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아름다운 만남! 기독교와 불교의 벽 허물기

  • 김경재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한신대 교수

    입력2006-09-22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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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새해 들어 한국 종교계 안에는 종교간의 두터운 벽을 허무는 몇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 대체로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한국개신교교회협의회 총무 김동완 목사가 ‘부처님 오신 날’에 석가탄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불교계에 보냈다.

    천주교 주교단도 역시 그랬지만 개신교단의 그간의 행태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 시민들은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반기는 뉴스였다. 종파를 떠나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 김창숙 상 수상을 계기로 그분의 묘소 앞에서 유교식 법도대로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새로운 화해의 조짐들 싹트다

    서울 수유동 화계사와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운동장은 지난 4월 초파일날 불자들의 자동차 임시 주차장으로 활짝 개방하여 세인의 칭찬을 받았는데, 화계사로 올라가는 전신주에 한신대 대학원 학생회가 걸어놓은 석가탄신축하 플래카드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똑같은 전신주에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화계사 불자들의 이름으로 성탄축하 플래카드가 걸리곤 한다.

    지난 6월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주최한 ‘종교간 대화 35주년 기념출판회’에 한국의 6대 종단 대표들이 축사를 하고 축가도 불러주었으며, 세종문화회관에서는 ‘21세기 생명문화와 종교’라는 공동주제를 내걸고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한국불교환경교육원, 가톨릭종교문화연구원, 성균관대, 천도교중앙본부 등에서 각각 발제를 맡아 죽어가는 지구 생태계 문제를 두고 진지한 학술토론회를 가졌다.



    위에서 예로 들어 말한 일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수많은 종교간의 벽허물기 사례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같은 정신을 가지고 부산, 전주, 인천, 대전, 광주에서도 종교간의 대화, 협동, 생명문화 창달을 위한 모임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을 목표로 하는 각종 학술단체나 사회단체를 예로 들면 한국종교인평화회의, 가톨릭종교문화연구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에서는 크고 작은 프로그램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밝고 좋은 뉴스만 전해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간의 대화, 화해, 협동의 일들이 뜻있는 사람들의 실천적 용기를 통해 전개되고 있는 중에도, 보수적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 일부의 배타적 보수주의자들은 동국대 불상을 우상이라 하여 손상을 입히고, 종교간 대화 협동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 비방과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문화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후반에 들어 특히 1960년대 이후 지구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종교간의 대화, 협동, 그리고 상호 창조적 변화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그 운동은 점점 더 활발해질 것이며, 한국사회에서는 다소 그 속도가 느리지만 가장 의미 있는 운동으로 확장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어느 특정 종교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해가 갈수록 지구촌과 한 사회의 삶이나 존재방식은 유기체적으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허물어지는 종교간의 벽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가 몇 세기 후에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면서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의미 깊은 문명사적 사건 중 특기할 일은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식민통치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킨 위대한 혼 마하트만이었지만, 인도사회 속에 존재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을 화해시키기 위해 정치적 독립운동 때보다 더 많은 마음고생을 했고, 결국은 종교간의 화해 협동을 설득하는 그의 가르침에 불만을 품은 과격파 청년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부터 세계 종교지도자들은, 지구촌에서 함께 숨쉬며 살고 있는 종교간의 대화, 협동, 창조적 변화운동은 미래종교들의 사활이 걸린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대사회의 삶이 점점 더 유기체적으로 얽혀가고 있기 때문에 종교간에 벽을 쌓고서는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지금은 로빈슨 크루소 시대가 아니다. 아침 밥상에 오른 식량과 반찬은 구체적으로 오늘의 내 생명을 지탱해주는 음식물인데, 그것의 재배 가공 유통 등이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협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약 극단적인 배타적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를 우상종교라고 단정하고 자기 종교만이 진리종교라 고집하면서 살고자 할진대, 모르몬교도나 경기도 소사 전도관 종교공동체처럼 따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은 그들도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서라도 타종교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병이 들면 타종교를 신봉하는 의사에게 자기 생명을 맡기고 수술대 위에 누워야 하며, 해외여행을 할 때도 나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기장에게 자기 생명을 맡겨야 한다. 본시 삼라만물이 그렇게 유기적으로 얽혀 발생하고 지탱되는 것이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실상이 더욱 분명해졌다.

