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입디다 ”

  • 글·최영재 기자 사진·김용해 기자

    입력2005-05-04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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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관들은 정기적으로 자국공관에 타국외교관을 초청해서 파티를 여는데 한국외교관들은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초대할 때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수십 가지 음식을 차리는데, 상대국 공관에서는 기껏해야 샐러드, 스테이크, 감자 정도란다. 이렇게 간단히 먹고 와인 등을 나누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한국식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입디다 ”
    한국에서 제일가는 중남미통 이복형 전 멕시코 대사(69). 그는 현역 시절 28년을 중남미 국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은퇴한 뒤 그가 벌인 일은 문화 사업. 사재를 털어 1993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중남미 문화원을 열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이루어진 이 문화원에는 중남미 토기, 가면, 수공예품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외교관 가운데 미식가가 많다지만 그는 유달리 먹는 것에 집착이 강하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은퇴한 뒤 소망이 요리학원에서 샐러드 소스와 스파게티 소스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가지고 있는 중남미 요리책만도 수십 권이 넘는다. 요리에 대한 집착은 앞치마 수집으로 이어졌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독특한 앞치마를 반드시 사가지고 돌아온다.

    이복형 원장은 오랜 외교관 생활 탓인지 양식을 한식보다 좋아한다. 스파게티, 피자, 스테이크 등 서양 음식이면 무조건 좋다. 서양 음식에 대해서는 최고의 견해와 미각을 갖고 있다. 스테이크로 쓰는 쇠고기 맛을 구별하기 때문에, 한국의 어지간한 양식당에서 내놓는 스테이크로는 성이 차지 않아 애를 먹는다. 양고기, 염소고기, 말고기 등 각종 고기에 대한 감각도 탁월하다. 그는 속이 더부룩할 때 질좋은 버터나 잼을 갓 구운 빵에 듬뿍 바르고 커피나 뜨거운 우유를 곁들여 먹으면 얹힌 속이 확 풀린다고 한다. 김치에 된장국을 먹어야 속이 풀리는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식성이다.

    그가 가장 즐기는 요리는 스페인 요리 빠에야(paella)로 1972∼73년 주스페인 한국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부인이 현지에서 배운 요리다. 이 부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중남미 문화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빠에야 조리법과 음식문화를 강의하고, 실제로 빠에야를 대접하고 있다.

    이복형·홍갑표 부부가 문화원을 찾는 손님들에게 빠에야를 대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남미 문화원은 전문 식당이 아니기 때문에 수십 명이 넘는 손님들에게 가짓수가 많은 한식을 대접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빠에야는 마늘을 많이 넣은 쌀요리기 때문에 한국 사람 입맛에도 잘 맞는다.



    한국식으로 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냄비에서 쌀을 볶아서 익혀야 하기 때문에 쌀을 충분히 물에 불려야 한다. 2시간 정도는 불린 뒤 건져 놓는다.

    다음 재료는 해산물인 오징어와 홍합, 새우다. 우선 물오징어를 깨끗이 다듬어 5×1cm로 썰어 살짝 데쳐 놓는다. 오징어 삶은 물에 홍합을 삶고, 다시 그 국물에 새우를 삶는다. 이 국물은 따로 남겨둔 뒤 나중에 쌀을 볶을 때 사용한다. 그리고 양파와 마늘을 갈아 놓는다. 이러면 재료 준비가 대략 끝난다.

    이제 볶을 차례다. 빠에야 전용 구리냄비를 가열해서 식용유를 붓고, 갈아 놓은 양파와 마늘을 먼저 볶는다. 구리냄비가 없으면 다른 냄비를 써도 된다. 양파와 마늘이 어느 정도 익으면, 불린 쌀을 넣고 투명해질 때까지 볶는다. 빠에야는 흰쌀을 노르스름하게 물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색깔을 내는 방법은 해물을 삶은 국물에 사프란(saffraan)이나 치자, 식용색소를 풀고, 이 국물을 투명해진 쌀에 한 스푼씩 뿌리면 된다. 계속 쌀을 볶으면 노르스름한 국물을 빨아들이는데 이때 물기가 없어지면 홍합과 오징어를 같이 섞어 쿠킹 포일로 덮어 연한 불로 뜸을 들인다.

