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나는 조선일보의 몰상식과 싸운다

  • 김정란·시인·상지대 교수

    입력2006-08-08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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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에서 언어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미디어의 존재다.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현대사회 안에서 개인은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세계를 인지할 수 없다. 정보는 무한팽창을 거듭한다. 누군가 나서서 정보를 분류하고, 가치를 매겨주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정보가 올바른 가치를 창출해 내도록 물꼬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역할은 현대사회에서 언론에 맡겨져 왔다. 언론에 높은 합리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한번도 실질적으로 수평적 권력배치, 즉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립된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다. 말로는 ‘보통사람의 시대’라면서 실제로 권력자들은 등뒤에서 보통사람들의 주머니만 털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3공화국이 형성해 놓은 수구기득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이후에 어쨌든 군부는 표면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정경유착으로 끈끈한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수구세력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무엇인가 정말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교체된 듯한 표면적 구조 뒤에서 ‘부조리 공장’이 계속 돌아가도록 만드는 어떤 이면 구조가 있다.

    이것은 대언론사들에 의하여 재생산되고 있다. 대언론사들이 수구기득권 세력에 유리하도록 말의 방향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면 반드시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많은 피를 흘렸으면서도 제대로 민주화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언론사들이 독재정권에 아부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려왔다는 사실이다.

    변치 않는 수구기득권 세력



    근본적으로 한국 언론의 문제는 사주 중심의 소유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실질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사주가 편집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인 장치를 마련해 국민의 진정한 의도가 반영되는 말의 통로를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의 문제는 조선 동아 중앙의 ‘빅3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아닌가? 어째서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만 문제삼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만’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반조선일보운동은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삼는 것이다. 전체적인 테두리에서 살펴보면 빅3 모두 문제가 있다. 그러나 동아나 중앙은 ‘사상 검증’의 칼을 들고 자신들에 불리한 인사를 낙마시키는 몰상식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매카시즘 사냥 때문에 우리 사회는 능력있는 인사들이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낙마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한완상, 김정남, 이장희, 최장집 등이 그 직접적인 희생자들이다.

    또한 동아, 중앙 양사의 사설이나 중요 칼럼들을 살펴보면 그 논조가 조선일보처럼 수구 일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적인 필진들이 집필하는 합리적인 글들도 찾아볼 수 있다. 양사는 중요 칼럼 지면을 외부의 개혁적인 인사들에게 많이 개방하고 있다. 반면에 조선일보의 중요 칼럼들은 거의 내부 필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개방되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자기 입맛에 맞추어 글을 써줄 필자들에게만 개방한다.

    반면에 문화면에는 아주 다양한 필자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조선일보와 정치적으로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좌파 지식인들과 좌파 문인들에게마저 큰 지면을 할애해준다. 그러나 ‘문화적 접근’에 한정된다. 정치에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들에게 고정 칼럼을 맡기는 법도 좀처럼 없다. 고정 칼럼이 제공되는 경우는 정치적인 색채가 없는 지면들 뿐이다. 조선일보는 정치적으로는 자신들의 반대자들에게 절대로 지면을 제공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한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정치 논리이기 때문이다.

    진지전과 기동전

    반조선일보운동이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신문이 동아, 중앙과는 달리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사회적 집단의 정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아, 중앙 양사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수구적인 논조를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역사를 치장하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만용까지 부리지는 않는다.

    조선일보가 ‘민족정론 80년’이라는 구성물까지 시청앞에 설치하는 등 요란법석을 떨며 창간 80주년 잔치를 벌인 데 반해 동아일보는 같은 연조를 기념하는 행사를 조용히 치르는 겸양을 보이기도 했다. 5·18 항쟁 20주년 기념일에도 비록 짤막하기는 하지만, 사설에 “언론도 반성할 점이 있다”는 멘트를 내보냈다.

