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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하다, 고로 탐구한다”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 글·김운찬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나는 궁금하다, 고로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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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호 세계 석학 시리즈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 등의 소설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 교수를 소개한다. 이 글은 앞부분에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에코 교수의 지도로 기호학 박사과정(dottorato)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구 효성가톨릭대 김운찬 교수가 그의 학문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통찰하고, 뒤에는 이탈리아의 시사주간지 ‘레스프레소(L’espresso)’에 실린 에코 교수의 최근 칼럼 두 편을 소개했다. 문화가 경쟁력의 척도가 된 21세기, 에코 교수의 독특한 학문세계는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현대 이탈리아 학자 중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꼽힌다. 해박한 지식과 장황할 정도로 방대한 이론체계, 기호학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다분히 예술가다운 직관과 예리한 비평 등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현재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대학교수이자 소설가, 여러 신문과 잡지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명세 덕분인지 다양한 성격의 국제학회와 강연, 각종 문화행사는 앞다투어 그를 초청하려고 노력한다.

에코의 지식 세계를 개략적으로나마 더듬어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글들이 체계적인 접근을 가로막는다. 지금까지 그가 편집하거나 저술한 책들은 50권이 넘으며, 그 외에 다양한 성격의 학술지와 잡지·신문에 실렸던 글들, 각종 학회와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과 보고서들, 강연 및 대학의 강의록, 인터뷰와 대담들은 아직 일목요연하게 정리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다.

두뇌 속 백과사전 탐험하기

게다가 그런 글들의 형식과 성격 역시 다양하다.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논문과 비평·시사평론·수필 등이 뒤섞여 있고, 소설까지 포함돼 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것도 복합적인 읽기를 요구한다. 그의 말대로 “책이란 다른 책들에 대해 말할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다른 관련 텍스트와 주변적 지식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에코의 두뇌 속에는 방대한 백과사전이 통째 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한 그의 지적 우주를 전반적으로 탐험해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든 단순화의 위험은 남을 것이다.

1932년 이탈리아 북부의 조그마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토리노대학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문제’에 대한 탁월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후 이탈리아의 국영 방송사 RAI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고, 피렌체 대학과 밀라노대학을 거쳐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볼로냐대학의 기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60년대 초 소위 ‘63그룹’의 결성과 함께 이탈리아의 문화예술계에 네오아방가르드(Neoava- nguardia)의 새로운 방향 모색과 논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활발한 이론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맞물려 1962년에 출판된 저작 ‘열린 작품’은 단번에 그를 유명 인사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은 이후에 형성될 그의 이론체계에서 주춧돌 구실을 하고 있는데, 특히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레비 스트로스, 라캉 등 구조주의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의 내적 구조를 치밀하게 추적하는 구조주의자들에게 예술 형식의 ‘열림’이라는 개념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논쟁 과정에 에코가 발견한 이론적 해결책이 바로 기호학이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기호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의 이론은 현대 기호학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기호학 이론은 1968년에 출간된 ‘부재의 구조’에서 움트기 시작하여 1971년 ‘내용의 형식’, 1973년 ‘기호’를 거쳐 1975년의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거의 동시에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나온 ‘일반 기호학 논고’는 처음으로 일반 기호학의 이론적 토대를 설정한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집필됐으며, 그에 걸맞게 기호학의 발전에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부여했다. 물론 이후 기호학의 발전과정에 나름대로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거기서 제시된 여러 개념과 이론적 토대는 아직도 많은 이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기호학이란?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에코는 기호란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모든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기호가 대신하는 그 ‘다른 무엇’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에코는 일반 기호학의 한 이론적 가설로 ‘거짓말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기호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문화현상은 기호로 간주될 수 있으며, 따라서 기호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에코 자신의 표현대로 ‘기호학적 제국주의’라 부를 수 있는 이처럼 방대한 학문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론체계로 정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모든 문화 현상을 연구한다는 기호학의 정의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소쉬르의 정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기호학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인지, 그 방법론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면 기호란 무엇인가. 모든 기호는 ‘표현’의 단면과 ‘내용’의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표현수단이 되는 물리적 실체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이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돼 있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말하는 기호의 두 가지 핵심적 기능은 의미화(signification)와 소통화(communication)이다. 즉 모든 기호(정확히 말하자면 표현 그 자체)는 고유의 내용(또는 의미)을 갖고 있으며, 그 내용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소통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호는 단연 언어다. 그 외에 맹인들의 점자(點字), 군인들의 신호, 교통표지판 등을 비롯하여 사진이나 그림·음악·무용,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인 손짓이나 미소까지도 나름대로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분명 모든 문화적 산물이 기호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호학의 대상은 기호’라는 단순한 정의 역시 ‘문화의 학문’이라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호 현상들의 다양성에 있다. 표현과 내용의 상호 결합, 의미화와 소통화라는 공통적 성격 이외에 분야별 고유의 기호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들 및 그 조직화 과정은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가령 한 편의 노래가 구성되는 방식과 한 폭의 그림이 형상화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며, 각각의 구성 요소와 기본적인 단위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것들은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호의 추상적인 성격이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자칫하면 철학이나 논리학의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현대 기호학이 단순히 물질적 대상인 기호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기호를 통한 의미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마도 당연할 귀결일 것이다. 어쨌든 기호학이 문화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철학·예술·문학·언어학·자연과학 등 전통적 학문이 개별적으로 다루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학이 여러 학문 분과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학제간 연구방식으로 꼽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에코의 기호학 이론

기호학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듯 에코의 관심사는 실로 다방면에 걸쳐 있다. 초기의 철학과 미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해 문학 및 아방가르드 예술이론, 대중매체의 문제, 건축기호학 및 만화기호학, 현대의 소비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에코는 나름대로 독특한 기호학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 기호학이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문화적 산물은 끊임없이 흥미로운 의미의 그물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이나 정치·사회 제도 등도 기호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나 우주 역시 관점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대상이다.

실제로 ‘해석’은 에코의 기호학 이론체계를 관통하는 핵심 용어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작품의 ‘열림’이라는 초기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열린 작품’에서 논쟁적으로 제시됐던 것이다. 현대 예술작품의 형식은 본질적으로 열린 구조이며, 따라서 수신자에 의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고 또한 그 해석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의 이러한 주장은 아직은 불분명하고 다분히 직관적인 개념이었다. 이후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로서 활용한 것이 바로 기호학이었다. 그러니까 ‘열림’의 형식이라는 예술작품의 내재적 전략을 파헤치고 구명하는 과정에 그의 기호학 이론이 정립됐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해석’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열린 형식이 수신자에 의한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코는 프랑스의 탁월한 기호학자 그레마스와 대비를 이룬다. 현대 기호학은 두 개의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해왔는데, 하나는 소쉬르에서 옐름슬레우를 거쳐 그레마스에 이르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철학자 퍼스의 이론을 이어받은 에코의 계열이다. 그레마스의 이론이 ‘의미의 생성 경로’를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추적하는 ‘생성 기호학’이라면, 에코의 이론은 수신자에 의한 텍스트의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위 ‘해석 기호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기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사람은 기호(또는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라는 두 과정에 각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이론은 서로 배타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 반영하며 상호보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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