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서울떠나살기

보름달, 개구리소리 그리고 명상

작가 김정빈의 ‘문명 중독증’ 털기

  • 김정빈

보름달, 개구리소리 그리고 명상

1/2
며칠 전에 전원 주택지를 한 필지 구했다. 수백 걸음 떨어진 곳에 저수지가 있는 남향받이 터를 산 것이다. 억지로 말한다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길지라고까지 할 수도 있는데, 이런 집터는 여간해서 만나기 어렵다. 감탄할 정도로 좋은 곳은 아니지만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가득 차면 덜어진다(滿則損)는 잠언도 있고 옛 성현들께서도 열에 칠팔분(分)을 얻으면 자족하라 하셨으니, 나는 이제 땅 욕심은 접고 거기에 아담한 내 집을 지을 꿈을 꾸기로 한 것이다.

사람은 집을 의지해 살아간다. 집을 한자어로는 옥(屋) 또는 가(家)라고 하는데, 그것은 물리적인 집을 뜻한다. 그에 비해 가정(家庭)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간의 따뜻한 온기까지를 포함한,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집을 뜻한다. 이를테면 영어에서의 하우스(house)와 홈(home)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하우스와 홈. 이 둘 가운데 하우스가 홈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치야 재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홈을 구성한다고 해서 하우스가 저절로 따라와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집 없는 가정이 많다는 것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하물며 좋은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나와 내 가족만의 하우스를 짓는다는 것은 여간 복된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전원주택을 지어볼까 하는 야무진 꿈까지 꾸고 있지만 돌이켜보면 나 또한 출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처음 만나 결혼을 약속하던 때, 내게는 집을 장만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우스 없는 홈이란 가능하지 않은 법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만의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명제가 나를 몰아세웠다.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막중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된 나는 직장이 있는 여의도에서부터 전철이 닿는 지역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이 적었던 만큼 내 발길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런 끝에 나는 결국 서울 지역을 벗어나 부천에 이르렀고, 부천역에서도 버스를 타고 10여분을 더 가야 하는 변두리에 닿게 되었다.

당시 부천시 원종동에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가 논 가운데에 서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처가에서 보태준 돈과 누님이 도와준 돈을 합쳐서 14평짜리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방이 두 개인 아파트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두 동생을 데리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하우스와 홈을 구성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2년, 그동안 나는 가족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도시 생활을 해왔다. 원종동에서 한 해를 살고 약대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얼마 안 있어 부천을 떠나 안양으로 갔다. 그렇게 도착하여 10년을 산 안양에서도 아파트를 세 번이나 바꾸었으니, 그동안에 내가 거친 아파트는 모두 다섯 곳이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두 동생은 결혼해 분가했고, 내게는 아들 둘이 생겼다. 변화는 그뿐이 아니다. 나는 그 사이에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일컬어지는 책을 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받은 인세와 그 뒤에 쓴 여러 책들의 성과에 힘입어 다소의 경제적인 여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마음은 전원으로 향하고

생각해 보면 나는 10년 동안 글만 쓰면서 생활해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쓴 글들은 거의가 마음의 평화에 관한 것들이었으니, 내가 시골행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조용한 곳에 은둔자로 머물러 명상과 독서를 즐기면서 마음의 평화를 중심으로 한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그런 생각에 몰두한 것은 내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사정도 크게 작용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몸이 허약했다. 안양에 살 때를 예로 든다면 무슨 일로든 서울에 한번 다녀오면 그것으로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그 피로가 이틀, 사흘간 이어질 정도로 나는 쉽게 피로를 탔고, 그 피로는 더디 회복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대작에 착수하지 못했다. 일년에 한두 번 정도 건강이 창작을 받쳐주는 시기를 활용하여 나는 한두 달 사이에 책 한 권을 번개같이 써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창작에 전념하기 어려운 건강상의 휴지기(休止期)가 온다. 그러니 몇년간에 걸쳐 끈기 있게 집필할 것이 요구되는 작품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진료도 해보고 치료도 해보았지만 건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에 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종합검진을 받아보면 늘 “허약하기는 하지만 병은 아니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예 이 문제를 업(業)으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모르긴 해도 전생에 무슨 일인가를 저질렀을 것이다. 이번 생에 이렇듯 시원찮은 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쁜 짓을 말이다.

따라서 이번 생에는 큰일을 하려 하기보다는 자족하는 마음을 길러야 할까 보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나는 되도록 사람을 덜 사귐으로써 몸의 혹사를 면하는 한편 되도록이면 많이 쉬었고, 그래서인지 건강은 전보다 많이 향상되었다.

그런 한편 푸른 산과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심신이 아울러 건강해질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 살고 싶은 마음도 점차 강해져 갔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돌아 본 곳은 안양과 과천, 의왕, 군포 부근, 그중에서도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그린벨트는 수도권의 폐와도 같은 구실을 하는 중요한 곳이지만, 막상 그곳에 토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억울한 희생이 강요되는 곳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그 지역에는 건축에 있어 엄격한 규제를 받기 때문에 녹지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집터를 구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거기에서 줄곧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제한적이나마 건축이 허가돼 있었기 때문에 건축 가능한 대지는 엄청나게 비쌌다. 당시 내게는 겨우 집터나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의 힘밖에 없었다. 따라서 꿈은 꿈으로만 남은 채 실현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내가 집터만 보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창작생활과 수행 생활은 그와는 별도로 전보다 더욱 착실하게 진척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때 내게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서울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다

나는 왜 굳이 서울 근교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왜 과감하게 서울을 떠날 생각을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나는 그동안 마치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나를 포함한 수도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 있는 패러다임의 허점을 깨닫고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수도권에 사는 사람만이 아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생각의 중심을 서울에 두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어 서울은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요, 모든 것을 결말짓는 중심점이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서울에서만 진행된다. 요컨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라 서울 자체가 곧 대한민국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울의 중요성은 이제 와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려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의 방향 표지는 언제나 서울 쪽을 가리키고 있다. 예컨대 강원도에 사는 사람의 마음은 서향으로 뻗어 있고, 충청도나 전라도에 사는 사람의 마음은 북향으로 뻗어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진대 어렵사리 한번 서울(또는 서울 근교 도시)에 편입된 사람이 굳이 그 중심부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 자명한 일이다.

내가 안양, 과천, 의왕, 군포 등지를 돌며 살 곳을 찾은 것도 실은 그에 영향받은 것에 불과했다. 왜 서울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명상을 강의하는 동안 자주 강조하던 “지금, 여기(hear and now)”의 철학에 입각해볼 때 사람은 마땅히 자기가 서 있는 그곳, 그때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옳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나는 가서 살 수 있는 지역의 범위를 훨씬 넓힐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궁벽한 산촌을 선택할 용기는 갖지 못해 그 범위는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 권역이 한계였다. 아직도 전라도와 경상도는 너무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끝내 서울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이유, 즉 직장과 자녀 교육 때문이다. 그런데 내 경우엔 굳이 창작을 서울 근교 도시에서만 하라는 법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시골 생활이 창작에 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도시를 떠나지 못할 이유는 자녀 교육 문제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 문제를 곰곰 생각해본 끝에 나는 소도시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인구 10만 정도의 소도시에 아내와 아이들을 살게 하고 나는 도시 외곽의 시골에 들어가 살자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을 두 곳에 갖게 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건강과 창작,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이라는 서로 상충할 수도 있는 문제를 절묘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2
김정빈
목록 닫기

보름달, 개구리소리 그리고 명상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