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 조용헌

    입력2005-05-09 15: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경을 초월해 명나라 때 대문장가인 주지번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있는 송영구 고택은 내룡(來龍), 안산(案山), 득수(得水) 3박자가 훌륭한 풍수 명당이자 고밀도 기에너지를 갖춘 ‘마당바위’로 눈길을 끈다.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한국에서 명문가라고 할 때 과연 그 자격 기준은 무엇인가? ‘신동아’에 명가 명택을 소개할 때마다 늘 이 부분은 필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명가 명택의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은 그 집 선조 또는 그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꼭 벼슬이 높았어야만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선미(眞善美)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서 ‘정승 3명보다 대제학 1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3명보다 처사 1명이 더 귀하다(三政丞 不如一大提學 三大提學 不如一處士)’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안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를 천착하다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견되게 마련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익산 왕궁의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 집안은 그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호남의 고도(古都)이자 호남대로(湖南大路)의 중심지인 전주의 어느 건물 현판에서 시작된다. 전주 시가지 한복판을 지나다 보면 ‘객사(客舍)’라고 불리는 고색창연한 기와 지붕 건물이 나그네 눈길을 끈다.

    객사는 그 지역을 방문한 외부의 귀빈이 머무르는 건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해당된다. 서민 여행객이야 주막집에서 국밥이나 먹으면서 머물렀지만, 고급관료나 귀빈은 시설이 훌륭한 객사에서 잔치를 즐기며 여장을 푸는 것이 조선시대의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시설과 규모에서 중국 사신이 주로 머물렀던 개성의 태평관(太平館)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객사로는 전주객사 외에 거제객사(1489년), 무장객사(1581년), 밀양객사(1652년), 부여객사(1704년), 선성현객사(1712년), 낙안객사(1722년), 완도객사(1722년) 등이 있다.

    전주객사(1471년 중건)는 조선시대에 건축된 객사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주 객사 정면에는 커다란 현판이 하나 걸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진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인데 가로 4.66m, 세로 1.79m의 크기다. 이 정도 크기의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붓 크기도 엄청났을 것 같다.

    전주객사에 걸려 있는 이 현판은 필자가 국내에서 본 현판 글씨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글씨인 듯 싶다. 이북에 있는 것으로는 평양 금수산에 있는 ‘을밀대(乙密臺)’ 현판 글씨가 아주 크다고 전해지는데, 전주의 ‘풍패지관’ 글씨보다는 약간 작다는 게 전주의 어른인 작촌 조병희 선생(91)의 말이다.

    현판에 얽힌 사연

    왜 한낱 지방 객사에 지나지 않은 곳에, ‘풍패지관’을 굳이 이처럼 크게 써야만 했을까. 풍패(豊沛)는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王都)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풍패지관은 이 근방 명필이 쓴 글씨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인 사신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조선을 방문한 중국의 공식 사신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다 이러한 현판을 남긴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왜 중국 사신은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사이즈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는가? 그가 이성계를 흠모해서 그랬던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왕궁면(王宮面) 장암리(場岩里)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아무튼 ‘풍패지관’이라는 현판글씨는 전북지역의 명문가인 표옹 송영구 집안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 현판글씨로 인해 표옹 송영구 집안이 호남의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결과적으로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뜨고 난 후에 손들면 소용없다. 뜨기 전 무명상태의 인물을 발탁하는 혜안이 바로 지인지감 아닌가!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에서 주지번 항목을 검색하여 보면,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라고 소개되는데, 한림원은 당대에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그는 또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주지번은 보통 관료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 알아주는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것이다.

