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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교수의 역사 뒷이야기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 박성수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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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는 2명이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 아닌 설악산을 근거지로 왕건에 대항했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으로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
신라 최후의 왕 김부(金傅,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경순왕이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신라 천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초식(草食)하며 살다가 죽었다는 인물이다.

생몰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인 마의태자는 일반적으로 개골산, 그러니까 지금의 금강산에 숨어 살다가 자결한 것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가지 않고 설악산에 갔다! 일찍부터 이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은 서울 보성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했던 김종권씨였다. 이미 작고했는데, 일찍부터 이 사실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친 분이었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건, 설악산에 갔건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저기 다리 품을 팔면서 외치고 다녔을까? 한때 필자도 김종권 선생을 한심한 재야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연히 이 문제를 다룰 기회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다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죽으러 갔다는 뜻이고, 설악산에 갔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국권을 왕건 같은 반역자―당시 왕건은 일개 반란분자에 지나지 않았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설악산이 가지는 상징 코드를 해석해내면 마의태자와 관련한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왕건은 고려의 건국 명분을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국권을 평화적으로 양도받아 은근히 고려 건국에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미하려 했다.

왕건으로서는 신라의 차기 대권 후계자인 태자가 경순왕의 양국(讓國)에 반대한다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왕건은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중신들과 상의했을 것이고, 중신들이 “간단합니다. 태자를 마의태자라 부르게 하시고 금강산에 죽으러 갔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역사 왜곡이란 이런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왕건도 이 소리를 듣고 탄복했을 것이고 “그리 하거라” 했을 것이다. 당시 금강산은 그곳에 유배될 경우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地名)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

인제 김부리 지명의 유래

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 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마의태자 유적지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왕릉 터가 없어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순간이었다.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 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甲)자에 진 칠 둔(屯),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이다.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 국권 회복 또는 광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이 모두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 인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와 관계 있다고 믿는 지명으로 경기도 양구군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을 든다. 이곳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부하인 맹장군이 양구지에 가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해 저장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경내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라는 전설은 너무 유명하고, 인제와 지척간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 지왕동(至王洞)이 있는데,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을 거쳐 이 마을에 왔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것이다.

다물리 마을에서 해마다 지내던 민속행사 가운데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왕각(大王閣) 동제(洞祭)에서는 제상에 꼭 미나리떡과 취떡을 올려놓았다는데, 마의태자가 이 곳에 와서 특히 좋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제례 때는 절을 네 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천자(天子)가 아니면 4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예다.

이러한 김부리 마을의 동제는 고려 500년 동안 몰래 지내야만 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볼 때 마의태자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마의태자라 하지 않고 경순왕 이름인 김부를 썼을 것이다.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족 몰살의 화를 당했을지 모른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멸망 후 200년 만에 영남지방에서 신라 유민들이 항려운동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무신들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고려왕조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마의태자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신라 유민들은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는 두 사람이었다”

마의태자는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라벌을 떠났고 뜻을 같이하는 충신열사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는 화랑(花郞)의 나라였다. 화랑의 힘으로 발전하고 또 통일의 꿈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 신라가 아무리 타락하고 나약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려에 순순히 항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의태자는 화랑답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권을 물려받을 사람이 바로 마의태자 아니던가. 그런 자리를 한마디로 반역자이자 역적인 왕건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래서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무조건 항복에 극력 반대했다고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 얼마나 의젓하고 화랑다운 말인가. 태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하나 아직 충신과 의사가 많이 남아 있다. 둘째, 신라의 민심이 흩어졌다고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셋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가 그만둘 일이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다.

한편 이때 경순왕의 다른 왕자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버렸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사(官史)인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고 마의태자 한 사람만 반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신라의 왕손인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를 보면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기 전에 두 부인(석씨와 박씨)이 있었고 그 사이에 왕자를 여덟 명이나 두었다. 이들 여덟 명의 왕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즉 마의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광복운동을 하러 입산했다는 말은 안 하고, 죽으러 갔다고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를 덜기 위해 다른 일반의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이 기록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경주김씨 내부에도 이견이 있는 것이다. ‘삼성연원보’를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경순왕의 둘째 왕비 박씨부인만 인정하고 그 맏이인 김일이 마의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신라삼성연원보’와 같은 내용의 족보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순왕의 첫째 부인 석씨의 존재가 재확인되고 있다. 일제시기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남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첫째 부인 석씨가 빠진 데 비해 북한에서 간행된 족보에는 석씨가 기록돼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의태자 후손으로 보이는 김씨가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웠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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