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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향응에서 육체적·정신적 학대까지

  •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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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몸을 숯검댕으로 만든 뒤 그 씻은 물 먹기,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잡이 흉내내기,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 하기 등 조선의 과거급제자들은 신참 신고식에서 정신적·육체적 가학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신고식 비용도 모두 신참이 부담했으니 요즘보다 더 심했다 할 것이다. 》
신참·고참이란 용어는 비단 군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학교나 직장 등 어느 조직사회든 반드시 신참, 즉 새내기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조직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고참 즉 선임자들은 세심하게 보살펴주어야 한다.

새내기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신고식이란 명분으로 새내기들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따르는 통과의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고통이 따르는 신고식 문화는 군대는 물론이요, 대학가에서도 성행하는 실정이다. 군대 신고식은 흔히 ‘얼차려’라는 이름으로 정신·육체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산만한 정신을 다잡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학가의 신고식은 주로 강제로 술을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선·후배 간 일체감과 소속감 혹은 상하 규율을 불어넣는 것이라 한다. 범죄조직에서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통해 동료 의식을 고취하는 것도 신고식과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신고식 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 있다.

인류학 내지 민속학에서는 신고식을 통과의례(通過儀禮)로 이해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주네프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장소, 지위, 신분, 연령 등을 거치면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즉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거치는 것이 통과의례이며, 여기에 수반하는 시련과 고통을 ‘의례적 죽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과의례의 ‘가상 죽임 의식’이 죽임으로 연결돼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커다란 바가지에 술을 가득 담아 먹이는 대학가의 사발주 혹은 육체적 가학이 담긴 통과의례 때문에 귀한 생명을 잃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가혹한 신참 신고식 ‘면신례(免新禮)’를 떠올리곤 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신고식 문화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신고식 문화를 일제시대 군국주의의 잔재였다거나 광복 이후 군사문화의 한 단면으로 이해하려는 이가 많은데, 실제로 신고식 문화는 조선시대 관료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매우 성행하던 풍속으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권세가 자제의 방자한 태도 꺾기 위한 신고식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나 선비로 있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를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입 관원에 대한 구관원의 얼차려 문화인 셈이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면신례로 인한 폐단이 많자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채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면신례의 역사는 상당히 깊다. 조선이 건국된 지 몇 달이 지난 태조 1년(1392) 11월 도평의사사에서는 감찰(監察)·봉례(奉禮)·삼관(三館)·삼도감(三都監)·내시(內侍)·다방(茶房) 등의 관직에 신참(新參)이 들어갈 때 잡스럽게 희롱하는 폐단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신참 길들이기란 명목의 신고식을 말함은 물론이다.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거론된 문제임을 보아,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듯하다.

실제로 면신례의 폐해를 지적한 기록을 보면, 연산군 6년(1500) 8월 의정부에서는 면신례 폐단에 대해 고려조의 쇠망(衰亡)한 세상 풍속이 본조(本朝)에 전해 내려와서 마침내 폐풍(弊風)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중종 36년(1541) 12월 사헌부 상소에서는 고려 말 조정이 혼탁한 시기에 처음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교만하고 방자한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면신례는 중국의 당·송은 물론이고 오랑캐 나라인 원나라에서도 없던 것이라 하니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취임을 위한 통과의례인 면신례란 용어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성종 6년(1475)경이다. 물론 그 이전에 신참에 대한 신고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면신례란 용어가 정착되지 않았을 뿐인데, 그 이전에는 허참(許參)이라 불리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물론 허참, 면신의 예(禮)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참 통과의례에서 일정 기간을 두고 계속 이어진 두 행사였다.

즉 허참례란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구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禮)를 행하는 자리다. 이로부터 서로 고참과 신참의 상종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허참이라고 하며, 다시 10여 일 뒤 면신례(免新禮)를 행해야 신래를 면해 비로소 구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관직에 처음 등용된 신참의 행보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어떻게 신고식을 치르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에는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유가(遊街)에 나서는 풍속이 있었다. 유가란 자신의 과거 급제를 세상에 알리고 이를 자축하는 행사로, 급제한 자가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나팔과 꽹과리를 동원해 마을을 도는 풍속이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과 흡사한 광경이다. 급제자들이 유가할 때면 으레 수행하는 종들이 행인들에게 비키라고 소리를 질러 길을 튼다. 급제자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자들이 길을 갈 때면 당연히 따르는 절차였다.

