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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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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은 신라 초기부터 박씨 왕족들의 터전이었다.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을 비롯해서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에 이르는 초기 4대 왕의 왕릉이 모두 서남산 초입인 탑정동에 들어서 있는데, 현재 사적 172호로 지정된 오릉(五陵)이 그곳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역시 박씨 왕이었던 7대 일성왕릉(사적 173호)이 있고, 언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배동(拜洞)에 6대 지마왕릉(사적 221호)이 있다. 지마왕릉을 지나면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이 한데 모여 있으니 이를 삼릉이라 하여 사적 219호로 지정돼 있다. 그 다음이 55대 경애왕릉(사적 222호)으로 견훤에게 피살된 비운의 왕이 묻힌 곳이다.

이들 왕릉의 주인공들이 모두 박씨이니 신라 건국 초기부터 망할 때까지 근 1000년 동안 서남산 일대는 박씨들의 터전으로 대를 물려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경애왕이 포석정(사적 1호)을 배동 초입에 지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 터가 부왕인 신덕왕이 등극 전에 살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기 때문인 듯하다.

서남산 일대가 박씨들의 세습 터전이란 사실은 이미 11회 에서 밝힌 바 있다. 일성왕릉 부근의 탑정동 남간마을이 자장율사의 누이동생 남간부인 법승랑(法乘娘)이 출가해 살던 동네인데, 그 남편 사간(沙干) 재량(才良)이 일성왕의 후손인 박씨라고 하였다.

그 자제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외숙부인 자장율사를 도와 진골 김씨 왕족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종교적 신비와 물증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반불교 내지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 마을 뒷산인 삼화령에 (11회 도판 10)을 조성해 모셔 놓았으리라고 했다.

아마 이때 자장율사와 국교(國敎) 대덕, 의안(義安)대덕, 명랑(明朗)법사 등 3형제의 숙질들은 벌써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선덕여왕의 미륵보살 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화령에 미륵보살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해 남자 왕의 출현을 예고했던 것 같다.

김춘추는 그 부친의 이름이 용수(龍樹, 570년 경∼645년 경)였다. 그런데 ‘미륵하생경’에서 미륵불이 하강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아 부처가 되고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미륵불국토를 만들어 간다 했으니 용수, 즉 용화수 밑에서 태어난 김춘추(604∼661년)는 미륵불일 수밖에 없었다.

자장율사와 명랑법사 형제들은 이런 이념을 신라사회에 계속 불어넣는 일을 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불교적이고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들을 회유하여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삼화령에 우선 을 의좌상으로 조성해낸 다음, 지마왕릉 못 미친 곳의 선방곡(禪房谷, 새방 뜰)에 다시 보물 63호인 (도판 1)을 만들어 세우는 듯하다. 이는 대체로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년)이 등극하던 654년 전후한 시기의 일이었을 듯하다.

은 흔히 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1923년 조선총독부의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을 지휘했던 일본인 학자 대판금태랑(大坂金太郞)이 붙인 이름이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삼존불이 모두 넘어져 있었고 제자리를 떠나 이리 저리 흩어져 있었다 한다. 다만 본존불의 대좌 일부만 제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이것도 그 위에 본존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고의로 파괴돼, 바로 그 뒤에 자연석을 놓고 본존불을 세운 다음 적당한 간격으로 좌우 협시보살을 세워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삼존불 모두 6세기 말의 수나라 양식을 계승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의 비례를 보이는 작달막한 키(8자 8치)와 큰 얼굴(2자 2치 7푼)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 소녀의 체구와 같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양식적 공통점을 보여준다.

중국 산서성 박물관 소장의 (도판 2)과 의 주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양식적 공통성을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얼굴이 정사각형에 가까우리만큼 둥글넓적하고 앳된 동안형이다. 그리고 육계가 낮고 넓어 얼굴이 더욱 넓적하게 보이도록 한 것도 서로 같다. 목이 굵고 짧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지은 오른손과 왼손의 표현도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의 왼손이 옷자락을 잡고 있어 순수한 여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지만 손의 위치는 동일하니 자세의 동질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어 내린 반단식(半袒式; 어깨를 반쯤 드러내는 형식) 2중 착의법이 같다. 다만 옷주름의 처리에서 수나라 불상은 빗금과 부챗살 모양으로 사실성을 드러낸 데 반해 신라 불상은 물결무늬로 도식성을 드러낸 것이 크게 다르다. 이는 신라 상이 거의 반세기나 뒤에 수나라 상을 모방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수긍할 수 있는 문제이다.

좌우 양손의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자락의 경우 신라 상은 짧고 수나라 상은 길어서 신라상을 더욱 어린애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당시 신라사람들이 추구하던 천진무구한 소년기의 인체미를 표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니, 아직 화랑이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두 상 모두 불꽃 형태의 광배를 지고 있었으나 수나라 상은 파손되었고 신라 상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칼은 수나라 상이 물결무늬의 곱슬머리 표현인데 반해 신라 상은 나발이다. 신라 상의 육계가 2중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광배 끝을 육계 위로 포개듯 마무리지음으로써 일어난 잘못 때문이다.

두 협시보살상 역시 수나라 시대 보살상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보살 입상은 장안 부근 출토의 (도판 3)과 흡사하며 왼쪽 보살 입상은 (도판 4)과 그 양식 기법이 비슷하다.

