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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떠나살기|허병섭목사의 무주생태마을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지”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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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른다. 회색 빛을 띠던 산이 서서히 변하여 연두색이 되고 다시 초록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얼어서 뼈처럼 굳었던 땅은 근육이 서서히 풀리면서 어린아이 엉덩이처럼 보들보들해진다.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100평 남짓한 밭, 농약과 화학비료로 생명을 잃은 흙밭에 땅힘을 북돋기 위해 산에서 낙엽과 부엽토를 얻어오려는 것이다.

낙엽을 이불로 삼아 수년, 아니 수십년 동안 갖가지 생명을 키워온 부엽토는 검고 부드럽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수십억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이 속에서 박진감 넘치도록 꿈틀거리고 있음을 생각하면 손으로 만지기가 두렵고 떨린다. 두려움을 떨치고 부엽토를 손으로 긁고 삽으로 퍼내 자루에 담으며, 그 많은 생명들에게 죄짓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직 농사일에 농익지 못하고 농업노동으로 단련되지 못해 턱없이 부족한 나는, 50kg 정도인 부엽토와 낙엽을 지고 산을 내려온다. 비탈지고 고르지 못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나무들이 내 얼굴을 할퀴고 길을 가로막는다. ‘왜 우리 생명인 밭을 훔쳐가느냐? 안 돼! 못 가!’라고 소리지르는 것 같다.

지게를 받쳐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다가, 하늘이 부끄러워 시선을 주변 돌짝밭으로 돌리고 만다. 다시 언덕길을 오르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심조심 한 발짝씩 옮겨놓는 내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다시 한 번 쉬면서 아버지 생각을 한다.

어머니에게 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던 시절, 아버지는 농한기인 가을이나 이른 봄에도 온돌방에 불을 지피려 나무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무를 하러 간 아버지는 지게를 부셔버리고 내려왔다고 한다. 나무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지만 농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단다. 무거운 나뭇짐이 내리누르는 힘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따가운, 허덕대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중에 면서기 일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도시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았던 것 같다.

1962년경에 우리가 살던 서부이촌동 판잣집이 홍수에 잠겨 봉천동 산꼭대기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정부에서 건축자재를 지원받았는데, 이 자재를 봉천동 산꼭대기로 아버지와 함께 날라야 했다. 정말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육체노동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나무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발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곧 숨이 막혀 죽을 듯한 느낌도 든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서 빈민의 친구로

그 뒤 아버지를 따라 공사현장을 다니며 모래와 자갈을 등짐져 나르는 일을 했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육체노동이었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열망이 컸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들끓었다. 노동은 마지못한 호구지책의 고통이었다. 그 밖에 건축현장에서 벽돌 쌓는 일을 돕는 뒷일꾼, 남대문 보수공사의 잡일 등을 하면서 먼지를 마시는 일도 많았다.

이 무렵 신학교 기숙사 일을 했는데, 이를 연고로 신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형이상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인간 정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동안 육체노동은 천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형이하학과 인간의 사회적 삶의 조건에 관심을 갖는 민중운동을 하면서도, 또 의식화 운동과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행동을 할 때도, 육체노동은 우리가 하고 있는 정신노동(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 변방에서 가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중과 동일해지기를 모색하던 나는 어느덧 민중의 육체노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육체노동이 기술노동과 접목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건전한 토대를 세우는 기반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이 생기기 전에도 간헐적인 육체노동으로 나를 단련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육체노동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생기는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서 피폐한 정신을 맑게 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체험이라고 인식하는 정도였다.

내친 김에 민중과의 동일화를 위해 성직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처절한 민중의 생존현장인 육체노동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나 4년여의 체험은 육체노동이 피폐한 정신을 맑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민중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며, 노동력을 팔아서 잘살아보려는 시장경제 논리는 경매장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을 초라한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농사일이 겁나 도시에서 산다고?

육체노동을 하는 민중에게는 시장바닥과 구분되는 위대한 정신이 있어서 그것이 역사와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신념이 내게 있었다. 이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도시 빈민들과 함께 살았다. 빈민은 민중세력 중에도 주변세력이라는 소외감을 감내하면서도 주변의 삶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그런데 이 신념이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빈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구조가 도시 빈민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연에 몸을 던졌다. 시골에서 나무를 하고 뙤약볕 아래에서 김을 매거나 모를 심는 육체 노동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때로는 외로움을 타기도 한다. 일에 열중하다가 옆을 보면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할 때는 힘이 들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그러나 단언하건대 이 외로움은 곧 사라진다.

많은 사람들은 농촌에서 살고 싶어도 농사일(육체노동)이 겁나 못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곰곰이 도시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자. 도시에서 생활하면 육체적으로 고달프지 않은가?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매일 두들기고 사는 사람들은 육체가 편안한가?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플 것이다. 회의는 또 어떤가? 토론은 어떤가? 이런 모임이 끝나고 나면 몸이 나른해지거나 입술이 부르트는 일은 없는가? 사업상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떤가? 긴장하고 경계하며 계산하고 다음 행보를 염두에 두고 머리를 짜는 동안 받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인가?

도시에는 안락의자가 있고 자동차가 있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노래방이 있고 술집이 있다. 그렇다고 고통과 괴로움을 다 씻을 수 있는가?

서울에서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요즈음 술을 못 먹는다고 한다. 몸이 곯을 대로 곯아 술이 몸에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다고 한다. 일찍 집으로 가서 쉰다는 것이다. 몸도 피곤하지만 오염된 공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건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생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육체노동을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다 마찬가지다. 단지 똑같은 일을 단순 반복하지 않거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적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사람의 눈코입과 감각을 즐겁게 하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기는 하다. 이는 육체노동이 힘들고 괴롭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도시에서도 힘들고 괴로운 육체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즐기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더 값지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인기와 명예를 얻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동안 자기 능력과 힘을 과시하는 일에 취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쓴잔을 마셔도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육체노동을 견딜 수 없어 시골에 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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