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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⑨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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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화하는 미륵보살 ]

남조 송(宋)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2년(455)에 북량(北凉) 시조 저거몽손(沮渠蒙遜, 386∼433년)의 사촌아우인 저거경성(沮渠京聲)이 번역한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권1에서는 미륵이 열반에 든 후 도솔천으로 올라가 보살이 되어 그곳의 천수인 4000세, 즉 56억7000만년을 지내고 나서 지구에 다시 내려와 성불한 다음 미륵불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월지(月氏)보살 혹은 돈황(敦煌)보살로 일컬어지던 돈황 출신 월지족 계통의 축법호(竺法護, Dharmaraka, 曇摩羅察, 241∼313년)가 번역한 ‘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 1권(303년 번역)이나, 구자(龜玆) 출신의 대역경사인 구마라습(鳩摩羅什, Kumrajiva, 343∼413년)이 번역한 ‘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 1권(402∼412년 번역) 및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 1권(402년 번역) 등에는 언제라는 기약 없이 미륵이 하생(下生; 내려와 태어남)하여 성불하는 내용을 소상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그래서 난세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미륵을 어서 만나 경전에서 말한 대로 살기 좋은 미륵불국토에서 걱정없이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앙 형태는 중국의 5호16국 시대에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민족의 침략과 상호쟁패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현실이 지옥으로 변하였던 탓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상생하기를 희망하는 내세적 성향이 강하여 ‘미륵상생경’을 독송하고 이를 신앙한 듯, 상생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생미륵보살상을 주로 조성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돈황 막고굴 제268굴 본존 미륵불교각좌상’(제4회 도판 7)이나 ‘운강 17동 본존 미륵보살교각좌상’(제5회 도판 8) 등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여기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 연구원인 단문걸(段文傑)이 미륵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돈황 제275굴을 조사 연구한 결과 교각좌상(交脚坐像)은 상생미륵보살이고 반가좌상은 하생미륵보살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얘기도 했다. 그래서 460년 경부터 496년 경까지 근 40여년에 걸쳐 조성된 북위 운강(雲岡) 석굴에서도 대부분의 미륵보살상은 상생미륵보살인 교각좌상으로 조성돼 있고 반가좌상은 그 협시보살로 표현되고 있다.(도판 1)

그런데 이 미륵교각좌상이 시대가 내려올수록 여성화하는 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운강석굴 최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랑스 세르누시미술관 소장의 ‘미륵보살교각좌상’(도판 2)을 통해 구명해볼 필요가 있다.

운강석굴 제15동과 제16동 사이에 작은 굴실이 경영돼 있는데, 이를 분류 편의상 15A동이라 부른다. 이 석굴의 조각 양식은 제5동과 제6동 양식이 진전된 것이어서 490년 경에 조영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석굴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걸치는 중국의 혼란기에 유럽과 미국인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주존(主尊)이라고 할 수 있는 북벽(北壁) 상층(上層) 중앙 감실(龕室)의 ‘미륵보살교각좌상(彌勒菩薩交脚坐像)’은 미국인에 의해 완전히 떼어내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북벽 중층 동쪽 감실은 프랑스인에 의해 파리의 세르누시미술관으로 이전되었다.

여기 들고 있는 ‘미륵보살교각좌상’은 운강석굴 제15동 북벽 중층 동쪽 감실에서 떼어내 세르누시미술관으로 옮겨놓은 보살상이다. 이 동쪽 감실은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 댄 나무)가 촛불꽃 형태의 변형인 뾰족끝 받침 감실 속에 봉안된 중앙의 포복불좌상(袍服佛坐像) 좌우로 안배된 협시감실의 하나인데, 서쪽 감실에도 같은 형태의 보살상이 안치돼 있다.