    그 날짜에 조선일보가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면, 어째서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이 조선일보를 ‘특히’ 문제 삼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문들이 모두 기획기사를 내보낸 데 반해 조선일보는 기획은커녕 사설에서조차 단 한 줄도 5·18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날 조선일보는 ‘美 맥아더 기념관서 찾은 6·25 미공개 사진’을 총천연색으로 실었으며, 기획기사 ‘그러나 역사의 증언은 끝나지 않았다’에서도 6·25 관련 흑백사진을 두 면 전면에 걸쳐 깔았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조선일보는 6·29 항쟁의 실질적 근원인 5·18의 역사적 의미를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조선일보의 속마음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월간조선’은 5·18 항쟁을 아직까지도 ‘광주사태’라고 부른다. 조선일보는 민주적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신문은 자신들이 숭앙하는 수구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깡그리 숨기는 것은 물론 이미 독재자로 판명난 이승만을 국부로 숭앙하고, 한국사회의 현 기득권 계층 형성의 근원인 박정희 통치를 미화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상징조작을 감행하기도 한다.

    상징조작을 보다 대대적으로, 보다 노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월간조선’이다. ‘월간조선’은 끈질기게 진지전을 수행한다. 그러다가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월간조선을 통해 드러낸 자신들의 일방적 논리를 조선일보가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기동전에 들어간다. 조선일보는 이런 방식의 사상검증으로 마음에 안 드는 인사들을 제거해 왔다.

    그런가 하면 자기들이 밀어주기로 결정한 정치가에게는 입속의 혀처럼 군다. 이건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조선일보는 정말 입속의 혀 노릇을 한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이회창씨 입 속의 혀다. 조선일보 사설에 나왔던 정치 메뉴들이 다음날이면 이회창씨 입에서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온다. 조선일보는 이미 차기대통령 만들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화해 무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는 그동안 조심하던 태도를 버리고 마구잡이로 남북화해무드에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친미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미 공화당이 북한에 대해 민주당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부시 후보가 당선됐으면 하는 소망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월간조선’은 9월호 부록으로 부시의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 테이프를 끼워주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행태를 통해 자신들이 민족의 안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며, 민족이야 고통스러워 하건 말건 기득권을 누릴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냉전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반민주·반민족·반통일·친외세 세력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반조선일보운동은 언론학 연구가 목표가 아니다. 언론학 연구가 목적이라면 언론 문제 일반을 다루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반조선일보운동은 문자 그대로 ‘운동’이다. 즉, 우리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 전체를 상대해 싸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악의 상대를 분명하게 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가장 타락한 언론을 개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문제가 덜한 신문들의 개혁을 유도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 치더라도 조선일보는 조선일보가 원하는대로 말할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일보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언론자유 침해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할 자유가 있다. 반조선일보운동 진영은 조선일보가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말하되 꼼수 부리지 말고 투명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그 때문에 억울하게 다치는 사람이 없고, 그 자유가 공익에 부응할 때만 비로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타인이 말할 자유를 존중할 때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상검증의 칼을 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신문이 어떻게 언론의 자유를 논할 수 있는가.

    조선일보는 툭하면 자유민주주의 얘기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조선일보 맘대로 하기 주의’인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왜 타인의 입은 틀어막는가.

    조선일보가 마음대로 말할 자유가 있다면 조선일보 반대자들에게도 마음대로 말할 권리가 있다. 조선일보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면 조선일보 비판자들에게는 비판의 자유가 있다. 조선일보 지면에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언론의 자유를 운위할 수 있다. 자기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위장 전술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밝히려는 시민을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세력으로 모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동인문학상의 의도

    게다가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의 비판자들과 절대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정말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논쟁의 테이블로 나오지 않는가. 한 예로 MBC TV에서 박정희 기념관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5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일보 인사들과 친조선일보 인사들을 섭외했지만 아무도 토론에 응하는 사람이 없어 결국 프로그램을 포기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지면을 통해서는 그토록 박정희를 신격화한 사람들이 무엇이 무서워서 논쟁의 테이블에 나오지 못하는가. 공적인 장소에 나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검증받아야 하지 않는가. 언론의 자유를 말하려면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에 있는가.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책임과 함께 가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으려거든 언론의 자유를 말하지 말라.

