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용의 국물’에서 ‘JSA 공동정사구역’까지

  • 남기환

    입력2005-05-09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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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디오 가게에 가면 한쪽 구석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성인 에로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출시된 성인 비디오의 특징은 극장용 영화의 제목을 에로틱하게 패러디한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목을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질 수 있다. ‘텔미썸씽’과 똑같은 필체로 인쇄된 ‘털밑썸씽’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국내 성인용 비디오 영화. 흔히 ‘에로 영화’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16mm 성인 비디오는 B급 문화의 ‘첨병’으로 불린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16mm 필름으로 제작되는 에로 영화의 줄거리는 비슷하다. 스무살을 갓 넘어선 미모의 여배우들이 펼치는 ‘육탄공세’가 90% 이상이다.

    이 성인용 비디오들의 제목은 기발하다 못해 기상천외하다는 탄성이 나올 정도다. 일부 제목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로 등장하기도 한다.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의 경우 소비자들은 광고와 각종 매체의 영화 관련 기사를 통해 줄거리와 작품성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다. 최근엔 인터넷 영화동호회가 등장. 흥행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에로 비디오는 다르다.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비디오 대여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표지를 장식한 사진과 뒷면에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를 통해 작품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에로 비디오 제작자들은 제목을 정하기 위해 고심한다. 마치 신문 잡지의 편집자들이 눈에 띄는 제목을 뽑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는 것처럼 에로 비디오 제작자들도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다.



    에로 비디오 제작자들이 말하는 첫째 원칙은 우선 ‘튀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디오를 찾는 이의 눈에 금방 띄면 일단 ‘성공작’이다. 입소문을 탈 정도로 ‘쇼킹’한 제목이면 ‘대박’으로 볼 수 있다.

    16mm필름으로 촬영된 에로 비디오가 처음부터 극장가가 아닌 안방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무렵으로 볼 수 있다. 1982년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이 첫 테이프를 끊은 뒤 한국 영화는 성인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모두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러한 현상은 전두환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는 ‘3S(Sports, Sex, Screen)’라는 은밀한 지침 아래 소재가 에로물에만 한정돼 있었다. 요즘 이름있는 중견 배우나 탤런트 가운데 통과의례 격으로 에로 영화에 얼굴을 내비쳤던 이들도 적지 않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영화는 전환기를 맞았다. 올림픽을 계기로 저가의 VCR가 보급됐고 가정용 비디오 테이프도 급증했다. 또 극장용 35mm가 아닌 16mm 필름을 이용하는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선보이면서 저예산 비디오 영화들이 나타났다.

    남녀간의 정사장면과 여배우의 노출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소위 ‘에로 비디오 영화’라는 신종 장르가 탄생했다. 그 신호탄이 됐던 작품 중 하나가 ‘산머루’였다. 이 영화는 곽은경이라는 여배우를 등장시켜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뜨거운 장면을 선보였다.

    뒤이어 비디오 대여용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때만 해도 영화 제목은 극장용 영화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맞바람’, ‘땅꾼과 부인’ 등 당시의 비디오 영화들은 그다지 노골적이지 않다.



    ‘유호’와 ‘한 시네마타운’

    이 무렵의 에로 영화는 아직 극장용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일부 작품도 있었다. 이두용 감독의 ‘뽕’을 패러디한 ‘뽕 따러 가세’ 같은 작품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언뜻 보면 ‘뽕’으로 보이지만, 구석에 ‘따러가세’란 문구가 보일 듯 말 듯하게 들어 있었다.

    80년대의 분위기는 91년까지 이어진다. 검열의 칼날이 예리하던 시대여서 제목은 ‘은근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었다. ‘벽장 속의 유부녀’, ‘빨간 사냥꾼’, ‘덩쿨장미’, ‘야시장’, ‘금지된 정사’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 가운데 ‘야시장’은 속편과 몇 편의 연작을 내놓아 비디오 성인영화 최초의 시리즈물로 등록됐다.

    일부에서는 ‘덩쿨장미’가 마사 쿨리지 감독의 ‘넝쿨장미’를 패러디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사실과 다르다. ‘덩쿨장미’가 앞서 나왔기 때문이다.

