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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 최완수

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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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聖德王, 702~737년 재위) 김융기(金隆基, 690년경~737년)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재위 3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통일 신라 왕국의 국세를 절정에 올려 놓는다. 마침 중국에서도 당(唐) 현종(玄宗, 713~755년 재위) 이융기(李隆基, 685~762년)가 등극하여 ‘개원(開元, 712~742년)의 다스림’으로 불릴 만큼 중국을 평화와 안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땅에서 발해(渤海) 왕국(698~926년)이 일어나고, 백제 피난민을 대거 수용한 일본은 찬란한 백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3년)의 번영을 누리기에 여념에 없었다.

이런 국제적인 소강상태를 충분히 활용하여 성덕왕은 나라를 부강과 안정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삼국통일 과정에 삼국간의 쉴 새 없는 전쟁은 물론이려니와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이 땅에서 싸우게 함으로써 200년이 넘는 동안 전쟁 없이 살아본 적이 없던 한반도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동안 백제와 신라는 각기 자기 나라에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미륵불국토를 이룩함으로써 자신들을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미륵불국토 건설에 매진해왔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미륵하생시에 3회 설법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미륵하생경’의 가르침에 따라 익산 용화산 아래에 이 3회 설법을 상징하는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의 구조를 가진 미륵사를 무왕(武王, 600~640년) 초년경에 건립하였다. 백제가 미륵보살이 하생한 미륵불국토임을 표방한 것이다. 자신과 신라에서 유인해 온 신라 왕녀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신라는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를 왕위에까지 올려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

진흥왕(540~576년 재위) 말년경에 확장된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소년 군단을 창설했는데, 묘령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화(原花) 혹은 선화(仙花)라는 이름을 붙여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임을 표방하면서 이들 소년군단을 이끌게 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장차는 왕녀가 원화의 소임을 맡아 막강한 소년군단을 이루어갔던 듯하니, 석가모니불의 부모와 이름이 같은 백정반(白淨飯)과 마야(摩耶)부인이란 이름을 가졌던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재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덕만(德曼) 공주(580년경~647년)가 그 핵심인물이었던 듯하다. (제10회 도판 1)을 선덕여왕의 초상조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덕만공주를 원화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성장한 화랑도 1세대인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30대 후반이 되어 군권의 실세를 장악하니 미륵보살의 직접 통치를 표방한 여왕의 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미륵사를 대규모로 지어놓고 미륵불국토의 성취를 내외에 선전하며 민심을 사로잡아 신라를 맹공해 오는 데 대항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여주(女主)가 이렇게 미륵보살의 하생을 표방하며 군림하여 민심을 사로잡는 일은 이미 중국 북위(北魏)로부터 비롯되고 있었으니 문명태후(文明太后) 풍(馮, 466~490년)과 영태후(靈太后) 호(胡, 516~528년)의 청정(聽政; 정치하는 일을 직접 듣고 처리함)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례 없던 여왕이 된 선덕여왕은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보수적인 반진골(反眞骨)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 위상에 도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필요가 있어 진골 출신 승려로 신라 불교계를 주도하던 자장(慈藏, 590~658년) 율사가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장안 동북쪽의 오대산(五台山)에 머물러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백제 미륵사 겨냥한 황룡사 9층목탑

자장은 오대산 북대(北台)에 모셔진 문수보살의 소조상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꿈속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보통사람이 알 수 없는 사실을 미리 가르쳐 주는 것)를 받고 그 증표로 석가세존이 입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붉은 비단에 금점을 수놓은 가사) 한 벌과 석가세존의 정수리뼈와 치아 및 사리 백과(顆)등을 받아 가지고 온다. 마정수기의 내용은 선덕여왕이 찰제리종(刹帝利種), 즉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특수혈통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여왕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이다.

자장은 이렇게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신라국왕이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고, 종남산 원향(圓香)선사로부터는 황룡사(黃龍寺)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온다.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공표하자 나라에서는 황룡사에 높이 225척(약 56.25m거나 68m)의 9층 목탑을 건립한다. 따라서 선덕여왕 14년(645) 3월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공을 본 (제11회 도판 5)은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며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임을 상징하는 조영물(造營物)이었다.

이로써 신라 사람들은 자신이 미륵불국토에 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미륵사에서 미륵불국토를 확신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신라가 이 탑의 건립을 서둘렀던 것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과 때를 맞추어 짓기 시작함으로써 이 황룡사 구층탑이 완성되고 나면 고구려가 멸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듯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1년 만에 탑을 완공해냈다.

