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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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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 자처한 진흥왕 직계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 같은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일단 불교를 공식 수용하게 되자, 마치 백지에 물들듯이 불교가 모든 신라 사람에게 삽시간에 전파돼 나갔다.

이는 신라가 이때까지 어떤 외래문화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고립된 지역으로 문화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최초로 불교로부터 외래문화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漢) 사군(四郡) 설치(서기전 108년) 이후 이미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았던 고구려나 백제 지역이 불교가 들어와도 한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 열띤 호응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벌써 불교 이념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다음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불교를 공인한 지 4년 뒤인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를 굴복시켜 합병해 들인 것이 그 첫 사업이었다. 중국과 직접 교역을 트기 위해서는 좋은 항구와 물길에 익숙한 해양세력이 필요한데, 낙동강 하구를 차지하여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금관가야가 합병의 첫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眞興王, 534∼576년)은 스스로 혈통이 석가족(釋迦族)과 같은 ‘크샤트리아(刹帝利) 종(種)’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 분쟁으로 편할 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돕는 척하면서 끼어들어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엄청나게 빼앗아 들인다. 한강 유역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개마고원 이남의 함경남도 일대까지 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 이외에 나머지 5가야도 모두 정복하여 자국 영토로 삼았다. 이에 진흥왕 22년(561) 경의 신라 영토는 경상남·북도와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와 함경남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이때 진흥왕은 불과 29세밖에 안 된 청년왕이었으니 이런 긴 국경선을 순행(巡幸)하면서 스스로 전륜성왕이란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들 이름도 동륜(銅輪)이나 금륜(金輪)으로 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들이 모두 전륜성왕으로 태어난 것을 천하에 공표한다. 진흥왕의 혈손들이 모두 진(眞)자 왕호를 계승하면서 진골(眞骨)을 자처(自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자부심은 결국 그의 증손자인 태종무열왕(604∼661년)대에 이르러 백제를 멸망시키고(660년), 그의 고손자인 문무왕(626∼681년)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멸망시켜(668년) 끝내 삼국을 통일하는 결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삼국통일이 자력(自力)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것이었으므로, 통일 이후에 당의 영토 야욕에 부딪혀 신라 자체가 멸망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니 당군 격퇴가 눈앞의 현안이 되었던 문무왕으로서는 삼국을 통일했다 하더라도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천하를 호령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재위기간(661∼681년) 내내 죽을 힘을 다해 겨우 당군을 한반도 밖으로 내모는 일에 성공하였을 뿐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신문왕(645∼692년) 역시 통일전쟁 시기에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을 휘어잡는 일에 진을 빼다가 재위(681∼691년) 11년 만에 돌아가는 바람에 전륜성왕으로 군림할 겨를이 없었다.



전륜성왕릉 모방한 성덕왕릉

그러나 신문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나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난 성덕왕(聖德王, 690년경∼737년)이 등극하여 재위(702∼737년) 3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신라의 국운을 절정에 올려놓자, 비로소 신라왕은 전륜성왕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성덕왕 30년(731) 4월에 일본이 병선(兵船) 300척으로 신라의 동해안을 침략하다가 일거에 격파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고, 성덕왕 32년(733) 7월에는 당이 발해의 침공을 받자 신라에 배후에서 발해를 공략해 달라는 군사지원 요청까지 하게 되었으니, 신라의 국세는 그 당시 천하무적임을 자랑할 만큼 강성함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이에 성덕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하여 성덕왕 34년(735) 2월에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국서(國書)에 왕성국(王城國)이라 자칭한다. 왕 중 왕인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였다. 일본이 이런 국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해 1월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김의충(金義忠)이 당 현종으로부터 패수(浿水;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와 백제 옛땅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으로 인정받고 돌아온다.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지 67년 만에 이루어낸 외교적인 성과였다.

이렇게 되자 성덕왕은 명실상부한 전륜성왕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덕왕은 전륜성왕의 자리를 겨우 2년밖에 누리지 못하고 성덕왕 36년(737) 2월에 48세쯤 장년의 나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후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보위에 오른 효성왕(721년경∼742년)이 짧은 기간(737∼742년) 재위하고 단명하자, 그 동생인 경덕왕(725년경∼765년)이 뒤를 이어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절대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절정기인 불국시대 문화를 난만한 지경으로 끌어올려 놓는 일을 감행한다.

경덕왕은 자신이 전륜성왕이 되려면 우선 부왕인 성덕왕과 조부왕인 신문왕을 전륜성왕으로 추존하여 그에 알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성덕왕의 능을 전륜성왕의 능제에 맞게 개수하였다. 전륜성왕의 능이라면 곧 부처님의 능인 스투파(St?pa, 塔婆)와 같은 것이라야 한다.

이에 경덕왕은 그 13년(754)에 (도판 1)을 인도의 (도판 2) 모양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전륜성왕의 능답게 애초 둘러놓은 봉분 주변에 판석(板石)으로 된 호석(護石)을 세워 난간을 더 두르고, 난간과 봉분 사이에 박석(薄石)으로 지면석(地面石)을 깔아 회랑(廻廊) 형태의 요도(繞道)를 만들어 (도판 3)를 방불케 한 것이다.