    ‘유호프로덕션’과 ‘한 시네마타운’은 9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 영화가 대중화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호는 ‘야시장’, ‘빨간 선인장’, ‘위험한 여자’를 비롯해 ‘야생마’ 시리즈를 내놓았다. ‘야시장’ 시리즈는 그야말로 매춘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고, ‘금지된 정사’ 시리즈는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정사를 다뤘다.

    90년대 초반 ‘정사’라는 제목을 붙인 영화들이 한동안 비디오숍을 장식했다. 당시 성인용 비디오 영화를 즐기는 이들은 거의 청·중년층의 남성이었던 까닭에 유부녀의 외도를 다룬 ‘정사’류의 영화는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다. ‘금지된 정사’, ‘비밀 정사’, ‘B 타임의 정사’ 등이 이 흐름에 가세했던 영화들이다.

    줄거리를 암시하는 제목이 주류를 이루던 성인 비디오 시장에 일대 전환점이 찾아왔다. ‘젖소부인 바람났네’는 이 무렵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뒷날 에로영화의 대명사가 됐다. ‘한 시네마타운’이 95년 내놓은 이 영화는 ‘젖소’라는 컨셉트에 걸맞게 가슴이 큰 여배우 진도희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선보였다.

    ‘젖소 시리즈’로 최고의 에로 스타 자리에 올랐던 진도희. 그는 ‘젖소’ 이미지를 적극 부각시켜 눈길을 끌었다. 진도희는 한 주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제가 젖소잖아요. 그래서 우유 CF를 찍고 싶어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젖소부인’의 열기는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비디오숍에서 슬슬 눈치를 보며 빌려가던 사람들이 아예 드러내놓고 성인물을 찾게 된 것도 이때다.

    ‘젖소부인 바람났네’는 눈에 띄는 제목 탓에 그 자체가 유행어가 됐다. 그 뒤 한 시네마타운이 ‘부인’류의 제목을 단 영화를 줄줄이 내놓으면서 한국 에로 비디오 시장은 열기를 더해갔다.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한국 영화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더 이상 에로 영화는 무시해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마침내 에로 비디오가 그늘에서 벗어나 시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젖소부인’이 인기를 얻자 타 에로 비디오 제작사들도 앞다퉈 ‘부인’을 도용했다. 각종 사물에 ‘부인’만 넣으면 영화 제목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자라부인 뒤집어졌네’, ‘연필부인 흑심품었네’, ‘콤파스부인 다리 벌렸네’, ‘밧데리부인 충전됐네’, ‘만두부인 속터졌네’ 등 실소를 자아내는 ‘부인들’이 비디오 대여점의 ‘안방마님’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이 무렵 ‘젖소부인’에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젖소남편 바람났네’라는 ‘맞받아 치기’형 제목도 나왔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사실 ‘부인시리즈’가 심의에 걸리자 제작자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당시 한 시네마타운에서 에로 비디오를 제작하던 한지일씨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로 찾아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부인’ 영화 제목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형식이 ‘무슨 부인 무엇 했네’에 맞춰져 있다는 것. 대체로 부인 앞에 붙는 단어에 따라 뒤의 서술어가 결정됐다. 주어와 서술어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킬수록 인기가 치솟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때부터 서술형 제목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서술형을 따르면서 영화 제목이 길어졌고, 대화체가 그대로 옮겨졌다.

    ‘만득아 조개 받아라’, ‘고추밭에 뭔 일 있수?’, ‘당신의 부인은 오후 2시에 무엇을 할까요?’, ‘사모님 열 받았네’ 등이 대표적인 예들. ‘애들은 재웠수?’라는 제목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유행어의 반열에 올랐다.

