604년 허준을 포함해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나선 선조를 수행하였던 공신들의 모임을 담은 병풍 그림이었다. 여기에는 허준이 중종 34년(1539)에 출생한 것으로 명확히 기록돼 있었다.

그동안 허준의 출생연도는 ‘양천허씨세보’를 근거로 1546년 혹은 1547년설이 세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자료가 모두 허준 사후 수백년이 지난 자료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 1604년, 허준이 살아 있을 때 제작한 이 그림의 사료적 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허준의 생애에 대한 사료를 수집하고 또 연구하면서 노력한 결과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또 상세하지도 않다.

그저 다음에 적은 몇 가지 사실과 추론이 고작이다. 이것들을 알기 위해 허비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정말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필자의 중간 보고는 다음 몇 자에 불과하니 실망하시지 말라.

그럼 소설과 드라마 등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되고 있는 유의태(유이태)는 누구인가? 그는 18세기 후반 숙종연간에 살다간 인물로 ‘마진편’이라는 홍역 전문 치료서를 저술한 지방 의사다.

의병장의 후손인 그는 산청과 진주·합천·거창 등지에서 많은 사람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낸 신의(神醫)로 명성이 자자했다. 산청 등지에는 그에 대한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가 저술한 ‘마진편’은 조선후기 홍역과 천연두 치료 의학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의서로 정약용의 ‘마과회통’보다 앞서 발간된 것이었다.

역사학의 정체성

혹자는 허준의 생몰년을 알아내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고 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가들의 연구가 과거의 개인사를 추적하거나 호고적(好古的)인 관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의 구조와 변동이라는 큰 흐름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다양한 삶과 사고의 유형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필자 역시 허준의 개인사만을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허준을 둘러싼 16세기 중·후반 조선 지식인들의 사상적 동향 그리고 허준과의 관계 등을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역사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흔들리지 않는 사실-대표적으로 연대기적 사실-로부터 개연적인 사실로 확장해가면서 풍부한 살붙이기를 하고 있다. 이 살붙이기 과정을 그저 상상력을 동원한 창작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작업은 사료를 비판하고 분석하고 또 추론하는 과학적 엄밀성을 더욱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형성해가는 역사가들의 작업이 소설가의 집필 과정과 전혀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확고부동한 사실로부터 개연적인 사실로 확장해갈 때 역사가들의 역사적 상상력-이는 자유로운 소설적 상상력과 대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해 본 단어다-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역사학적 상상력조차 아무런 근거없이 순수하게 상상하거나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아무리 해석을 가하더라도 바뀌지 않을 역사적 사실들-앞서 언급한 연대기적 사실과 같은 기초적인 진실-조차 검증하지 않은 채 그저 상상의 나래만 펼친다면 그는 진실을 탐구하는 역사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

이렇게 허준의 생애를 추적해온 과정을 두서없이 늘어놓으면서 역사학의 임무를 강조하는 이유는 역사적 실체를 찾는 일의 어려움과 진지함을 알리고 또 하소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역사학을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역사가라고 칭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실한 역사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엄정성과 진지함에서 나오는 땀방울 때문이다. 이 땀방울을 흘려보지 못한 자라면 누구도 역사학자라고 불릴 수 없으며 또 ‘역사’를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동아 2000년 3월 호

김호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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