    그런 주지번이 부사 양유년과 함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가 선조 39년인 1606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정사 주지번의 카운터파트로 대제학인 유근(柳根, 1549∼1627)을 내세웠다. 유근은 선조 20년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들어왔을 때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여 겐소 일행을 탄복케 한 당대의 문사이자, 풍모가 준수하고 언행에 절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유근이 바로 표옹의 고모부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점이다. 또 유근의 종사관으로는 허균(許均, 1569∼1618)이 발탁되었다. 조선에서도 일급 문사들을 내세워 주지번을 상대케 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측의 주지번-양유년 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복식조로 50대 후반의 유근과 30대 후반의 허균이 선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외교관의 만남이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한·중 문장가들이 재주를 겨루는 국가 대항 문장겨루기적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당대 중국과 조선에서 난다긴다하는 문장가인 주지번과 허균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시가 북경의 선비들에게 소개된 것도 주지번과 허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매료되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알린 것이다.

    한편 주지번이 전주 북쪽 50리 거리에 위치한 장암 마을에 있던 표옹을 찾아왔을 때, 표옹의 나이는 51세였다. 표옹은 46세 때 청풍군수를 지냈고, 52세 때에는 경상도 성주의 목사를 지냈다. 따라서 주지번이 방문한 시기는 청풍군수를 지낸 다음 성주목사로 나가기 바로 전해다. 북경의 영빈관에서 만났던 때부터 계산하면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시 주지번의 나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지번이 허균과 개인적으로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감안해볼 때 허균의 당시 나이(38세)와 비슷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이었지 않나 싶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3박자 풍수명당인 망모당

    편액의 좌측 밑에 ‘주지번서(朱之蕃書)’라고 선명하게 양각돼 있는 ‘망모당’은 글자 그대로 ‘멀리서 추모한다’는 뜻이다. 표옹의 집에서 바라다보면 전방 10리 거리에 표옹 부모의 묘소가 보이는데, 표옹은 부모를 기리기 위해 망모당이라는 글귀를 주지번에게 부탁한 것이다. 망모당이라는 편액은 자나깨나 부모를 생각하는 표옹의 효심을 상징하고 있다.

    장암에 있던 표옹 저택의 본채와 사랑채는 사라지고 없다. 망모당은 1607년에 표옹이 선친이 묻혀 있는 선영을 망모하기 위하여 지은 별채이자 공부방이다. 현재 이 망모당 건물만 남아 있는 상태다. 망모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망모당 터는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학업으로 치면 국·영·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명당이다. 대개 국어와 영어를 잘하면 수학이 시원찮고, 수학을 잘하면 영어를 못 하는 수가 있는데, 장암에 자리잡은 표옹 고택은 국·영·수 삼박자가 모두 탁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국어는 집터 뒤로 연결되는 내룡(來龍)을 말하고, 영어는 집 앞의 안산(案山)이고, 수학은 물(水)의 흐름이다.

    먼저 집 뒤의 내룡부터 살펴보자. 장암 일대의 산세는 산과 평야지대가 만나는 접점 지역이라는 점이 특징. 산이 달려오다가 드넓은 김제 만경의 호남평야 지대로 스며들어가는 형태인 것이다. 그 스며들어가는 접점에 표옹의 고택이 터를 잡고 있다. 산에서 들판으로 내려가는 도중이라 산세가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부드럽다는 측면에서는 충청도 산세보다 약간 덜하지만, 집터 부근에 전주에서 김제 만경에 이르는 널따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 것이 다른 지방과 다른 점이다.

    인문지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평야지대가 많다는 것은 교통이 좋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망모당은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망모당 전방 500m 앞에는 조선시대 파발마가 다니던 길인 호남대로(湖南大路)가 놓여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호남대로 가운데 전주를 거쳐 여산, 논산으로 가는 구간 중간 지점에 망모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이 길은 호남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망모당은 풍수적인 입지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통도 편리한 요지였음이 드러난다.