    제목이 영화의 줄거리나 흐름에 관계없이 자극적인 단어만 나열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영화에 다양한 부인이 등장했지만, 제목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부인 시리즈 사이에서도 다른 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인 시리즈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물론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영화도 있었다. 나름대로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던 업체들이 내놓은 영화의 제목은 기존 흐름을 고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유호프로덕션이 시리즈물로 엮은 ‘성애의 여행’이 대표적이다. ‘성애의 여행’은 제목과 영화의 줄거리를 일치시킨 ‘튀는’ 작품이었다. 한 남자가 세계 각국을 돌면서 말 그대로 ‘성애의 여행’을 즐기는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하지만 유호프로덕션 역시 ‘어쭈구리’ 시리즈를 통해 한때 방향전환을 모색하기도 했다.

    패러디 전성시대

    서술형 대화체를 빌린 제목 열풍은 한 동안 이어졌다. 시장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나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면 98년까지 계속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젖소처녀 나타났네’, ‘딸라부인’, ‘쉬리 부인 쏘가리 만났네’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는 새로운 ‘작명’이 주류로 등장했다. 90년대 말엽부터 유행한 ‘제목 패러디’가 그것이다.

    패러디란 원래 ‘풍자적 개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원본을 적절히 베끼지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효과를 첨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7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산 에로 비디오 제목에 패러디 현상이 두드러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패러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이제 막 극장에서 개봉된 작품의 패러디 작품이 비디오숍에서 인기를 끄는 일도 있다.

    이런 가운데 누가 봐도 원전을 떠올릴 수 있는 ‘충격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97년 출시된 ‘빨간 보자기’란 영화가 그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성행위를 찍어 한동안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었던 ‘빨간 마후라’라는 포르노물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빨간 마후라’는 ‘O양의 비디오’와 함께 일반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대중의 손을 타기 시작한 시대에 등장해 전국적으로 복사 테이프가 나도는 소동을 빚은 포르노물이다.

    유명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할 경우 일단 비디오를 고르는 사람들을 친숙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단어 한두 개를 살짝 바꿔놓았지만, 이미 알려진 개봉관 영화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제작업체들은 연상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글씨체와 크기 등을 극장 포스터와 똑같이 했다. 그렇게 구성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효과는 역시 웃음이다. 원래 있어야 할 단어는 없고 엉뚱한 단어가 들어 있는 의외의 상황이 던져주는 당황스러움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원작을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원작의 파괴된 모습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용의 국물’이라는 기발한 제목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용의 눈물’을 생각한다. 이성계와 이방원이라는 거대한 ‘용’들이 흘렸던 눈물과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장면을 떠올린다. 동시에 드라마의 엄숙한 ‘눈물’ 자리에 ‘국물’이 있음을 확인한다. 대하 역사드라마가 아닌 16mm 에로 비디오라는 엉뚱한 것을 대입하면서 분위기는 일순간에 망가진다. 그 뒤에 웃음이 터지고 비디오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만약 제목의 야릇함에 감동(?)해 그 영화를 고른다면 제작사의 의도가 100% 적중한 셈이다.

    ‘어떻게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패러디 비디오 영화가 노리는 효과다. ‘정말 원전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데까지 궁금증이 뻗어가다 보면, 빌려보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으로 웃음을 줬다면 그 다음은 빌려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패러디의 초창기만 해도 제목은 나름대로 내용을 반영하는 데 충실했다. B급 영화의 메이저 업체들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제목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려 노력했다. ‘빨간 보자기’나 ‘용의 국물’을 보면 ‘왜 제목이 그렇게 정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뿐이었다. 에로 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영세한 군소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이때부터 성인 비디오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누가 먼저 대중의 시선을 뺏느냐는 싸움으로 치달았다. 제목 경쟁이 전보다 훨씬 뜨거워졌음은 당연한 결과다.

    더욱 노골적인 스틸 사진과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비디오 테이프의 케이스를 장식했다. 유명 영화 제목을 패러디하는 것은 기대 이상의 연상효과를 낳았고, 그것을 알아차린 제작사들은 아이디어 경쟁이라도 하듯 기상천외한 제목들을 앞다퉈 내놓았다.

    패러디에도 몇 가지 틀이 있다. 우선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유명 개봉관 상영작들의 제목을 그대로 빌려 오는 것이다.

