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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5|익산의 표옹 송영구 고택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 조용헌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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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경을 초월해 명나라 때 대문장가인 주지번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있는 송영구 고택은 내룡(來龍), 안산(案山), 득수(得水) 3박자가 훌륭한 풍수 명당이자 고밀도 기에너지를 갖춘 ‘마당바위’로 눈길을 끈다.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한국에서 명문가라고 할 때 과연 그 자격 기준은 무엇인가? ‘신동아’에 명가 명택을 소개할 때마다 늘 이 부분은 필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명가 명택의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은 그 집 선조 또는 그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꼭 벼슬이 높았어야만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선미(眞善美)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서 ‘정승 3명보다 대제학 1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3명보다 처사 1명이 더 귀하다(三政丞 不如一大提學 三大提學 不如一處士)’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안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를 천착하다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견되게 마련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익산 왕궁의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 집안은 그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호남의 고도(古都)이자 호남대로(湖南大路)의 중심지인 전주의 어느 건물 현판에서 시작된다. 전주 시가지 한복판을 지나다 보면 ‘객사(客舍)’라고 불리는 고색창연한 기와 지붕 건물이 나그네 눈길을 끈다.

객사는 그 지역을 방문한 외부의 귀빈이 머무르는 건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해당된다. 서민 여행객이야 주막집에서 국밥이나 먹으면서 머물렀지만, 고급관료나 귀빈은 시설이 훌륭한 객사에서 잔치를 즐기며 여장을 푸는 것이 조선시대의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시설과 규모에서 중국 사신이 주로 머물렀던 개성의 태평관(太平館)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객사로는 전주객사 외에 거제객사(1489년), 무장객사(1581년), 밀양객사(1652년), 부여객사(1704년), 선성현객사(1712년), 낙안객사(1722년), 완도객사(1722년) 등이 있다.

전주객사(1471년 중건)는 조선시대에 건축된 객사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주 객사 정면에는 커다란 현판이 하나 걸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진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인데 가로 4.66m, 세로 1.79m의 크기다. 이 정도 크기의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붓 크기도 엄청났을 것 같다.

전주객사에 걸려 있는 이 현판은 필자가 국내에서 본 현판 글씨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글씨인 듯 싶다. 이북에 있는 것으로는 평양 금수산에 있는 ‘을밀대(乙密臺)’ 현판 글씨가 아주 크다고 전해지는데, 전주의 ‘풍패지관’ 글씨보다는 약간 작다는 게 전주의 어른인 작촌 조병희 선생(91)의 말이다.

현판에 얽힌 사연

왜 한낱 지방 객사에 지나지 않은 곳에, ‘풍패지관’을 굳이 이처럼 크게 써야만 했을까. 풍패(豊沛)는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王都)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풍패지관은 이 근방 명필이 쓴 글씨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인 사신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조선을 방문한 중국의 공식 사신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다 이러한 현판을 남긴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왜 중국 사신은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사이즈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는가? 그가 이성계를 흠모해서 그랬던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왕궁면(王宮面) 장암리(場岩里)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아무튼 ‘풍패지관’이라는 현판글씨는 전북지역의 명문가인 표옹 송영구 집안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 현판글씨로 인해 표옹 송영구 집안이 호남의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결과적으로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뜨고 난 후에 손들면 소용없다. 뜨기 전 무명상태의 인물을 발탁하는 혜안이 바로 지인지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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