그러나 과거급제자는 예문관·성균관·교서관의 삼관이나 훈련원에 재직중인 고참들에게 먼저 경하(敬賀)하는 만찬을 베풀어 신고를 한 후에야 유가를 행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통상 문과나 무과에 급제하면 바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수습을 거친 뒤 벼슬을 받았다. 무과의 경우 훈련원에 배속되고, 문과의 경우 삼관(예문관·성균관·교서관) 혹은 사관(승문원 추가)에 나누어 배속됐다.

예문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한림들이 근무하는 곳이요, 성균관은 당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교서관은 서적을 간행하는 곳이요,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곳이다. 대개 관직에 바로 서용되는 장원급제자를 제외한 문과급제자들을 능력과 나이를 고려해 이 네 관청, 즉 사관에 배치하고는 실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실무를 익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명칭은 권지(權知)니, 오늘날 시보(試補) 내지 임시 대기직인 셈이다.

이때부터 문과의 신급제자는 삼관(혹은 사관)의 선배에게 신고 절차를 밟아야 했다. 선배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거나 예를 다하지 않을 때는 유가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신참의 유가는 일반적인 대감 행차와는 달리 선진자(先進者; 선배 관료)를 만나면 말에서 즉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

후배 돈 우려내는 면신례

삼관에 골고루 배치된 과거 급제자는 배속된 부서의 고참이나 선생(당해관서 관직 역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인사를 다녀야 한다. 이때 신참은 자신의 신상을 적은 자지(刺紙; 일종의 명함 종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 한 번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한테만 가는 것도 아니니 이는 고역이었다.

이때 자지가 두껍고 큰 것이 아니면 안 되는데, 대개 무명 한 필로 자지 석 장을 겨우 바꿀 수 있었으니 그 비용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새내기들의 경제적 부담이 과도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신고식은 좀더 합리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신고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새내기를 맞이하는 고참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선의 신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러한 행위를 투자(投刺) 혹은 회자(回刺)라 칭하며 이를 통하여 선배 관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통 투자는 허참이나 면신의 예를 행하는 기간에 같이 했다.

선배들은 인사 온 신래들로부터 우려낸 돈으로 면신례와는 상관 없는 훗날의 잔치에 대비한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교서관에서 주관하는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열리는 장미연(薔薇宴),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의 잔치는 원래 삼관을 중히 여긴 국왕이 가끔 내려주는 음식으로 하던 것이었으나, 점차 신래를 침학하는 것으로 변질했던 것이다.

한편 본격적인 신고식인 허참례(許參禮)나 면신례(免新禮)는 반드시 고참 선배들에게 음식물을 접대해야 했다.

음식물 장만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이를 ‘징구(徵求)’라 하는데, 셈은 3에서 시작된다. 이를 테면 청주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나물이 세 반(盤) 등등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을 이 숫자에 맞추어야 했다. 만일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견책이 따랐다.

이렇게 다섯 차례를 한 뒤에 다시 5의 수로 음식을 준비하여 세 차례 잔치를 더 벌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최종 절차인 허참연(許參宴)과 면신연(免新宴)을 따로 해야 하니 여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살림을 다 기울여 없앤다 해도 그 비용을 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에게 빌려서라도 감당하던 것이 당시 실정이다.

허참·면신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집단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석에도 끼워주지 않고 왕따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또 허참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당해관서 관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 전의 근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삼관으로 분관된 급제자들의 승진은 반드시 허참 순서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이 관례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바로 위 고참이 병이 나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가 승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는 법전에도 명시돼 있는데, 이를 차차천전(次次遷轉)이라 한다. 관료제가 발달한 조선은 그만큼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허참한 순서대로 천전(遷轉; 다른 관직으로 승진하여 옮겨감)되자, 급제자들이 성균관·교서관 권지로 분관돼 허참례를 행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관직을 기다리는 폐단이 야기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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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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