일본인 학자 장광민웅(長廣敏雄)과 수야청일(水野淸一)이 조사할 당시(1938∼1942년)에 이미 동쪽 감실은 비어 있었다 한다. 이 감실은 지붕의 단면을 연상시키는 눈썹받침 감실인데, 문미 아래로 삼각형 내리닫이 장식과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눈썹받침 표면에는 비천(飛天) 8구가 각 구간에 하나씩 부조(浮彫; 돋을새김)돼 중심을 향해 좌우에서 마주 날게 되어 있다. 감실과 감실을 나누고 있는 문설주 표면에는 머리 깎은 비구와 상투를 높게 틀어올린 천인(天人)이 2열 종대로 내리 부조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보살상은 큰 연꽃잎 네 개가 둥근 테 위에 전후좌우로 높이 세워진 연화관을 쓰고 있는데, 큰 연꽃잎 끝부분 사이에는 활짝 핀 둥근 연꽃을 끼워 넣어 장식하였다. 이런 연화 보관(寶冠)을 탐스러운 머리칼 위로 높이 쓴 것 이외에는, 촛불꽃을 거꾸로 매단 듯한 심엽형(心葉形; 심장 형태 즉 하트 모양)의 목걸이가 보일 뿐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한 자태다.

그러나 의복은 천의(天衣)가 여인의 상의(上衣)를 상징하는 듯 양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덮이면서 그 자락이 배꼽 근처에서 X자로 교차하는 독특한 북위식(北魏式)을 나타내, 조성연대가 490년 경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옷 입는 법과 층진 옷주름 같은 천의의 표현은 포복불(袍服佛) 양식과 동시에 출현하는 보살의 의복 표현법이기 때문이다. 입상(立像)의 경우는 치마의 옷주름이 바로 포복불의 옷주름과 같이 분명히 층진 표현을 보이는데, 이 경우는 옷주름선이 세워서 교차시킨 양무릎을 따라 깊이 파여 있을 뿐이다.

목걸이의 불꽃머리 형태가 비교적 길게 표현되고 그 끝이 예리하게 빠지고 있는 것도 이 보살상의 조성 연대를 짐작케 하는 요소이고, 가늘어진 목과 조금씩 넓어지는 얼굴, 그리고 부드러워져 가는 어깨의 곡선 등도 시대양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 보살을 여성화시킨 이유 ]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보살을 점차 여성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노골화하는 듯하다. 이 상에서도 얼핏 느낄 수 있는 것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이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한껏 부드러워진 곱상한 얼굴,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깊이 미소지어 자애가 가득한 표정, 부드러운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통)의 표현, 가는 허리 등이 모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인체적 특징이다.

다만 유방 표현이 없을 뿐인데, 수염이 짙던 간다라 조각의 남성보살상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변화라 할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그리스 조각에서 인체미의 이상적 형태로 양성(兩性)의 특장(特長; 특징적인 장점)을 추출하여 만들어낸 헬마프로디테와 같이, 북위인(北魏人)들이 양성의 인체적 특장이라고 생각하는 인체미를 조합해 만들어낸 이상적인 인체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양대(兩大) 조각을 비교해볼 때 이상적인 인체미도 동·서양인이 서로 상반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북위인들이 보살을 여성화시켜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는 중국천하가 대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난세(亂世)에는 남정네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쟁패(爭覇)의 과정에 끊임없이 소모되니 그나마 종족을 보존시켜 나가려면 자연히 여인들의 모성애에 의존할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층천민(下層賤民)으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이르기까지 다같이 겪어야 하는 사회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이 곧 모성애(母性愛)의 상징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이에 실제로 현세구원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보살을 자모상(慈母像)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나 한다.

거기에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투철하여 세상만물에는 음양의 섭리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부처님이 남성신(男性神)이라면 그 좌우에 시립(侍立)하는 보살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 은근히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사회여건 아래에서 보살이 여성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5세기 말 북위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급진전한 것은 북위제실(北魏帝室)이 안고 있던 여권우위적(女權優位的)인 현실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북위의 탁발씨(拓跋氏)는 당시 북중국에서 발호하던 강호(强胡)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이루었으므로 그 성장과정에 무진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한 고초 속에서 제실의 혈맥을 보존하여 나라를 이룩한 것은 역대 황후(皇后)들의 결사적인 모성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위서(魏書)’ 권13 황후열전(皇后列傳)에 의하면 전체 27후(后) 중 8후가 국난을 수습한 공로가 있다.