그런데 당 태종은 이 해(645) 2월에 수십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여 5월에 요하를 건넌 다음 6월에 가서야 요동성(遼東城) 하나를 떨어뜨리고 곧바로 안시성(安市城)을 들이친다. 그러나 60일 동안 집중 공격해도 안시성이 끄떡 없자 9월에 들어 참패를 인정하고 회군해 돌아간다. 다음해 3월에야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이 불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윤 3월에는 요동성 점령 포기를 선포한다.

이에 신라에서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의 의미가 무색하게 되어 미륵불국토 건설을 표방하던 선덕여왕 측근 혁신 진골 세력들은 반진골 보수세력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그래서 황룡사 구층탑이 완공될 즈음인 선덕여왕 15년(646) 11월에는 저들을 회유하기 위해 반동세력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러나 비담은 오히려 그 다음 해인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그 무리를 이끌고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전례에 없는 여왕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으니 미륵불국토 건설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깨뜨리는 행위였다.

이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화랑 출신 진골 수호세력들은 감연히 일어나 이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들의 9족을 멸하여 그 씨를 말린다. 그러나 이미 68세쯤의 고령이던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충격으로 1월8일에 돌아간다.

이를 숨긴 채 반란을 진압한 진골 수호세력들은 신라가 계속 미륵보살이 다스리는 불국토임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해 다시 미륵보살의 화신인 원화(原花)를 여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3년 재위)이다.

미륵보살은 가고 미륵불 시대가 오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숙부인 국반(國飯, 석가모니불의 숙부 이름도 국반이다)의 따님으로 일찍이 선덕여왕과 함께 원화가 되었던 분이라고 생각된다. 풍만한 용모를 가진 미인으로 서면 손이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긴 팔을 가진 특이한 신체를 타고났다고 한다. 이 역시 불보살이 지니는 32대인상(大人相) 중의 한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니, 미륵보살이 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져 여왕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진지왕(眞智王, 576~579년 재위)의 장손자(長孫子)이자 진평왕(579~632년)의 외손자이며 선덕여왕의 이질(姨姪)이던 김춘추(金春秋, 603~661년)가 진덕여왕 2년(648) 윤12월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을 면대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미륵보살의 화신을 표방하는 정도로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으로 등장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생각은 벌써 자장율사가 당나라를 다녀와서 바로 가졌던 듯, 자장이 귀국한 다음해인 선덕여왕 13년(644)에 서남산 북쪽 봉우리인 삼화령(三花嶺) 위에 (제11회 도판 10)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은 주불을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좌상)으로 표현하여 하생 성불한 미륵불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미륵보살의 시대는 가고 미륵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표시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7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이 끝나자 용수(龍樹; 龍華樹의 생략어)의 아들인 김춘추가 하생성불한 미륵불의 자격으로 왕위에 등극한다. 처남인 김유신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를 뒷받침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흥왕 이래 전륜성왕을 표방하며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꿔오던 신라는 진흥왕의 증손자인 김춘추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꿈을 이루어 미륵여래가 다스리는 미륵불국토를 현실에 구현해 내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백제와 고구려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당태종과 당 고종의 정복 욕구를 부추겨 결국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재위기간(654~661년)에 백제를 멸망시킨다(660).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은 당군의 힘을 빌려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다(668).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 바로 삼국이 통일될 줄 알았던 신라는 당 고종의 영토확장 야욕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신라마저 당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한다.

미륵불국토의 이상을 구현하려던 신라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결국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벅찬 감격을 누려볼 겨를도 없이 당군(唐軍)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는 힘겨운 전쟁에 다시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문무왕 16년(676)에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겨가고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겨가게 되니 비로소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했던 대로 패수(貝水, 대동강) 이남의 땅이 신라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은 끝내 옛 고구려와 백제 땅의 신라 영유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신라로부터 탈취하려는 야욕을 부린다. 이런 형편이니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신라가 불국토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지내다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장자인 신문왕(神文王, 681~692년)이 등극하였으나 불과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하며 통일 전쟁의 영웅들을 제압하느라 정력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으니 역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꾸며 삼국 통일을 힘겹게 달성해 내던 초기 80여 년 세월은 신라가 미륵불국토라는 확신이나 자부심을 드러내 보일 겨를도 없이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차례로 극복해 나가는 중에 한반도 주변이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어 국제적인 평화가 자리를 잡아가자 신라는 통일된 국세를 바탕으로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났던 성덕왕(702~737년 재위)이 36년 동안 통일 신라 왕국을 다스리며 나라를 안정과 부강(富强)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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