    둘째, 교통통신의 발달과 정보화사회의 실현으로 인하여, 인류는 최초로 지구촌 안에 서로 다른 종교문화를 이루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와 다른 종교문화 공동체 안에도 훌륭한 종교체험, 예술, 윤리도덕체계, 사회정치질서, 과학과 문예가 꽃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20세기에 실현된 새로운 문명의 특징이었다.

    종교를 그 핵심으로 하는 다양한 문명의 가치관, 세계관이 건재한다는 것은 18~19세기까지는 대중이 알지 못하던 사실이다. 19세기까지 다른 대륙, 다른 문명에 대한 지식은 제한되었고, 다른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타종교들은 우상종교거나 우매한 자연종교, 저급한 종교라고 폄훼되었다. 정보·교통·통신수단의 발달은 종교간의 다양성, 관용성, 정보교환, 그리고 실질적 종교인들간의 사귐과 대화를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간의 두꺼운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생명체를 위한 협동 필요

    셋째, 정신과학의 발달은 자연과학의 발달 못지않게 인류를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보다도 한 단계 더 성숙시켜 역사적 가치의 상대성과 정신과학의 해석학적 한정성을 깨닫게 했다. 인류는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일은, 종교 철학이념 자연과학 법칙마저도 모두 상대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며 결코 절대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와 역사 사회적 제약성과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제약성은 어떤 특정집단의 주의 주장만이 절대불변한 진리라고 고집하는 독단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공유하게 되었다. 진리의 상대성을 알게 됐다는 것은 그 상대적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다.

    다만 붓대롱으로 하늘을 보고서 하늘을 다 보았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말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서 달 자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이다. 빛의 이중성을 알지 못한 채, 실험 결과 빛은 파동임이 밝혀졌으니 빛의 입자성을 주장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거나 그 반대 주장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인식과 다름, 차이에 대한 관용과 존중의 태도는 20세기 성숙한 인간의 본질이다.

    넷째, 20세기에 들어와서 종교간의 대화 협동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대세가 되고 필수불가결한 사항이 된 이유는, 지구촌의 가장 시급한 일들, 곧 지구생명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공동대응의 필요성이 종교간의 대화 협동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 파괴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환경 보전운동, 빈부차이로 말미암은 지구촌 비인간화 극복과제, 성차별과 난치병과 지역전쟁을 극복하는 과제, 물질만능주의와 정신적 가치의 붕괴로 황폐해진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운동 등은 어느 특정 종교 혼자서 이루어낼 수 없는 일들이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진리 속에서 꽃핀다. 참 종교라면 인류가 고통당하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생명을 치유하고 건강할 수 있게 봉사해야 함을 절실하게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하여 종교간의 대화, 협동, 상호 창조적 변화는 취향에 따른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의무가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왜 20세기 후반에 종교간의 벽 허물기 운동이 시작됐으며 시작하여 21세기에 더욱더 강화될 조짐을 보이는지 그 당위성과 필연성에 대하여 네 가지로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종교간의 벽 허물기는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종교에 귀의하는 그 사람에게는 ‘궁극적 관심’이 되는 것이며, 자기의 전 존재를 투신해도 후회가 없는 절대적 가치요 절대적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 협동에 반대하고 독단적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정신은 무엇이며, 또 반드시 극복돼야 할 독단주의와 광신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는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다. 그리고 세계학자들은 때로는 불미스러운 종교간의 갈등이나 충돌이 일어나곤 하지만, 극히 일부분의 일이고 대체적으로 놀라운 평화공존이 실현되고 있는 사회라고 칭찬한다. 사실 날마다 신문에 보도되는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카슈미르, 스리랑카, 아프리카 등지의 종교분쟁 보도를 보면 한국사회는 종교간의 평화공존과 대화협동이 잘되는 사회에 속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것이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선각자들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불교, 기독교, 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등 6대 종단이 중심이 되어 이뤄가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있고, 최근엔 민족종교 대표가 참여해 7대종단 협의체로 발전하고 있는 상태다.