    조선일보가 자신의 수구적 정치색을 가리는 방법은 문화면을 통해 이뤄진다. 조선일보 문화면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문화면의 유사 진보성(왜냐하면 조선일보 문화면에는 극우성 또한 뚜렷하므로)과 정치면의 수구성, 그것이 조선일보의 정체다. 조선일보는 문화면에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배치한다. 좌파 문인들마저 융슝한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다양한 필자들을 동원, 문화면을 화려하게 꾸며서 독자들을 끌어들인 후 정치면에서는 수구적 견해를 유포하는 것이다.

    최근에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학을 이용해 조선일보의 정치색을 가리겠다는 의도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방한 셈이다. 한국 최고의 상금을 걸고 한국 최초로 종신 심사위원 제도를 도입했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문학과 지성사’의 정과리는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는 별개라는 논리를 펴면서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의 정치색을 가리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네티즌들의 우려를 일축했다.

    정과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생각이지 조선일보의 생각은 아니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무책임하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다. 이미 강준만 교수를 위시한 많은 언론학자들이 조선일보가 문화면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색을 숨겨온 사실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와 별개라는 주장을 하려면 언론학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만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막연히 ‘희망’만을 가지고 동인문학상이 조선일보에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그렇게 믿고 내버려두기에는 조선일보 때문에 국민이 부담해야 될 비용이 너무 크다.

    또 정과리는 몰리에르가 보편적으로 사유했기 때문에 그의 절대왕권에 대한 복종이 오히려 절대왕권 해체에 도움을 주었다는 예를 들면서 동인문학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몰리에르의 활동 무대는 19세기 프랑스다. 그 맥락이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작동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는가.

    조선일보 변화시키기(?)

    한국사회는 아주 사소한 아노미적 요소만 가지고도 사회 전체가 균형을 잃을 수 있는 대단히 불안정한 사회다. 그것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정과리가 다른 시대 다른 사회의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해서 실험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 불확실한 결과를 기다릴 만큼 한국사회는 한가하지 않다. 수구 기득권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해체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합리성 정착은 또 몇 십 년 뒷걸음질칠지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정과리가 ‘외곽 때리기 수법’이라고 명명한, 문학을 이용한 조선일보 변화시키기란 전혀 새로운 방책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도 문인들은 조선일보에 열심히 기고해 왔다. 문학이 조선일보를 외곽에서 때려서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동안 조선일보 내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조선일보를 ‘면피’하게 하고 조선일보의 영항력을 증대시키는 데 종사했을 뿐이지 않은가. 따라서 정과리의 전략은 미래형 전략이 아니라 이미 효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과거형 전략에 불과하다.

    정과리는 조선일보가 문제 있는 신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괴물의 손에 들린 꽃’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꽃이 괴물을 감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매우 신화적인 믿음을 피력했다. 좋다. 정과리의 믿음대로 추악한 괴물인 조선일보가 순진한 문학에 감동해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도록 하자.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 독자들을 상대로 ‘조선일보는 문제가 있는 신문이지만 문학을 통한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꽃을 바라보는 독자들이 괴물과 꽃의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은 꼼짝없이 괴물을 왕자라고 착각할테니까 말이다.

    만일 정과리가 동인문학상 심사독회에 나갈 때마다 조선일보의 문제점을 조선일보 독자들을 상대로 설파할 수만 있다면 나도 정과리의 믿음에 동참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 독자들을 상대로 그 얘기를 아무리 해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가 그것을 용납할까.

    또 정과리는 조선일보는 앞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조선일보가 변한다면 그것은 정과리처럼 편안하게 조선일보 품에 안겨 명성과 돈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조선일보 밖에서 온갖 험담을 들어가며 힘들게 싸운 사람들 덕택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과리가 조선일보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다. 정과리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히 해두고 지나가도록 하자.

