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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200만부 베스트셀러’ 시대의 풍속도

  • 하태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만화 ‘200만부 베스트셀러’ 시대의 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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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어른이 지하철 한 귀퉁이에 몸을 맡긴 채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는 장면을 보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청소년들만 보는 것으로 치부되던 만화가 어느새 성인들의 문화생활에도 깊숙이 파고든 탓이다. 이제는 어설프게 쓴 개론서보다 제대로 된 만화책 한 권이 더 유용하고 상세한 지식과 정보를 준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데…. 》
8월 10일 오후7시 서울 지하철 2호선.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만원을 이룬 객차 안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흘러 나온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고 생긴 모양이군…’ 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잠시 후에는 아예 박장대소(拍掌大笑)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을 따라 가보니 ‘소리’의 주인공은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30대 초반의 ‘신사’다.

그 ‘신사’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차림새를 봐서는 시사잡지나 경제지 같은 것이 들려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 30대 신사의 손에는 만화 ‘용하다 용해’가 들려있다. ‘무용해’란 이름을 가진 한 대리의 눈높이에서 본 샐러리맨의 애환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이 만화를 통해 이 ‘신사’는 이날 회사에서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를 날려보내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안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이 30대 신사와 ‘닮은 꼴’은 이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만화로 달래는 직장인, 친구나 직장동료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색다른’ 재미를 맛보는 어른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신세를 지는 틈을 타 밀린 시리즈 만화를 탐독하는 사람들….

어디 그뿐이랴. 남편을 출근시킨 뒤 짬을 내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가정주부들도 만화를 사랑하는 어른의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만화를 모두 모아놓은 만화방이나 도서 대여점에 어른들이 몰린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런 얘깃거리도 아니다.

넥타이와 만화가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면서 시작된 만화붐은 어른들이 즐겨보는 비교적 점잖은 일간지에까지 급속히 파급돼 모든 신문에 4컷짜리 시사만화 이외의 고정 만화란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만화는 어느새 우리사회의 ‘어른’들에게도 친근한 벗이 되고 있다.

성인들이 만화를 가까이 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만화를 보면 실컷 웃을 수 있다는, ‘재미’를 준다는 요소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만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어른들이 봐도 좋을 만큼 풍부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즉 과거에 ▲명랑 ▲순정 ▲무협 ▲스포츠 만화 정도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었던 만화장르가 이제는 100여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화, 세분화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일반화된 기업 만화를 그리더라도 과거 같으면 직장생활을 통해 자신의 꿈과 야망을 달성하는 동시에 사랑을 얻는다는 식으로 지극히 단순하게 스토리가 전개됐지만 최근에는 특정 직종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본격 직장만화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하 역사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던 웅장한 스케일에 도전한 만화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부엌일 정도로 치부했던 요리사의 세계를 다뤄 공전의 히트를 한 만화도 많다.

그런가 하면 ‘식스 센스’를 능가할 정도로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 치밀한 구성을 지닌 공포물도 수적으로, 양적으로 늘어 만화를 찾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인들이 “나 만화 읽어요”라고 자랑하면서 만화를 볼 만큼 만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무시간에 짬을 내 소설을 읽는다면 몰라도 상사가 지켜보는데 만화를 볼 만큼 배짱 좋은 샐러리맨은 없을 것이고,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들과 나란히 앉아 무협만화를 보며 키득거릴 만큼 너그러운 아빠도 드물 것이다.

만화에 새겨진 ‘주홍글씨’

물론 모든 만화는 스토리 전개가 거칠고 정서함양에 유해하다는 식의, 만화에 낙인 찍힌 문화적 ‘주홍글씨’의 색이 급속히 바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뇌리에는 여전히 만화 유해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성인만화는 이같은 척박한 환경속에서 잡초처럼 그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화는 어떻게 정의될까? 일단 옥편(玉篇)을 찾아보면 만화의 만(漫)자는 그리 좋지 않은 뜻임을 금세 알게 된다. 첫 번째 뜻은 질펀한 땅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고, 둘째는 흩어지고 난잡하다는 의미다. 이외에 함부로, 멋대로 라는 뜻도 있다. 거기에 그림을 뜻하는 화(畵)를 붙였으니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우습고 재미있는 그림이야기’일 뿐이다.

이름 탓인지 한국의 만화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치부이자 문화의 서자(庶子) 쯤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은 만화에 탐닉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왔고 올바른 인격형성과 학업을 위해서는 멀리해야 하는 것쯤으로 간주해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성인만화 시장은 최근까지도 불모지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만화계가 아직까지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기형적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아직까지도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 즉 청소년 만화가 시장의 절대다수인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아동만화를 보면서 자란 독자가 청소년만화를 보고, 다시 어른이 되어서 성인만화를 보는 구조가 아니라, 중고생들만 만화를 보는 구조인 것이다.

도서출판 대원의 오태엽 팀장은 “이런 구조라면 한국에서 만화는 청소년만을 위한 장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 기꺼이 사줄 수 있는 아동만화와 어른이 돼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성인만화가 많아졌을 때 비로소 만화가 하나의 대중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쉽게도 2000년 8월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인만화잡지가 하나도 없다. 90년대 중후반기에 한때 4개나 존재했지만 대원의 ‘투엔티세븐’, 세주의 ‘미스터 블루’가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해 97년말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근근이 버티던 서울문화사의 ‘빅점프’도 결국 2000년 8월 1일자를 끝으로 폐간했다.

성인 만화계가 침체에 빠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97년 일었던 청소년보호법 파동이다. 검찰은 97년 6월 만화가 학원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원인을 제공한다면서 만화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이어 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안이 발효되면서 만화에 대한 단속과 규제가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화 유통의 중요한 거점인 서점에서 성인만화를 비롯한 만화의 취급 자체를 꺼리면서 만화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서점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등 유통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성인만화 잡지들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속속 폐간하기에 이른 것.

어려움을 겪던 성인만화가 다시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IMF 경제 위기 뒤 만화 대여점과 대본소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부터다. 청소년만화를 주로 취급하던 대여점과 대본소가 성인만화를 취급하면서 단행본을 주로 발행하는 군소 출판사에서 일본의 성인만화를 정식 수입해 발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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