    종교학자들은 세계 속에 현존하는 다양한 민족종교들이나 소수 종교단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1000년 이상 역사 속에서 인류를 육성해온 거대한 과실나무와 같은 세계종교들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파악한다. 세계종교들의 범주화 작업은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론적 시도이지, 다양한 민족종교나 소수민족의 고유한 종교문화 가치를 폄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어야 하겠다.

    첫째 범주는 셈족계 종교로 ‘예언자 종교들’이라고 부르는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종교들은 계시종교라는 특징을 지니며 사랑과 정의를 중심 속성으로 갖는 인격적 유일신을 신봉하고, 계시적 경전 권위를 강조하고, 역사의식과 시간의식이 강하며, 피조세계와 창조자 사이의 질적 차이를 분명히 한다. 그리고 만물이 완성되는 종말적 성취를 희망한다.

    둘째 범주는 인도계 종교로 ‘신비자 종교들’이라고 부르는데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종교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와 인간의 본래적 모습 사이에 깨달음에 의한 일치 통일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비자 종교라는 별칭이 붙는다. 윤회 또는 덧없는 생로병사의 반복에서부터 탈출 해탈을 강조하며, 깨달음 자리에서 일체만물의 유기체적 동체감을 체득하여 자비의 실천행, 곧 보살도를 강조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모토로 삼는다.

    셋째 범주는 중국계 종교로 ‘성인의 종교들’이라고 부르는데 유교, 도교가 그 대표적 종교들이다. 이 종교들은 현실적·실천적·세계관을 가지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수양하면 본래 마음을 회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윤리적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종교의 목표이자 삶의 구경이다. 자연 자체가 능산적 공능을 무궁무진하게 지닌다고 보며, 인간은 우주 대자연의 법도에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윤리적 대동세계 혹은 ‘무위이화(無爲而化)’ 평화세계를 이루는 것이 궁극목적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말한 세계종교들을 유형적 특징을 따라 대별하는 세 가지 범주는 이해를 돕기 위한 종교학자들의 범주화 작업 결과지만, 어느 범주에 속한 종교든지 현실적으로는 두 가지 태도로 대별되고 만다. 그 하나는 ‘열린 종교’요, 다른 하나는 ‘닫힌 종교’다. 열린 종교는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해가면서도 다른 종교와 타문화의 소리에 항상 마음 문을 열어놓고 새로운 경험과 진리체험을 받아들이면서 갈릴리 호수처럼 늘 새로워지는 종교를 말한다. 이러한 종교들은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이다.

    한편, 닫힌 종교들은 자기 종교만이 진리의 종교라고 고집하며 독선적 배타적 태도를 견지한다. 다른 종교들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배타적 태도를 넘어서 어떤 경우에는 타종교에 대한 정복적·공격적 태도를 견지한다. 모든 종교에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개방성과 배타성, 열린 자세와 닫힌 자세가 공존한다. 그런 중에도 대체적으로 보면 셈족계 종교들에서 닫힌 종교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한국의 개신교가 보수적이며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더 강하게 지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기독교, 그중에서도 한국의 개신교가 한국의 타종교들에 비하여 배타적이고 정복론적 선교정책을 펴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개신교가 지닌, 경전에 대한 확고한 교리적 신념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관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신적 계시와 영감에 의해서 기록 보존된 것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진리이며 배타적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를 신학적 전문용어로 ‘성경축자무오설’이라고 한다.