    영남의 400∼500년된 고택들은 대체로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는 반면, 충청과 호남의 고택들은 교통이 편리한 곳에 많이 자리잡고 있음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경북 영양의 조지훈 고택, 하회마을 양진당, 충재고택이 있는 안동 닭실마을, 가야산쪽의 한강 정구선생 고택 등은 첩첩 산중에 자리잡은 반면에 예산의 추사고택, 논산의 윤증고택, 망모당 등 기호지방의 고택들은 대체로 대로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조선중기 이후로 기호학파의 노론쪽이 거의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서울에 출장다닐 일이 많았다. 반대로 영남학파의 남인쪽은 정쟁에서 밀려나 외부와 두절된 산속에서 절치부심하며 공부만 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학풍 자체도 주기론(主氣論)쪽인 기호학파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면 주리론(主理論)쪽인 영남학파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기풍이 주택의 입지 선정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적인 지형을 놓고 보면 영남지방이 산이 많아 험준한 지형이 많고 기호지방이 산이 적어 평탄한 지형이 많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표옹고택의 내룡을 추적해 올라가면 소조산(小祖山)에 해당하는 산이 대추산(大楸山)이다. 그런데 이 대추산은 색다른 묘미가 있다. 높이는 해발 300m 정도의 평범한 산이지만, 풍수적으로는 천호산(天護山)쪽에서 내려오는 맥과, 용화산(龍華山) 쪽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맥이 합쳐진 산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추산의 근원인 천호산과 용화산이 함께 태조산(太祖山)이 되는 셈이다. 물도 양쪽에서 내려와 합수(合水)한 곳을 선호하듯이, 산 역시 양쪽에서 내려온 맥이 합쳐진 곳을 높이 평가한다.

    이처럼 양쪽의 맥이 합쳐서 내려온 곳은 한쪽이 고장나더라도 다른 한쪽이 받쳐줄 수 있으므로 그 수명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아울러 두 줄기가 합쳐졌으므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고도 본다. 아무튼 대추산처럼 소조산 자체가 두 줄기의 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곳은 매우 드물다.

    대추산까지는 제법 높이가 있는 기세로 이어져 오던 산세는 대추산부터 장암에 이르기까지 2km 정도는 아주 완만한 둔덕의 모습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산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판이랄 수도 없는 자그마한 동산의 형태로 맥이 들판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대추산 정상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장암을 향해 구불구불 천천히 내려가는 맥을 아스라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설렌다. 흘러가는 산의 맥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은 무정물(無情物)이 아니라 유정물(有情物)이다. 산이 숨쉬는 맥박이 들리고, 발밑에 흐르는 지기(地氣)가 몸의 경락을 통해서 상단전(上丹田, 이마 부위에 있는 인체의 중요 혈)으로 느껴질 때 인간은 산의 품에 마음놓고 안긴다. 이때부터 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나의 변치 않는 애인이 된다. 애인의 품에 안겨서 ‘마운틴 오르가슴(mountain orgasm)’에 몰입될 때 진정한 풍수인(風水人)이 된다.

    사실 산과 인간과의 교감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동양적 자연관의 핵심을 차지한다. 서양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동양인들의 유기체적인 교감을 이해하는 데 태생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여기에 동·서양 자연관의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무튼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기본적인 전제로 해서 성립된 사상체계가 풍수라고 한다면, 풍수는 동양적 자연관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망모당에 서서 보면 좌우의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겹겹이 싸고 있는 점이 발견된다. 특히 대추산에서 내려오는 청룡맥이 겹겹이 싸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겹, 세겹, 네겹, 다섯겹 정도나 둘러싸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 겹일수록 그 수에 비례해 좋다고 보는데, 이는 두터울수록 집터가 안전하게 보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내룡에 전혀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뾰쪽하고 날카롭게 솟은 바위가 없고 유순한 둔덕뿐이다. 이는 추사고택의 내룡과 같은 형태로서, 조선조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는 형국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감을 준다. 망모당의 전체 형국으로 보아서는 반월형에 가까운 것 같다.

    망모당의 좌향은 유좌(酉坐)라서 동향집이다. 집 앞을 흐르는 냇물도 방향이 좋다. 9시 방향에서 망모당쪽을 향해 흘러 들어오다가 오른쪽 백호날에서 획 감아 돌아 흘러간다. 터 앞의 흐르는 물은 나가는(out put) 방향의 물보다는, 들어오는(in put) 방향의 물을 상서롭게 평가한다.