    요리를 하는 와중에 부인 홍갑표 씨는 빠에야의 특징과 대접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 음식은 재료가 간단하고 조리방법도 쉬워서, 아무나 만들 수 있다. 또 양만 많이 하면 수십 명이 먹을 수 있어서 ‘집들이’ 같은 여러 손님을 치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또 접대하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즐겁게 담소를 나누다가, 슬쩍 부엌으로 빠져나가 식은 빠에야를 센불로 가열하면 된다. 밑이 눌어붙을 것 같지만, 식은 기름이 밑으로 흘러내려 괴어 있기 때문에, 타지 않고 다시 지글지글 볶아진다. 가열하면서 쌀 위에 삶은 새우와 홍합을 얹고, 피망과 완두콩으로 예쁘게 장식한 다음 다시 포일로 덮어서 가장 약한 불로 줄인다. 김이 나면 주인은 손님에게 완성된 빠에야를 보여준단다. 이 때 “제가 정성들인 빠에야입니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덧붙이면 손님들은 군침을 흘린다는 것이다.

    완성된 빠에야를 들면서도 이복형·홍갑표 부부는 음식 문화 강의를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음식 접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가짓수를 줄이고 먹을 만큼만 만들어, 음식 쓰레기를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또 하나,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직접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고, 일상사에 바쁜 현대인이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려면 음식 종류를 줄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가장 자신 있는 몇 가지만 맛있게 차려내면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부는 해외 공관 근무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외교관들은 정기적으로 자국 공관에 타국 외교관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여는데 한국 외교관들은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초대할 때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수십 가지 음식을 차리는데, 상대국 공관에 초대를 받아 가면 기껏해야 샐러드, 스테이크, 감자 정도를 맛볼 수 있단다. 재료라고 해야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식집의 상차림과 일류 양식당의 코스 요리를 견주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같은 동양권인 중국이나 일본 공관에 초대받아도 가짓수가 적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원장 부부는 외교관들의 파티 문화와 음식 문화를 소개했다. 외교관들은 파티에 가면, 간단히 먹을 만큼만 먹고 커피, 차, 코냑, 브랜디, 시거를 나누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견주면 한국식은 차려진 음식을 계속 먹다가 다 먹으면, 자리를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다 허례허식이라는 말이다.

    중남미 문화원에서는 1994년께부터 음식 강의와 식사 대접을 시작했지만, 메뉴는 오직 빠에야뿐이다. 세계 각국의 외교관과 국빈이 방문해도 내놓는 음식은 오직 빠에야다.

    이원장 부부는 한국은 아직도 문화 빈곤국이라고 열을 올렸다. 비슷한 소득 수준의 나라와 견주더라도 문화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부부는 대표적인 사례로 음식문화를 들었다. 자신있게 외국인을 데려갈 수 있는 음식점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음식점은 천편일률적이다. 이웃나라 일본이나 동남아만 가더라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데 말이다.

    외국 음식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음식도 세계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우리 전통 음식을 제대로 지키고, 현대에 맞게 재창조하지 못한 탓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나 할까. 100여 년 전 옛날 책에 나오는 ‘효종갱, 열구자탕, 수정회, 너비아니, 석류탕, 석탄병’등 이름도 아름다운 우리 음식은 점점 잊혀가고 있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은 ‘뼈다귀해장국, 부대찌개, 쇠머리국밥, 통돼지구이’등 천한 이름의 음식들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대번에 느끼지만 같은 동양권인 일본 음식과 중국 음식은 이미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원장 부부는 중남미 문화원 같은 문화 사업을 하면서 음식 문화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느낀, 먹는 일의 중요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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