    한국 개신교 배타성의 원인

    신·구약 성경은 그 안에 예언, 율법, 지혜문학, 종교시, 서신, 묵시, 예수의 교훈과 생애, 전도여행록, 목회서신 등 다양한 장르를 가진 인류 종교문헌의 보고다. 그러한 경전 중에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영감에 의한 예언 및 교훈도 분명히 있지만, 시대적·사회적 제약과 역사적 종교의 문헌자료로서 모든 책이 지니는 성격도 내포한다. 그런데 개신교 보수주의 신도들은 신·구약 성경 한 자, 한 자가 모두 신적 영감과 예언에 의한 절대경전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고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절대적 진리경전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그 경전 안에 불교나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들과 대화 협동하라는 말이 없고, 도리어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시대 상황과 초대 그리스도교의 사도행전적 시대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타종교를 이교, 우상종교 등으로 매도한다. 그러한 단순 대입논리를 가진 한국 개신교들은 가나안 토착민들의 우상종교들 혹은 지중해 연안 주후 1세기 고대사회에 풍미했던 저급한 이교들과 같은 범주 속에 아시아의 고등종교들을 집어넣는다. 예를 들면 불교 유교 힌두교 원불교 천도교 등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진입해 들어갈 때 직면했던 가나안의 토착종교들과 같은 범주로 생각하여 배타적 정복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 교회들이 대체로 타종교에 대하여 보수적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책임이 크다. 19세기 말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한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 중에는 참으로 헌신적인 선교사가 많았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이들처럼 초기 개화기에 선교사업, 교육사업, 의료사업 등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에 파송된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아시아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사람들이었고,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으로 무장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한국 초기 개신교 지도자들의 신학교육을 전담했는데, 그때부터 아시아의 고등종교들마저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우상종교 보수종교라는 시대착오적인 사상을 주입했다. 그런 신학교육으로 양성된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은 대체적으로 불교나 유교 경전을 직접 연구하기를 꺼리고 배타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교인들도 배타적 태도를 지니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부끄러움이고 비극이며 앞으로 반드시 극복해야 할 큰 과제로 남아 있다.

    셋째, 한국 개신교가 특히 한국 같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갈등의 씨앗을 자주 제공하는 이유 중에는 뜨거운 선교열을 들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한국의 긴 종교문화사 속에서 보면 매우 젊은 종교에 속한다. 개신교가 전래된지 불과 125년밖에 안 됐으니 개신교의 성경중심적 신앙과 뜨거운 영적 종교체험을 한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자기가 경험한 기독교 진리를 동족에게 열심히 전하려는 선교와 전도 열정을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전도하고 선교하되 다른 종교들을 폄하거나 정복하려는 공격적 태도를 견지하는 데 있다. 흔히 전철이나 역광장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피켓을 든 개신교 전도대의 얼굴에서 사람들은 공격적 태도를 느끼며 ‘타종교 지옥, 예수교 천국’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종교적 광기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극보수 개신교단의 선교신학은 한국 사회에서도 더이상 용납되지 않고 도리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사회를 건강한 열린 사회로 만들고 한국의 종교들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 종교간의 대화자세와 협동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참된 ‘대화문화’ 정착 시급

    첫째,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 다름과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상대방을 경청하고 배우려는 열린 마음의 관계다. ‘대화’는 어디까지나 대화여야지 ‘대화’를 가장한 ‘정복’이나 ‘전도’와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대화 당사자간에 서로 다른 점과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고 피차 참된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참된 ‘대화’에 서투르다. 속된 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지배하려는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대화’의 기술에 서투르다. 심지어 학문세계에서마저도 건전한 비판논쟁을 통한 차원높은 대화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고, 상대방 학자의 이론을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적과 동지라는 전선이 형성되어 무서운 흑백논리가 기승을 부린다.

    물론 적을 분명하게 설정하면, 아군의 자기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겠지만 진리의 탐구세계는 포탄 터지는 군대의 전투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 보수 종교단체들의 배타적 태도는 진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교인들 심성을 육성하지 않고, 일정한 시대에 형성된 교리의 틀 속에 신자들을 가두어놓으려 한다. 그 결과 개신교 신도들의 영적 성숙은 중단되고 끝없는 물량적 성장논리만 기승을 부린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정신문화의 위기이기도 하다.

    둘째,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란 각 종교들이 경험한 진리의 특이성을 모두 무시하거나 통합하여 하나의 미래종교를 만들려는 ‘종교혼합주의’ 운동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에 힘쓰는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점이 바로 값싼 종교혼합주의 시도다. 그러한 종교혼합주의 운동은 살아 숨쉬는 산 종교인의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를 단지 이론과 관념체계로 파악하려는 지식인들이나 진지하지 못한 종교인 사이에서 흔히 발생한다.