    ‘털밑썸씽’, ‘JSA(Joint Sex Area) 공동정사구역’,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하리’, ‘여탕을 털어라’, ‘짜장면 배달부는 벨을 두 번 누른다’, ‘쇼킹 에로배우’, ‘주재소 습격사건’, ‘구멍가게 습격사건’, ‘첫 번째 구멍’, ‘박하사랑’, ‘모텔 성인장’, ‘처녀들의 야참’, ‘빨강 머리’, ‘박히면 죽는다’, ‘내게 욕을 해봐’, ‘반칙여왕’, ‘변태왕’, ‘미아리 정육점’, ‘먹거나 혹은 먹히거나’, ‘감각의 왕국’, ‘감각의 계곡’, ‘연어’, ‘인정사정 보지 마라’, ‘딸딸이 일병 구하기’, ‘접촉’ 등.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굳이 원전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만한 것들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는 비디오 영화의 신세를 한풀이하듯, 아니면 조롱이라도 하듯 걷잡을 수 없이 출시됐다.

    또 다른 형식이 유명 방송 프로그램을 본뜬 것이다.

    ‘FD 수첩’, ‘꼬꼬마 에로토비’, ‘변태보감’, ‘부부생활 동의보감’, ‘그것을 알려주마’, ‘왕초2’, ‘신혼여행 특공대’, ‘섹스파일’, ‘69쇼핑 신장개업’, ‘섹스 매거진 2782580’, ‘셀프 카메라’ 등.

    이 밖에도 유명 영화잡지에서 따온 ‘쎄네 21’, 만화 제목에서 빌려온 ‘광순 생각’까지 있었다.

    최근에는 사회상을 반영하거나 유행어, CF의 유명 카피를 이용한 제목들도 나왔다.

    ‘투명 팬티 로비사건’, ‘탈옥녀 신창순’, ‘벤처제비’, ‘날 물로 보지마’, ‘원조교제’, ‘선영아 사랑해’, ‘나는 18년이다’, ‘20세 찌찌엘’ 등 나름대로 사회를 비꼬거나 유행어를 등장시킨 제목들이 비디오 대여점 한 귀퉁이에 포진하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힌트를 얻은 ‘메딕 처녀 알몸 러쉬’도 있다. 게임에서 유일한 지구인으로 등장하는 안 테란 족. 그 가운데 메딕은 병사들을 치료하는 여자 위생병이라는 것이 힌트가 됐다. ‘러쉬’는 말 그대로 적진(혹은 남자들)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포르노물이 범람하면서 ‘그늘 속의 비디오’들이 대거 시장에 등장했다. ‘K양의 비디오’를 시작으로 몰래카메라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여대생 졸업 누드앨범’, ‘공중화장실’, ‘몰카 자유학원’, ‘여학생 기숙사’, ‘포르노 출장카메라’ 등이 그것이다. 이미 패러디의 고전이 된 ‘빨간 보자기’도 여기에 속한다.

    패러디 제목의 규칙은 단어의 변형이다. 하지만 그 바뀐 단어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노골적이다. 원본의 명성을 비집고 들어가 나름대로 영화의 ‘진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패러디 시대 이전의 제목들이 상상을 요구했다면, 패러디된 제목들은 즉흥적인 웃음과 자극을 준다. 상상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곧 다른 비디오물에 한눈 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패러디 제목들을 대할 때 많은 사람들은 ‘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영상물 등급위원회의 한 관계자는“패러디 제목이 문제가 돼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표절 시비가 붙고 저작권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것은 오로지 당사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표절로 인해 저작권이 침해됐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법이나 관계기관에 호소하지 않는 한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제목을 패러디한 작품의 경우 실제 영화에서 제목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비슷한 내용을 찍어둔 상태에서 출시 전 제목을 결정하는 관행이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작품을 창고에 쌓아두고 극장가의 동향을 살피다가 신작을 출시하는 얌체족도 있다. 개봉 직후의 영화를 패러디한 제목일수록 비디오를 고르는 소비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의 패러디 작품을 볼 경우 재미있는 제목이란 생각과 함께 ‘아니 벌써’라는 감탄까지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제목 패러디는 최근까지 상품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99년과 지난해 중반의 ‘황금시대’는 이미 사그라지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가?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재미있고 신기한 제목들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패러디의 연상효과가 급격히 시들고 있다.