    물은 수기(水氣)를 머금고 있는데, 이 수기가 있어야만 산에서 품어져 나오는 화기(火氣)와 배합된다. 지구상의 생명을 유지하는 양대 요소는 수와 화이고, 이 수화(水火)는 각기 따로 놀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서로 배합되어야 한다. 그 이상적인 배합의 형태를 ‘주역’에서는 ‘수화기제(水火旣濟)’라고 설명한다. 수가 위에 있고 화가 밑에 있는 형국이다. 그래야 안정된다. 머리는 시원하고 아랫배는 따뜻해야 몸이 건강해지는 이치와 같다. 이렇게 수화기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터를 향해서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흘러들어 올 때도 직선으로 곧바로 들어와서는 안되고 S자나 갈짓자 형태로 서서히 들어오는 것이 좋다. 망모당의 득수(得水)는 이와 같은 형국이다.



    ‘봉’자가 있는 산의 특징

    이번에는 망모당의 안산을 보자. 안산은 봉실산(鳳實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대개 봉(鳳) 자 지명이 들어가는 산은 여자 젖가슴처럼 둥그런 모습에다가 산 정상은 젖꼭지처럼 뾰쪽하게 튀어나온 형태가 많다. 봉황의 머리 모습을 여기에 비유한다. 망모당 앞쪽으로는 봉동(鳳東), 비봉(飛鳳), 수봉(首鳳) 등 봉 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서 산세가 아름답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필봉(筆峯)으로 보이는 산들이 많다. 망모당에서 바라보는 봉실산의 모습 역시 전형적인 필봉에 해당한다. 필봉이라 할지라도 두툼한 필봉이다. 봉실산의 하부구조는 젖가슴처럼 둥그렇고, 상부구조는 붓처럼 뾰쪽한 모습이다. 아래가 두툼한 반면 위는 선명하게 붓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손잡이 부분에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홀쭉한 필봉보다 한단계 위로 친다. 홀쭉한 필봉은 예리하고 맑기는 하지만 뚝심이 약하다고 보는 반면, 봉실산과 같은 필봉은 둔탁한 뚝심과 예리함을 겸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망모당의 안산은 필봉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봉실산 오른쪽으로 산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그 형상이 필자의 눈에는 마체(馬體)로 보인다. 마체란 말 안장의 형상을 가리킨다. 말안장과 같이 중간이 약간 움푹 들어간 산을 마체라고 부른다. 말 안장은 벼슬아치나 귀인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말을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체의 안산은 벼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놓고 보면 망모당의 안산은 문필봉과 마체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이다. 지성과 권력의 융합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문필봉과 마체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은 10년 전 필자가 충북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를 답사하였을 때 목격하였던 안산을 연상시킨다.

    망모당의 안산과 우암 송시열 묘의 안산은 같은 유형이라서 필자의 흥미를 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까닭이 있는 것일까? 표옹 송영구가 죽은 후에 그 신도비의 비문 글자를 후배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썼는데,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양 어깨(雙肩)로 불릴 만큼 밀접한 관계였음을 감안해 보면, 망모당의 안산이 송시열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망모당의 안산을 비롯한 여러 풍수적인 조건은 모델 케이스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죽기 17년 전부터 이미 자신의 묘자리를 준비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우암 자신도 풍수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망모당 주변 산세에 대해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표옹은 동춘당이나 우암보다 한 세대 위 선배로서 정치적으로도 같은 라인에 속한다. 표옹은 진천송씨(鎭川宋氏)이지만 우암이나 동춘당은 은율송씨(恩津宋氏)로서 관향은 서로 다르다.

    망모당 터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바위다. 망모당의 우측 백호날에는 커다란 바위가 그 끝자락에 뭉쳐 있다. 그러니까 백호날의 마지막 부분이 널따란 바위로 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바위는 마당처럼 넓다고 해서 마당바위, 즉 장암(場岩)이라 불린다. 어림잡아 사람 수십 명이 넉넉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큰 바위다. 이 동네 지명이 장암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마당바위 때문이다.