    종교적 진리의 실천이 중요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이란 매우 역동적인 일이며 생명적 사건이지 결코 모자이크 종교를 만들자는 운동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각각의 악기가 자기 음색과 멜로디를 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더 큰 화음을 만들자는 관현악 단원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매우 역설 같지만 다른 종교의 진리체험에 귀를 귀울이고 대화와 협동에 두려움 없이 나선다. 반대로 자기 종교의 진리에 대한 깊은 체험과 자신감을 결여할수록 대화와 협력을 기피하고 비판한다.

    개중에는 종교간의 대화를 인정하고 타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마치 자기 아내 또는 남편이 가장 신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하려면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의 신실성이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대동소이하다.

    셋째, 종교간의 성숙한 대화와 협동을 진전시키려면 진리 앞에서 인간은 좀더 겸허해야 하며, 인간문화의 상대성과 인간의 해석학적 제약성에 대하여 좀더 진지해야 한다. 독단과 독선은 금물이며 우주적 위대한 종교들이 공통으로 경고하는 마음의 독이다. 인류사회 속에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리 그 자체’인 ‘궁극적 실체’의 무한성과 신비성에 일차적 원인이 있고, 이차적으로 인간의 진리 체험방식과 진리담론의 이야기 방식에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목축업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막 베두인들의 구원체험과 논농사를 지으면서, 장마를 겪으면서 생존해온 동아시아 사람들의 구원 이야기는 그 색깔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지질 기후 풍토의 차이만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 역사경험의 차이, 생산 노동 분배의 차이는 다양한 구원체험과 진리담론의 방식을 인류문화사 속에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이 모이면 모일수록 백광의 밝은 빛을 발하듯이 진리의 백광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넷째, 21세기 한국사회 속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은 어떤 종교가 더 높고 바른 진리 또는 교리를 지니고 있느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어느 종교가 사랑, 자비, 너그러움 등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인간을 고통과 죄에서 해방시키고 인간다운 생명세계를 실현하는 데 봉사하느냐의 관점에서 판단되고 이뤄져야 한다. 교리가 앞서지 말고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교리차원에서 서로 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을 실천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가슴을 열고 협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한국 종교계에서 인권운동, 통일평화운동,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돕기 운동, 생태계 보존 운동 등을 중심으로 대화하고 협동하는 일이 많아진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며 바른 일이다. 사람들이 귀의하는 종교는 불교, 기독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등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종교의 구원교리와 경전 내용은 다양할지라도, 진정한 종교인들의 삶은 놀라운 공통점을 보인다.

    첫째, 자기중심적 삶에서 해방되어 진리중심, 생명중심, 이웃중심으로 전환한다. 둘째, 생사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고 유연성과 관용성을 지니면서 다른 생명의 아픔에 대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다. 셋째, 사랑, 봉사, 자비, 어진 일을 보수를 바라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면서 산다.

    다섯째, 무종교인은 있어도 비종교인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인간이란 구체적으로 역사적 특정종교에 귀의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성 깊은 곳엔 누구나 종교적 영성을 지니고 있는 영물이란 말이다. 기존 종교형태는 달라지고 닫힌 종교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질지라도 새롭게 형태변화를 한 종교가 문명 속에서 온전히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의 자기 초월 운동이며, 진리 자체가 드러나는 은총의 신비한 삶 속에서 인간의 응답이자 궁극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한 정보화사회에서 사이버공간이 확장 심화되고 유전자공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거기에 걸맞게 형태를 변화시켜가는 새 시대의 종교는 여전히 더욱 필요할 것이다.

    건강한 종교들이 숨쉬는 사회는 곧 건강한 사회이며 깊이가 있는 문명사회다. 종교가 천박하고 병든 사회는 그 문명사회 역시 천박하게 되고 병들고 만다. 종교문제는 단순히 종교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건강한 종교들이 대화와 협동을 실천하기 위해,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등 대중매체들이 사회의 병든 종교현상을 진단하고 공론화하여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관심을 갖는 적극적 자세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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