자연 그중에서는 간정(干政)까지 하려 드는 여걸(女傑)들이 나오게 되었으니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인 문명태후(文明太后) 풍씨(馮氏, 442∼490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명태후는 헌문제(獻文帝, 465∼471년)와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양대(兩代)에 걸쳐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 헌문제를 시해(弑害)하는 대역(大逆)을 저지르기도 한다.

따라서 효문제는 문명태후에게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문명태후는 황제의 권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모든 신민(臣民)의 화복(禍福)이 그녀의 손에 좌우되니, 그녀의 눈에 들기만 하면 하룻밤 사이에 졸오(卒伍)에서 장상(將相)의 열(列)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런 여권(女權)의 전횡이 보살의 여성화를 재촉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 한국에서 꽃핀 미륵 하생 신앙 ]

그러나 북위의 통일(439년)로 중국 대륙이 남북으로 나뉘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차차 미륵이 하생하여 현세를 이상적인 미륵 불국토로 만들어주기를 희망하는 현세적인 성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축복받은 자연조건에서 농업문화를 일으켜 왔기 때문에 지극히 현세적인 사고(思考)를 하는 중국적인 전통이 되살아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신앙이 섭정으로 대권을 장악한 문명태후의 출현과 맞물리며 미륵보살의 하생으로 연결되는데, 북위 후반기인 효명제 희평(熙平) 원년(516) 이후부터는 하생한 미륵보살상인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이라는 독특한 단독 보살상 양식이 유행하게 된다. ‘영청문고 소장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제8회 도판 13)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미륵신앙이 우리나라에도 곧바로 영향을 끼쳐왔는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결같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양식 발전이 절정에 이르러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의 상양식이 이때 우리나라에서 마무리지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미륵하생신앙이 극대화한 이유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륵하생경’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미륵하생경’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석가모니불이 기원정사에서 500 비구와 함께 계셨는데 아난이 장래 미륵이 출현하여 정각(正覺)을 얻은 다음 어떻게 세상을 교화해 가는지 알고 싶다고 하자 석가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먼 훗날 이 땅에 한 나라가 있고 그 수도 이름은 시두(翅頭)성이라 할 터인데 동서가 12유순(由旬, 1유순은 80리), 남북은 7유순이며 토지는 비옥하고 풍성하며 백성들은 넘쳐나 길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 때 그 성중에는 수광(水光)이라는 용왕과 섭화(葉華)라는 나찰(羅刹)귀신이 있어 한밤중 사람이 잠든 틈에 도성의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향을 뿌리며 비를 내려 항상 성안을 깨끗하고 향기롭게 한다.

그때 지구의 넓이는 동서남북이 1000만 유순에 이르고 사방 바다는 물깊이가 1만 유순이나 감소하며 산과 구릉이 모두 소멸하여 거울 같은 평지가 될 것이고 곡식이 풍성하여 천하게 되며 사람이 들끓고 진귀한 보배가 많으며 마을은 서로 가까워 닭 우는 소리가 이어진다. 시들어 말라죽었거나 냄새나는 과일나무는 모두 저절로 없어지고 그 나머지 감미롭거나 향기가 더욱 좋은 것들만 땅에서 자라며 4계절이 절기에 맞고 사람의 몸에는 병이 없으니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고 인심이 평균하여 서로 보면 기뻐하고 좋은 말만 하는데 말이 한 종류라 차별이 없다.

대소 인민에 차등이 없고 남녀간에 대소변을 보고자 하면 땅이 저절로 열렸다가 보고 나면 문득 도로 합쳐지며 껍질 없는 찹쌀이 저절로 달리는데 지극히 향기롭고 아름다우며 먹으면 병이 없다. 금은 진보와 차거, 마뇌, 진주, 호박 등 각종 보배가 땅에 흩어져 있으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가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집어들고 서로 이렇게 말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물건 때문에 서로 해치고 옥에 갇혀 무수한 고뇌를 받았다 하는데 지금은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이때 양거()라는 전륜성왕이 이 시두성에 출현하는데 7보(寶)가 따라나와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구제한다. 그런데 양거왕에게는 수범마(修梵摩)라는 대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무엇이나 같이 좋아하고 서로 몹시 사랑하며 존경했다. 수범마는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빼어났으며, 수범마의 아내 범마월(梵摩越)도 마치 천왕의 왕비처럼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입에서는 연꽃 향기가 나며 몸에서는 전단향기가 나고 질병이 없으며 어지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일등 미인이었다.

