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반닫이

  • 장생주 목포 신흥초등학교 교사

    입력2006-11-15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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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허름한 물건이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물건이다. 손잡이는 이미 떨어져 나간 지 오래고, 장식물 또한 동강난 것, 아예 떨어져 버린 것, 녹슨 것, 모두가 하나같이 볼품없다.

    그래도 앞면은 반들반들 윤기가 남아 고풍스러운 데가 있다지만 옆면이나 뒷면은 아예 신문지를 붙여둔 게 너덜너덜 볼썽 사납다. 이게 내 집의 가보 격인 반닫이다.

    반닫이는 내 어머니가 아끼시는 소중한 물건이다. 이건 본시 어머니의 친정어머니가 쓰시던 것인데 어머니가 살림을 나면서 가져오신 것이라니 아마 백년도 더 되었을 고가구다. 어찌 보면 이제 수명이 다 된 듯한 고물이요, 고물상에 내다 주어도 선뜻 받아줄 것 같지 않은 물건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물건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다. 하기야 어려서부터 친숙했던 게 금년 아흔네 살 되시도록 옆에 두고 계셨으니 정이 갈 만도 하리라.

    어머니.

    어머니는 21세기를 살아가시는 오늘에도 항상 구시대적 사고와 생활을 고집할 때가 많으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옛것을 간직하려 들고 고수하려 드신다. 그러나 시류는 어쩌지 못함인가?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안방에도 새로운 물건들이 한둘 찾아 들어와 고가구들을 하나둘 밀어냈다. 그런 와중에도 반닫이만은 여전히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의 행동 반경이 좁아졌다. 노쇠하셔서 바깥 출입도 않으시고 집안에서만 소일하신다. 그러한 어머니는 아무래도 이 볼품없는 가구를 만지는 일이 생활의 소중한 일부가 되신 것 같다. 어머니는 이따금 이 허름한 반닫이에서 무엇인가 꺼냈다가는 다시 넣어 두시기도 하고 넣었다가는 다시 꺼내신다. 아들도 며느리도 손자도 손녀도 궁금한 그 무엇인가 소중한 것, 아끼는 것을 간직하시는 품이 무척 조심스럽다.

    어머니.

    그렇게도 알뜰살뜰 장만했던 가구들도 내 고향 오두막집을 팔고 읍내로 이사올 때 다 버리셨던 분이다. 20리 머나먼 읍내 장에서 아버지가 손수 지게로 져오셨다는 돌절구통이며 장날이면 어렵게 하나씩 둘씩 사 모았다는 장독들도 버리신 분이다. 어디 그뿐인가? 생명처럼 아끼던 논이며 밭도 버리셨고 지게 작대기, 함지박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도 아낌없이 버리셨던 분이다. 그런데 반닫이만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다.

    반닫이.

    이따금 나는 그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반닫이는 그저 어머니의 애환이 서린 물건이거니 생각했으나 그것만은 또 아닌 것 같다. 반닫이는 구순 노모님의 주머니요 바구니요 금궤 구실을 하는 소중한 보물이다. 반닫이 속엔 어머니의 삶이 들어 있다.

    반닫이 속엔 어머니의 사랑이 들어 있다.

    반닫이 속엔 어머니의 소망이 들어 있다. 어느날 친정에 온 딸에게 문득 꺼내 보여주시던 조그마한 보자기 하나. 당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셨다는 사성보란다. 면도 같고 마포도 같은 헝겊 조각, 손수 장만한 보자기. 사주단자를 쓴 혼서지를 쌌던 보자기일까?

    사성보를 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는 어머님! 이제는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는 나이든 딸네와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반닫이 속의 보물 탓이리라. 어느 땐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 손녀가 칭얼댈 때 살그머니 반닫이 문을 열면 어김없이 사탕이 나온다. 어쩌다 자식들이 올 때면 조금씩 드리는 과자가 어느새 그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반닫이 속엔 뿔뿔이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사다 드린 옷가지며 선물이 차곡차곡 쟁여 있다.

    늘 좋은 옷 새 옷을 입으시라고 해도 아끼느라 간직해두신 옷가지들. 어느날 정말 먼길을 떠나시고 나면 동구 밖 산기슭에서 불살라버릴지도 모를 옷가지들인데… 어머니는 그저 모아 두시기만 한다.

    반닫이 속엔 또 한 푼 두 푼 모아 두신 동전이 들어 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자식 하나 잘 되라고 그렇게도 믿고 길러 가르쳤건만 병약해서 죽을 지경이 되자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자식의 목숨을 구하고자 애간장을 녹이시더니 “돈이 있어야 사는디… 돈이 있어야 사는디…”하시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시던 품이 지금도 몸에 배 용돈이라도 드릴라치면 어김없이 꼬깃꼬깃 접어서 간직하신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이 있다. 소유욕은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지녔다. 아마도 인류 역사는 바로 이 인간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쟁취 속에 면면히 이어져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어머니께서도 젊어서는 실로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셨으리라. 그러나 구순이 된 지금엔 이제까지 가졌던 많은 것을 버리셨다. 이젠 좀더 소유하고 싶은 욕심도 버리고 오로지 저 작은 나무궤 속에 작은 소망들만 담아보고 계신다.

    “내가 죽거든…” 어머니는 이따금 먼길 떠날 준비를 하신다. 그럴 적마다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소유했던 모든 것을 하나둘 덜어내신다. 어쩌면 이제 마지막 소유물들이 담긴 어머님의 반닫이. 이제 그것마저도 버리고 나면 어머니께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으리라. 가진 것도 없으리라. 남는 것도 없으리라. 애당초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간다고 손해날 인생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날마다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남았을까. 삶을 확인하듯 반닫이 안을 챙겨 보시던 어머니의 삶의 인식! 존재의 확인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끝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하면 애환도 많고 사연도 많은 반닫이다. 기껏해야 송판으로 만든 허름한 물건이지만 결코 하찮은 물건이 아니다. 한때는 내 외할머니가 쓰셨고 또 어머니가 쓰신 유서 깊은 반닫이가 아니던가. 그리고 언젠가는 내 서재에서 그리움으로 남아 옛이야기를 들려줄 조선시대의 반닫이. 반닫이를 대할 적마다 이제 기력이 쇠잔해진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세상에 남기고 싶은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음미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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