그리고 호석 외부 받침 기둥 사이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조각으로 조성하여 왕릉을 12방향에서 호위하게 하였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은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무장 모양으로 만들었다. 현존한 이 십이지신상들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그 원형을 잃었다. 오직 신신상(申神像), 즉 원숭이 신상과 (도판 4), 즉 정서(正西) 방향을 맡은 닭신의 형상만 머리 부분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다른 십이지신상의 모양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능의 정남쪽 난간 앞에는 상석(床石)이 놓여 있고 상석 앞에는 (도판 5) 한 쌍과 무인석(武人石) 한 쌍이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오직 (도판 5) 하나만 온전하다. 왕릉 후면과 전면은 각각 한 쌍씩 모두 4마리의 (도판 6)가 지키고 있다. 석사자는 인도 스투파에서 연유한 것이고, 문인석은 당의 황제릉에서 영향을 받은 의제(儀制)일 것이다.

왕릉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성덕대왕릉비를 지고 있던 (도판 7)가 이수(首)와 비신(碑身)을 잃은 채 남아 있는데, 그조차 목이 달아나고 신체 일부가 파손된 형편이다.

조각기법은 (제12회 도판 7)와 비교하면, (제11회 도판 10)과 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 가 에 비해 더욱 풍만하고 비대해졌지만 그에 반비례해 기운 찬 생동감은 많이 감소하였다. 살집이 너무 좋아서 둔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당(盛唐)시대(713∼765년) 중국 문화권 전체를 휩쓸던 미술양식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서예(書藝) 분야에서조차 안진경(顔眞卿, 708∼784년)체와 같이 비후장중(肥厚莊重; 살이 쪄서 두툼하고 큼직하며 무거움)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초당시대(618∼712년)의 구양순(歐陽詢, 557∼641년)체와 저수량(遂良, 596∼658년)체가 힘차고 바르며 굳세고 날렵한 특징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런 대조적인 현상이 그대로 비석 양식에도 반영되었으니 의 조각기법과 의 조각기법이 이와 상응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김유신묘의 비밀

‘삼국사기’ 권9 성덕왕본기 13년(754) 5월조에 “성덕왕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성덕왕릉을 산치탑 모양의 스투파 형태로 개수하여 전륜성왕릉 형태를 갖춘 것은 경덕왕 13년경이었을 것이다. 불국사 창건이 경덕왕 10년(751)부터라 하였으니 성덕왕의 추복사찰 건립도 이와 때를 같이한 것이라 해야 하겠다.

경덕왕은 내친 김에 조부왕인 신문왕릉도 스투파 형태로 호석과 난간을 둘러 전륜성왕의 능제에 충실하도록 하였으니, 황복사지의 십이지신상 조각 판석이 그 유물이라 한다. 이 사실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교수가 ‘통일신라 십이지신상의 양식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그 내용은 제15회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강교수는 이 신문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이야말로 십이지신상 호석 양식의 완성된 형태라고 극찬하고 있다.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인 이 십이지신상은 갑옷이 아닌 도포를 입고 있어 문사차림인데 모두 병장기를 들고 있어, 문사들이 각 방위를 맡아 왕릉을 호위하는 듯하다. 혹시 무장(武將)들이 평복 차림으로 왕릉을 수호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도포차림이 갑옷차림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성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이 갑옷차림으로 무장의 모습을 보인 것은, 십이지신이 방위신(方位神)이니 사천왕[四天王;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라는 높은 산이 솟아 있고 그 주변을 7산 8바다가 둘러 있으며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는 수미산 남쪽의 8해 속에 섬처럼 고립돼 있다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수미산 사방 하늘을 각기 한쪽씩 맡아 다스리니 동방천왕은 지국천(持國天)이고 서방천왕은 광목천(廣目天)이며 남방천왕은 증장천(增長天)이고 북방천왕은 다문천(多聞天)이다]의 권속이어야 하므로 사천왕과 같은 무장 차림을 해야 한다는 불교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현상이었을 듯하다. 전륜성왕의 스투파 건립이라는 의례 감각으로 성덕왕릉을 개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십이지신상이 한결같이 문사차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신문왕릉에서는 갑옷을 도포로 바꾸면서 호석을 이루는 판석 위에 이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이다. 신문왕릉은 아예 호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덕왕릉은 이미 호석이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십이지신상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 앞에 덧장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미 강우방 교수가 밝혀놓은 대로다.

그런데 이런 도포차림의 십이지신상이 한결 세련되게 정리되어 양식 진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다(도판 8). 그렇다면 이런 호석과 난간이 둘린 왕릉제도가 전륜성왕의 스투파에만 해당하리라는 학설과, ‘삼국사기’ 권9 경덕왕 24년(765) 6월조에 경덕왕이 돌아가자 모지사(毛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을 연계시켜 볼 때 현재 김유신묘라고 전해지는 완벽한 스투파식 왕릉이 경덕왕의 능일 수도 있다는 주장에 미술사적 당위성(當爲性)을 완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제35 경덕왕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경지사(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 뒤에 양장곡(楊長谷, 성덕왕릉이 있는 곳)으로 이장하였다.”

경지사는 모지사의 오자(誤字)라고 보아야 한다. 돌을 다듬어 능을 삼았다는 기록이 경덕왕릉에만 나오니 산치대탑과 같은 인도식 석탑 형태의 스투파형 능묘 의제를 처음부터 왕릉에 시공한 것은 경덕왕릉부터라고 보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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