    대추산에서 2km를 꾸불꾸불 내려온 맥이 최종적으로는 이 장암에서 그 기운을 마무리하였다. 바위는 기운이 강해서 보통 살기로 보지만, 이처럼 땅바닥에 깔린 평평한 바위는 살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운이 뭉쳐 있다고 해서 좋게 본다.

    한국의 산을 다니다가 평평하게 넓은 바위를 보면 대부분 그 바위에서 신선들이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왜냐 하면 평평한 바위는 기 에너지가 풍부해 거기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아니면 누워서 뒹굴방굴 놀더라도 자동적으로 암기(岩氣)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불규칙하게 파열된 듯한 날카로운 바위는 살기로 작용하지만, 평평한 마당바위는 고단백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것이 신선도(神仙道) 수행자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는 비밀이다.

    만약 마당바위 옆에 물까지 흐르면 금상첨화임은 물론이다. 등산하다가 혹시 마당바위 같은 것이 눈에 띄면 무조건 허리띠를 풀고 한두 시간 누워서 잠을 자거나 혹은 좌선을 하면 몸이 풀리면서 정신이 개운해질 것이다. 찜질방이 따로 없다. 만약 집안에 이런 바위가 있으면 따로 등산갈 필요가 없다. 매일 하루에 한시간씩만 바위에 누워 있으면 자동적으로 찜질이 되니까 말이다. 표옹 자신도 한가할 때는 집앞의 이 마당바위에서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으면서 소일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마당바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해보자. 필자는 지난해에 미국의 풍수를 조사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답사한 바 있다. 주된 관심사는 미국의 부자 동네에 있는 명택들이 과연 어떠한 풍수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LA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시카고에 있는 부자동네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이 뉴욕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알파인(Alpine)이라는 동네다. 맨해튼 5번가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알파인은 도심지인데도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주 조용하고 쾌적하였다. 부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집 주소도 없고 오로지 사서함으로만 우편물이 전달되는 특이한 동네였다. 보통 몇 백만 달러 하는 집들만 모여 있었는데 유명한 팝송가수인 머라이어 캐리의 1000만 달러짜리 집도 있었다.

    바로 이 동네의 풍수적 특징은 마당바위였다. 동네 전체가 널따란 바위산에 올라앉아 있는 형태였다. 바위가 땅 위로 돌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당과 집터를 삽으로 조금만 파보면 바닥이 전부 바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화조를 팔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가 알파인에서 사흘을 머문 재미동포 박종화씨(朴鍾和·46) 집은 알파인에서도 마당바위 집의 전형이었다. 집 앞과 집 뒤의 마당에 각각 널따란 바위가 돌출되어 있었는데, 마치 건물이 거북이의 등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앞의 바위는 거북이의 머리요, 뒤의 바위는 거북이의 꼬리에 해당되었다. 필자는 사흘 동안 이 집에서 자면서 누적된 미국여행의 피로를 풀고 생기를 되찾았다. ‘바위 발’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미국의 영지(靈地, 명당)는 대부분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도 얻었다.

    ‘북장암(北場岩) 남장대(南長臺)’. 전주 인근 최고 명당 두 군데를 일컫는 표현이다. 장암은 두말할 것 없이 표옹의 망모당 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장대(長臺)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가?

    장대는 ‘장천부사(長川浮莎)’의 줄임말이므로, 원뜻은 ‘큰 냇물에 떠내려가는 뗏목’형의 명당을 의미한다. 장천부사 자리는 현재 전주 평화동 일대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옛날부터 장천부사 자리를 잡으려고 수많은 풍수 마니아들이 몰려들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서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집터가 장천부사 자리라고 믿었다.

    내가 근무하는 원광대학교의 어느 교수 한 분도 자신의 집터를 장천부사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조부대에 명당이라 믿고 많은 돈을 들여 현재의 집터로 이사왔다는 것이다. 어느 곳이 정확한 장천부사 자리였는지 필자는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평화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훼손돼버리고 말았다. 장천부사는 아파트 개발로 인해서 영영 떠내려간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려 할 때 이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장천부사 명당을 믿는 풍수 마니아들과 그 후손들이었다는 사실을 환경운동가들은 유심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풍수와 환경운동은 통하는 면이 있다는 말이다.