    ‘하리’에서 ‘쉬리’의 액션과 드라마를, ‘변태보감’에서 ‘동의보감’의 감동을 연상하고 비디오를 고른 대중은 작품의 어이없음에 실망했다. 웃으면서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속을 리 만무한 까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패러디가 판치던 상황에서 나름대로 이 흐름을 거부한 에로 비디오 영화들과 그 제작사들이 최근 메이저급 프로덕션 자리에 올랐다. 현재 한국 에로 비디오물 시장은 ‘시네 프로’와 ‘클릭 엔터테인먼트’ 양대 산맥 체제로 개편된 상태다. ‘시네 프로’는 ‘학원’시리즈를 내놓은 장본인이다. 원조교제와 교복을 입은 어린 여성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느새 일본이 아닌 우리 것이 돼버렸다.

    이런 세태를 이용해 소녀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여배우들을 캐스팅한 ‘미소녀 자유학원’과 ‘유리의 XX’ 시리즈가 일약 ‘대박’을 터트렸다. 제목만 그럴싸한 패러디가 아니라 나름대로 시류에 대응한 작품으로 이뤄낸 쾌거(?)라 볼 수 있겠다.

    ‘클릭 엔터테인먼트’의 경우 패러디와 창작을 적절히 조화시킨 중도적 사례로 꼽힌다. ‘소빠때(소세지가 빠다를 만났을 때)’, ‘연어’ 등의 패러디 영화를 내놓았고, ‘바람꽃’, ‘이천년’, ‘미친 밤’ 등으로 업계 선두를 다투는 제작사로 급성장했다. 비록 지난해 12월 미성년자를 영화에 출연시켜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를 맞았지만, 이른바 ‘왕가위 식’ 카메라 기법과 고급스러운 조명의 신선함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무조건 베드신을 연결시키는 관행을 깨고 시나리오에 무게를 두는 제작방식이 ‘에로 비디오 마니아’의 호응을 얻었다. 다른 비디오 영화에 비해 베드신의 수가 절반도 안 됐지만, 이미 이런 특징은 ‘시네프로’와 ‘클릭 엔터테인먼트’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새로운 조류가 되었다. 최근 출시된 비디오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의 고급화는 이미 다른 제작사들도 조심스럽게 시도할 만큼 유행이 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에로 영화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여배우의 캐릭터가 바뀌고 있는 점이다. 과거엔 가슴이 큰 글래머와 몸매가 좋은 여성이 에로 배우의 전제 조건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얼굴이 중요하다. 몸매가 시원치 않아도 얼굴이 받쳐주는 배우는 B급 영화에서 뜰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실제로 몇몇 배우의 경우 팬클럽이 생겨났을 정도.

    시네프로의 간판 연출자 이강림 감독은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단기간의 흥행을 염두에 둔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고정 팬의 이탈을 가속화시킬 뿐이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는 에로 비디오 제작자들이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때 패러디 제목에 아이디어를 집중하던 메이저급 영화사인 유호가 일본 성인영화 배우들을 등장시킨 ‘일본’이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기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10년이 훨씬 넘은 한국 에로 비디오 시장. 한국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B급 문화 첨병의 길을 걸어오면서 우여곡절도 숱하게 겪었다. 하지만 무시 못할 시장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유치하고 식상하다는 비판 속에서 기발함으로 승부를 걸던 시대까지. 그 모든 흔적은 영화 제목들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목이 화려하고 기발할수록 별 볼 것이 없더라’는 기준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16mm 에로 비디오의 비중은 커지고 수요도 분명 증가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한때 20여 개로 난립했던 프로덕션들이 현재 6개 정도로 ‘자체 정리’됐다는 사실이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기발함은 잠시 신기한 것일 뿐, 그 이상을 끌어내지 못하면 도태되고 만다는 흥행업계의 속설을 증명한 것일까? 기발한 패러디 제목들은 이제 사람들의 입에서 간혹 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개가 되었을 뿐 뒤늦게 그 비디오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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