다만 수나라 보살 입상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영락 장식으로 꾸며져서 완벽한 세련미를 과시한데 비해 신라보살입상은 영락과 천의가 단순 소박하여 소녀다운 천진성을 드러낸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의 애기보살상을 바로 뒤잇는 양식 기법이라 하겠다. 굵고 소박한 영락 한 줄이 더 첨가될 정도의 꾸밈새가 진행된 것이다.

아미타 삼존불의 출현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황하 유역은 지구상에서 농업 문명을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기후 풍토를 갖춘 지역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현실세계가 만족스러웠으므로 내세를 설정하는 종교나 현실 밖을 생각하는 우주 철학을 출현시키지 않았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 절대로 필요한 윤리 철학만을 발전시켰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원만하게 유지하면 현실이 곧 극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한 이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끊임없는 전란으로 현실이 지옥으로 변하자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여 이념 기반으로 삼고 이민족 지배하의 전란시대를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은 내세조차 현실에 직결시키려는 강한 집착성을 보여, 다음 시대로 예고된 미륵불 교화 시대가 중국에서 전개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륵이 출현하여 현세의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된다. 이런 현세 구원적인 미륵신앙은 결국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이 성군으로 하생하여 현세를 미륵불국토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따라 황제나 태후가 미륵의 화신을 자칭해 천하를 호령하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출현한 것도 이런 배경 아래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란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고 나왔다. 그러나 272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가 끝나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589년), 그 통일의 대업을 당이 계승하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미륵의 출현을 갈망하는 현세구원적인 신앙에만 매달리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중국 불교 교단에서는 도작(道綽, 563∼645년)과 선도(善導, 613∼686년) 등이 출현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이 교화하고 있는 서방(西方) 정토(淨土) 극락(極樂)세계로 왕생(往生)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아미타 신앙을 고취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아미타 신앙은 조위(曹魏) 소릉공(邵陵公) 가평(嘉平) 4년(252)에 서역승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과 오(吳)나라 황무(黃武) 2년(223)에서 건흥(建興) 2년(253) 사이에 서역승 지겸(支謙)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2권 및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요진(姚秦) 홍시(弘始) 4년(402)에 번역한 ‘불설아미타경’ 1권 외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유송(劉宋) 원가(元嘉) 원년(424)에서 19년(442)에 걸쳐 번역한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1권 등을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었다.

그중에서 ‘불설무량수경’ 2권과 ‘불설아미타경’ 2권에서는 각각 권 하에서 거의 비슷하게 석가모니불이 미륵보살에게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악행을 짓지 않으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반드시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나 아미타불을 뵐 수 있다고 하면서 미륵보살과 아난존자가 이 경전을 잘 받들어 세상에 널리 전파하라고 부탁한다. ‘무량수경’ 권 하에서 석가세존이 이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대목을 옮겨 보겠다.

“불타께서 미륵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만나기 어렵고 뵙기는 더욱 어렵다. 여러 부처님의 경전과 말씀을 얻기도 어려우며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 행하는 것 또한 어렵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며 받아 가진다면 어려운 중에 어려움이 이 어려움보다 지나친 것은 없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렇게 짓고 이렇게 말하였으며 이렇게 가르쳤으니 응당 믿고 따라서 법대로 수행하도록 하라. 미륵보살 및 시방에서 온 여러 보살 대중과 장로 아난 등 여러 성문 등 일체 대중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를 듣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이 미륵보살을 통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니 자연스럽게 미륵신앙에 젖어 있던 대중들은 미륵신앙을 청산하면서 미타정토 신앙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아미타경’ 1권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곳에서 아미타불을 마음 속에 간절하게 생각하며 ‘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심히 외우기만 하면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염불인데 거기에다 아미타불의 양대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등으로 함께 부르면 더욱 신속하게 극락왕생할 수 있으며, ‘아미타경’을 읽고 외울 수 있다면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단순 신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대승사상이 출현한 이래 600년의 세월이 흘러 그동안 경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전에 주석을 붙이고 다시 그 주석에 또 주석을 붙이는 일을 거듭하였으므로 이른바 논(論)과 소(疏)가 경전을 압도할 만큼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가 문자와 논리의 늪에 빠질 형편에 이르렀으니 일반 대중들이 교리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염불 신앙과 같은 단순 신앙이 대중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통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무수한 살육이 자행되면서 미륵불이 출현해도 현실의 예토(穢土; 더러운 땅, 오염된 땅)는 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 시대가 이미 정법(正法)이 끝나는 시대인 말법(末法) 시대이므로 지금 이 현실에서 구원을 얻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모두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신앙으로 쏠려가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수나라가 통일을 이룩한 직후부터 아미타삼존상이나 관세음보살상 등이 차차 많이 조성돼 가는 듯하니, (도판 4) 등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아직 관세음보살상은 그 정형이 확립되지 않았던 듯, 이 보살상의 보관에는 정면에 화불이 조각돼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상생(上生)미륵보살의 보관 정면에 화불이 표현되는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갑자기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할 경우 미륵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로 구별되지 않을 터이므로, 서로간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러나 곧바로 ‘불설관무량수경’의 대량 유포에 따라 그곳에서 설한 대로 관세음보살 보관 정면에 화불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관세음보살의 상 양식을 확정해 놓으니, 1976년 선산에서 출토된 (도판 5)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수대의 관세음보살상 양식은 뒤이어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미쳐 (도판 6)이나 (도판 7)과 같은 우수한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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