    하여튼 ‘북장암 남장대’라는 표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이 일찍이 이 지역을 둘러보고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겸암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성룡(柳成龍)의 친형으로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養眞堂)의 주인이었던 인물이다.

    경상도 하회에 살던 사람이 멀리 전라도 전주까지 답사를 와서 이런 말을 남긴 것을 보면 흥미롭다. 이를 보면 겸암은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도학과 풍수에 깊은 식견을 지녔던 인물로 추정된다. 외형적으로는 유가의 선비이면서도 내면에서는 도가적 취향을 지녔던 것 같다.

    일제 때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전국의 풍수도참서를 수집하여 만든 ‘조선비결전서(朝鮮秘訣全書)’라는 조그마한 책자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겸암결록(謙菴訣錄)이라는 항목도 있다. 즉 겸암이 남긴 예언서가 일제시대까지 내려오면서 전국에 유통될 정도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겸암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주지번이 잡은 음택 명당

    다시 표옹과 주지번의 일로 돌아가보면, 주지번은 직접 산세를 파악해 표옹의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조선 사람들의 사생관에 의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속의 뼈에 남는다고 보았다. 이른바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도 원래 이런 이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뼈가 묻히는 묘자리는 백이 남아서 거주하는 집이므로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의 관을 다시 꺼내 ‘부관참시’하는 형벌은 사후세계의 삶까지 망가뜨리는 대단히 가혹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음택자리를 잡아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무에게나 쉽게 부탁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주지번은 표옹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정성껏 자리를 잡았고, 이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보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지번이 잡은 묘자리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아마 그는 풍수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필자가 표옹 집안을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사실은 이 묘자리로 인해서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필자의 풍수 스승은 진천송씨 집안의 ‘주지번 소점(朱之蕃 所占, 주지번이 잡은 자리)’이 유명하니 반드시 볼 필요가 있다고 적극 권하셨다. 스승에 의하면 명사소점(明師所占, 명 풍수가 잡은 자리)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의 스승도 자신의 그 윗대 스승으로부터 주지번 소점을 전해 듣고 알았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예부터 주지번 소점은 전북 일대에서 풍수깨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회자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주지번 소점은 좌향이 특이하다. 내려오는 맥으로부터 약 30도 정도 틀어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법식은 고려 초기의 묘인 경북 안동의 권태사(權太師, 왕건을 가르킨 三太師 중의 한 명) 묘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아무튼 특이한 법식임은 분명하다.

    주지번 소점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조선시대 풍수에 능통한 명사(明師)들이 다른 사람의 묘자리를 잡아줄 때 어떤 윤리적 기준이 있는가 하고 스승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부탁만 하면 무조건 잡아주는 것인가? 풍수가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묘자리를 부탁하러 온 사람의 사주와 관상을 본다. 사주와 관상은 그 사람을 겪어보기 전에 미리 그 인물됨을 파악해본다는 뜻이다. 일단 이게 좋지 않으면 거절한다.

    둘째, 그 사람에 대한 주변 평판을 들어본다. 평소 주변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았는지 아니면 인색하게 살았는지를 조사한다. 주변 사람의 평판이 나쁘면 거절한다.

    셋째, 묘자리를 부탁하러 온 사람의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조사한다. 조상이 양심적이고 후덕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남의 가슴에 못을 많이 박고 산 사람이었는지를 참작한다.

    넷째, 그 집의 선산에 있는 묘들을 조사한다. 선산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본다. 선산에 있는 선대의 묘들이 A급 터에 있는가, 아니면 B급 C급 터에 있는지. 선산에 있는 선대묘의 등급에 비례해서 그 후손들이 배출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선산의 묘가 C급인 사람이 부탁하면 그보다 약간 높은 급수의 터를 잡아줄 수는 있지만, 두 계단 혹은 세 계단을 껑충 높여서 잡아주지는 않는다. 즉 C 마이너스급 선산을 가진 후손에게는 C 플러스급을 잡아주거나 또는 B 마이너스급을 잡아주는 식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A급은 절대 잡아주지 않는다. 사기꾼에게 정승나올 자리를 잡아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특별한 경우란 그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일과 같은 아주 큰 선행을 하였을 경우다.

