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이중성

  • 입력2006-08-08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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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복
    • 1946년 대전 출생
    •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디자인학,서양미술학 전공
    • 현재 덕성여대 산업미술과 교수, 만화가,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회장
    • 저서: '이원복 교수의 진짜 유럽이야기'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현대문명진단'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장 관심이 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나라의 국민성이다.

    요즘같이 민주화되고 개성이 존중되는 세상에 한 국민을 뭉뚱그려 이러이러하다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분명 커다란 잘못이지만, 그 나라 국민들의 의식저변에 공통적인 습성이나 사고방식이 있음은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이런 것을 국민성이라고 얘기한다면 어느 국민이나 적든 많든 간에 이중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역사에서 비롯되었건,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되었건, 또 민족의 구성에서 비롯되었건, 이중성이란 일종의 자기보호 장벽이며 어찌 보면 본능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정말 생각은 이렇게 하는데 말과 행동은 저렇게 하는 습성은 의식저변에 언행일치에서 오는 불이익을 원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나라마다 그 정도도 다른 것이 자못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속내와 겉내가 다른 가장 대표적인 국민으로 일본인을 꼽는다. 본심인 혼네(本音)과 입 밖으로 나오는 겉치레 말 다테마에(建前)는 일본 국민 누구나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속성이다.



    본심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또한 드러냈다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한참을 빙빙 돌려 얘기하는 습성에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익숙해 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속에 있는 말을 탁 털어놓는 경우를 거의 기대할 수 없고, 최후의 순간까지 깍듯한 예의 범절을 지키는 그네들이 얄미웁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솔직하지 않은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에서는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는 것이 일종의 터부처럼 되어 있고, 실제 털어놓는 사람은 정말 외계인 취급을 당하는 사회인만큼, 모든 사람이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사전에 이미 알고 있으며, 빙빙 돌려 얘기하는 핵심을 알아서 새겨들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결국 이중성이긴 하지만, 진정한 이중적인 성격이 아니라 화법(話法)이 다르고 대화방식이 다른, 일종의 사회적 합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앞에서 호들갑 떨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미국인들이다.

    great, wonderful, amazing, fantastic 등등 온갖 감탄사는 다 늘어놓고, 간이라도 빼줄 듯 친절을 베풀다가도 일단 돌아서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안면몰수한다.

    아마도 워낙 많은 다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여서 겉으로 무뚝뚝하게 굴면 오만하다느니 인종차별한다느니 온갖 비난이 뒤따를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한 미국적 제스처일까?

    프랑스인들은 한술 더 떠 기찻간에서 사귄 사람이라도 반드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한번 꼭 들르라고 몇 번 씩 확인한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인간들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그를 찾아간다면 그야말로 정신병원 탈출한 환자취급을 받게 된다. 절대왕조시절 궁중에서 만연하던 예의, 예절, 과장이 오늘의 서민들에까지 전파되어 이중성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그러한 프랑스인들도 자신의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애초부터 정색하고 달려든다. 돈에는 결코 농담도, 이중성도 없는 점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크게 다르고 자기 손해 볼 일은 하늘에 맹세코 코털끝만큼도 안 하려 든다. 그래서 비즈니스에 관한 한 독일인들도 프랑스인들에게는 두 손 다 들어 버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독일인들은 여기에 비하면 순진무구한 원리원칙주의자들로 이중성이란 그네들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ja면 ja, nein이면 nein, 딱 부러지는 결론이지 이것도 저것도 좋다는 식은 있을 수 없고, 일단 한번 사귀어 신임을 얻어 놓으면 그 관계는 평생 동안 유지된다. 그러나 중간에 한번이라도 신의를 배반하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천만금을 주어도 마음을 되돌려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장 비즈니스하기에 편하고 쉬운 상대가 독일인일지도 모른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고, 만약 못 지키는 한이 있어도 납득할 만한 사유로 설득하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인만큼 신뢰를 허물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중성이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한국인들이 아닐까? 작은 예로, 우리 일상대화에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솔직히 말해서’이니, 평소에는 그만큼 솔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 세계에서 투표가 끝난 뒤 출구조사 통계가 틀리는 나라도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익명으로 응하는 설문에서조차 본심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항상 술을 한잔 걸쳐야 나오는 본심, 솔직히 말해서라는 단서가 붙은 뒤에야 삐져 나오는 속내. 어쩌다 한국인은 이처럼 자신을 꽁꽁 감추며 사는 민족이 되었을까?

    그 원인은 과거 20세기 100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20세기, 철저한 일본제국의 수탈 기간, 그 상처가 아물 기미도 보이기 전에 터진 한국전쟁, 휴전 후의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우리 사회를 지배한 흑백논리. 게다가 통치권은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조작, 과장, 왜곡으로 일관한데다 국민을 배신하기를 밥먹듯 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대통령이 국민을 남겨놓은 채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가는 나라에서 국민들이 과연 지도자를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는 속내를 드러내면 손해 본다는 피해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뿌리를 내렸고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타협은 없다는,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극한 심리가 작용하여 이것이 곧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극한심리가 정치, 경제, 문화, 이념, 종교, 교육 등 모든 면에서 극한으로 치달은 결과를 낳았다. 그 오기와 세상엔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의식이 비록 이 나라에 GNP 세계 13위의 경제성장을 가져왔어도 마음은 한없이 피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들 말하고 마음이 따뜻하다고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정과 따뜻한 배려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베풀어질 뿐, 우리 사회는 양보의 여지가 없는 처절한 경쟁현장이다. 오늘의 정치를 보라. 오늘의 교육을 보라. 정말 이대로 가서는 절대 안 될 마이너스 생산성의 상징이지 않은가?

    이렇게 거창한 예를 들 것도 없다. 타협을 모르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거리의 간판만 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한국 거리의 간판은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간판으로 뒤덮여 벽이나 창문을 볼 수 없는 건물이 부지기수다. 업자들끼리 만나 미화에 대해 조금만 협의했던들, 그리고 서로 조금씩 양보만 했던들, 이렇게 추악한 간판의 정글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시뻘건 바탕의 약국간판, 시뻘건 네온사인의 교회 십자가… 이런 것들이야말로 한국인의 비타협성과 이중성의 상징이다.

    세계화란 우리가 세계 모든 나라와 공존해야 하는 시대를 의미하고, 이런 지구촌시대는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상식의 시대다.

    언제나 우리 사회 전반에 상식이 통할 수 있을지…. 지금 가득 고인 구정물이 빠지지 못하게 버티고 있는 구시대 패러다임의 소유자들이 물러나는 날에야 비로소 새롭고 깨끗한 물이 흐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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