이에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가 이들을 부모로 택하기로 결정하고 범마월에게 입태하여 석가모니불처럼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한다. 수범마는 이 아들을 바로 미륵이라 이름짓는데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춘 일등 미남으로 몸빛은 황금색이었다. 이때 사람의 수명은 8만4000세로 여인들은 500세가 되어야 비로소 출가(出嫁)하였다.

미륵은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출가(出家)하는데 시두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화수(龍花樹)라는 성수(聖樹)가 있어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정각(正覺)을 얻는다. 나무 크기는 높이가 1유순, 너비가 500보(步)였는데 출가한 그날 밤에 이곳에서 대각을 얻어 미륵불이 된다.

석가모니불이 6년을 고행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쉬운 과정을 거친 것이다. 더구나 미륵이 성불하고 나자 제6천주(天主)인 대장(大將)마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해 7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좋아하면서 욕계의 무수한 천인을 이끌고 와 미륵불에게 공경 예배한다 하니 석가모니불이 대각을 이룰 당시 제6천주인 마왕 파순(波旬)이 이를 방해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여하튼 미륵은 성불하여 미륵불이 된 다음 대장마왕이 거느리고 온 8만4000 천자부터 교화하기 시작하여 시두성의 부호인 선재(善財)장자가 거느리고 온 8만4000인 및 양거왕이 거느리고 온 8만4000 범지와 그 부모인 수범마와 범마월이 각각 거느리고 온 16만8000인 등을 제도하여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n; 스승의 말을 듣고 깨닫는 聲聞乘의 최고 경지, 생사윤회에서는 벗어난다)를 증득하여 해탈케 한다.

그리고 나서 석가모니불이 상수제자인 가섭(迦葉)으로 하여금 미륵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한 금실로 짠 가사(袈裟)를 전해 받기 위해 마가다국 비제촌(毘提村)으로 대중을 이끌고 가 가섭으로부터 금루가사를 전해 받는다. 이 과정에 또한 무수한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되니 이것이 초회(初會)설법으로 96억인이 아라한과를 얻는데, 이들 모두가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받거나 석가모니불에게 공양을 바친 인연이 있는 제자들이었다.

미륵불은 가섭으로부터 전해 받은 승가리(僧伽梨, 大衣 袈裟)를 입은 다음 가섭의 신체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 갖가지 꽃과 향으로 공양하고 나서 제2회, 제3회 설법을 행한다. 제2회에는 94억인을 제도하고 제3회에는 92억인을 제도한다. 이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의 교화시대에 그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미륵불은 8만4000세의 천수를 누리고 열반에 드는데 남긴 법도 8만4000세 동안 이어진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미륵하생성불경’이나 ‘미륵대성불경’ 줄거리는 거의 같다. 다만 내용이 훨씬 풍부한데 그중에서도 ‘미륵대성불경’이 가장 상세하다. 미륵이 하생하여 출현하는 나라엔 곧 전쟁도 없고, 가난도 없으며, 미움도 욕심도 없고 화낼 일도 없으며, 곡식은 지천으로 널려 있고, 의복조차 나무에서 열리며, 사람은 병들지 않고, 감미로운 과실은 곳곳에서 자생하며, 사람마다 평등하여 서로 보면 반가워하고, 금은보화는 보배로 여기지 않을 만큼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담긴 경전들이 우리에게 전해질 당시 우리 사정은 이와 정반대였다. 고구려 장수왕(413∼491년)이 백제 수도 위례성을 함락한(475년) 다음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이 이어져 고구려나 백제의 백성들은 전란에 시달리지 않는 때가 하루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틈에 신라 진흥왕(540∼575년)까지 끼어들어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잠식해 나가면서부터(550년)는 삼국 백성 모두가 하루하루 전쟁에 시달리는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삼국백성들은 모두 ‘미륵하생경’에서 말하는 미륵 하생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평화와 안녕, 풍요와 안락이 깃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각기 자기가 사는 땅에 먼저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게 되었고 그런 소망을 믿음으로 키워갔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를 민심 결집 수단으로 적극 수용하여 국가의 주도이념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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