    다섯째, 명당을 잡기 위해서는 지관과 의뢰인이 몇 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산을 보러 다닌다. 명당이 당장 구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을 가지고 이곳 저곳 산을 보러 다녀야 한다. 이를 구산(求山)하러 다닌다고 표현한다. 이 여행 과정에서 지관은 의뢰인의 인간성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평소 자장면을 사는가 설렁탕을 사는지 아니면 한정식을 사는가 살펴본다. 지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고 짜게 논다 싶으면 그에 맞는 자리를 잡아준다.

    예를 들어 의뢰인과 지관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 집의 차남은 지관에게 막걸리도 대접하고 먹을 것도 주면서 이것저것 친절을 베푸는 반면 장남은 소 닭보듯이 냉담하게 지관을 대하였다면, 장남에게는 불리하지만 차남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게끔 지관이 슬며시 묘의 좌향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 명사는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남의 집 묘를 잡아주었다. 무조건 잡아준 것이 결코 아니라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윤리적 기준 없이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아무렇게나 명당을 남발하는 지관은 본인 스스로가 하늘의 견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끊어지는 과보를 받는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주지번이 소점해준 표옹은 평소에 어떻게 살았을까. 생전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를 보자. 표옹은 52세 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관찰사 임기 동안에 아주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관찰사를 그만두고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어느 나루터에 닿았을 때의 일이다. 이때가 여름 무렵이었는데 경상감사를 배웅하기 위해 나루터까지 동행한 이방이 “어르신네가 경상도에 계셨다가 가지고 가시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부채 하나밖에는 없군요”하고 한마디 하니까, 표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낙동강에 던져버렸다. 부채마저 강물에 던졌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낙동강에 붙인 이름이 ‘투선강(投扇江)’이다. 그리고 그 부채를 던진 나루터를 ‘투선진(投扇津)’이라고 하였다고 송씨 문중에 전해진다.

    투선강과 투선진. 이는 이후 진천 송씨들의 정신이 되었다. 강직과 청렴의 상징으로서 표옹의 후손들이 조상에 대하여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표옹의 정신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자존심을 팔면서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 아쉬운 소리 하지 말자,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공직에 있는 집안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청탁하지 말자로 은연중에 이어지고 있다는 게 표옹의 13대손 송억규씨(宋億圭·전 전북공무원교육원장)의 말이다. 명문가의 후손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점이 발견되는데, 진천 송씨(鎭宋)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의 전통에 대한 자존심이 후손들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같다.

    표옹의 정신은 그의 손자로 공조판서를 지낸 송창(宋昌)의 유언에서도 나타난다. 송창은 유언에서 3가지를 하지 말라고 남겼다. 물만장(勿挽章, 만장을 쓰지 말라), 물청명(勿請銘, 비문을 써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라), 물입비(勿立碑,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다. 삼물(三勿)에서도 역시 진송들의 자존심이 읽혀진다.

    필자가 인터뷰해본 진송사람들 가운데 표옹의 12대 손인 송병순(宋炳循·72)씨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재무부관세국장,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지금은 대만과의 합작회사인 ‘CDIB·MBS 벤처캐피탈’의 회장으로 있다. 그는 화금체(火金體)의 관상에, 사주도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주처럼 지지에 인신사해(寅申巳亥)가 있었다. 이런 유형은 일생 동안 바쁘고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무장(武將)의 명조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12월에 출간된 그의 회고록 제목도 ‘나의 삶. 불꽃 70년’이었다.

    그는 회고록 첫머리에 표옹 선조의 ‘투선진(投扇津)’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자신이 45년 공직생활 동안 어려울 때마다 뇌리를 떠난 적이 없는 신조였다는 것이다. 그는 60년대 부산세관 충무출장소장으로 근무할 때 고질이었던 해상밀수를 뿌리뽑기 위하여 직접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일본에서 들어오는 밀수선 영덕호를 해상에서 격침시킨 바 있다. 물론 박대통령의 사전허가를 받은 후였다. 이 사건 이후로 밀수선이 근절되었다고 한다.