    어떤 이들은 반조선일보운동을 이념 논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문열은 주간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반조선일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현정권과 유착되어 있으며, 문화적 위장을 통해 현정권 대신 조선일보에 정치적 보복을 하는 테러리스트들”이라는 극언을 했다. 또 정과리는 같은 지면에 실린 고종석과의 대담에서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데올로기의 종언 때문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구좌파들이 찾아낸 옹색한 ‘공략 거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문열과 정과리의 논리는(그들이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조선일보 논지를 매우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사설을 통해 조선일보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친북세력이라는 암시를 한 바 있다. 이문열과 정과리의 발언은 용어만 다르다 뿐이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는 조선일보의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묻고 싶다. 그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사실관계를 파악했는가. 사실 확인은 중요한 정치적 발언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최소한의 절차가 아닌가.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념논쟁이 아니다. 이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8월7일 발표된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운동에 서명한 지식인 가운데 ‘구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히려 지금 좌파들은 반조선일보운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선일보 지면 활용론을 주장하는 실정이다.

    반조선일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이념적 분포는 너무나 다양하다. 나만 해도 이념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나는 이념 곁에 가본 적도 없다. 이것은 ‘좌파’라는 이름이 나에게 덧붙여질까봐 두려워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이념을 신봉하지 않는다. 내가 조선일보와 싸우고 있는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늘상 국민을 협박해 왔던 조선일보가 더이상 이념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우리 사회 개혁을 막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조선일보 운동은 지식인 운동이 아니다. 파리 8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재우는 정과리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반조선일보 지식인 서명이 ‘최소한의 이념논쟁’도 동반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지만, 그것은 80년대의 연장선에서 이 운동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념논쟁은 이 운동의 본질이 아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념의 푯대가 없으면 삶의 기준을 정할 줄 모르는 담론강박증 환자들이 아니다. 지식인 서명은 운동의 테이프를 끊기 위한 형식적 요건에 불과했다. 이미 ‘반조선일보 시민단체 공동대책위’가 꾸려져 있다. 지금 반조선일보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이 전경화되는 단계가 되면 모두 뿔뿔이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헤어지더라도 서로의 사상을 존중하겠지만 말이다. 우파에서 좌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극좌와 극우만 없다. 80년대의 주사파들인 극좌 중 일부는 지금 극우 조선일보와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시대정신’ 진영은 지금 조선일보와 한 배를 타고 북한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몰상식과의 싸움”

    반조선일보 운동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몰상식과의 싸움이다. 반조선일보 운동은 시대가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냉전의 유령을 끌고 들어와 국민을 계속 전근대의 몽매에 묶어두려고 하는 몰상식한 집단과의 싸움이며, 나의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숨쉬기 운동’이다. 나는 거짓말이 정론이라고 선전되는 이 땅의 대기를 견딜 수가 없어서 반조선일보 운동 대열에 동참했다. 나는 조선일보가 장사를 하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다, 돈 벌고 싶으면 벌라는 것이다. 다만 언론인 체 하지 말고 정치세력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솔직하게 장사하라는 말이다. 제품의 카테고리와 품질을 분명히 해달라는 말이다.

    일부에서는 반조선일보 운동이 ‘안티운동’이라는 점을 들어서 그것이 네거티브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일보 자체가 네거티브한 집단이기 때문에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은 네거티브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포지티브한 태도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매사에 딴지를 걸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람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국민의 염원인 통일조차도 못마땅해서 남북화해 무드에 재를 뿌리는, 한국에서 가장 네거티브한 집단에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네거티브한 태도인가. 반조선일보 운동은 부정적인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의 비전을 찾기 위한 포지티브한 운동이다.

    증오와 불신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국민이 서로 물어뜯도록 만드는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세계관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일보의 몰상식을 견딜 수 없다. 반조선일보 운동은 아주 단순 명쾌하며 어쩌면 뻔하기까지 한 운동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조차 ‘불순한’ 것으로 매도당하는 아주 이상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 슬프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걸어나간다. 나처럼 힘없고 별볼일없는 시민들이 조선일보라는 ‘말의 바스티유’를 향하여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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