    80년대 초반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서울 창성동의 20평도 되지 않는 허름한 고가(古家)에서 생활을 했는데, 이때 프로판 가스가 터져 집이 불타고 부인은 중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부인의 치료비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은행융자를 신청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이 소식을 접한 문중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보태고 사돈집에서 얼마를 도와주어 아파트로 이사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은행대출 과정에서 은행직원들이 창성동 집을 보고 나서 모두 놀랐음은 물론이다. 한국의 은행감독원장이라는 사람이 여윳돈이 없어서 가계대출을 받는다는 것도 놀랄 일이고, 저런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것이다.

    송회장은 현재 70대인데도 대만과의 합작회사 회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송회장과 대만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필자의 흥미를 자극하였다. 1969년 아시아 4개국 관세협력 회의 때 당시 대만의 관세국 부국장으로 참석했던 유태영씨(劉泰英·65)를 알게 됐는데, 만나자마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유태영씨가 한국이 IMF 위기를 만나자 거액을 송회장에게 선뜻 투자하여 현재의 회사를 한국에 세우게 하였고 자기에게 회장을 맡겼다고 한다. 송회장과 유태영씨의 국적을 초월한 특이한 인연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세인과설(三世因果說)이 생각났다.

    전생의 선연이든 악연이든 금생에 다시 만나고 금생의 인연은 내생에 다시 만난다는데, 혹시 전생에 표옹이 중국에 가서 도움을 받았던 주지번이 환생해서 이번에는 반대로 표옹의 후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생의 선연이 다시 만나 금생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꽃피우는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진천 송씨의 유명한 떡 ‘백자편’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는 진천 송씨의 선산이 있다. 선산에는 아주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이렇게 잘 자란 소나무밭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소나무들은 약 400년 전에 심은 유서깊은 나무들로 진송들의 전통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진송에 시집온 며느리로부터 연유된다. 표옹의 며느리 가운데는 남원의 삭녕 최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있었다. 남원의 삭녕 최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송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崔尙重)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라고 하였다. 변산은 예로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던 질좋은 소나무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인터체인지 일대의 보기좋은 육송들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 소나무씨를 뿌려서 성장한 나무들이다.

    이 며느리(할머니)가 진송 집안에 수립한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 ‘백자(百子)편’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모습의 떡이다. 사람 발뒤꿈치 모양의 흰떡 수십개를 부채살처럼 둥그렇게 모아놓은 다음, 그 위에다 다시 계속해서 둥그렇게 얹어놓는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6∼7층을 겹쳐서 쌓아놓는다. 행사가 끝나면 이 떡을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한다. 백명의 자손이라는 백자의 뜻과 같이 송씨 문중의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의미하는 떡이다. 지금도 문중 시제 때는 만들어서 모두 먹는다.

    매년 음력으로 7월16일. 백중 다음날에 망모당에서는 소쇄일(掃灑日)이라는 행사가 있다. 집안 전체가 모여서 청소도 하고 같이 식사도 하는 날이다. 이날에는 백일장도 열렸는데, 옛날에는 비단 송씨뿐만 아닌 인근의 선비들도 참여해서 시와 문장을 짓고 음식을 먹으면서 같이 즐겼다고 한다. 이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여산에서 삼례에 이르는 일대가 흰옷 입은 선비들로 가득했다고 하며, 시회(詩會)가 끝나면 저녁에 칠월 백중의 둥그런 달을 보고 모두 귀가하는 풍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표옹이 망모당을 지을 때 인근 50리 내의 관아에서 기념으로 기둥과 서까래 등을 기부한 데에 대한 보답의 행사였다고도 한다. 주지번이 쓴 망모당의 현판을 바라보면서 인간사의 인연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과 자존심을 지키는 청렴이 갖는 무형적 힘을 생각해 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