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국의 명가 명택 6|안동김씨 내앞(川前) 종택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 조용헌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2/5
셋째, 인심을 보자. 오늘날까지도 인심은 매우 민감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중환은 평안도, 경상도만 빼놓고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인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고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인심이 사납거나 멍청하거나 간사한 지역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경상도 지역을 더욱 좁혀보면 안동 일대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중환은 경상도와는 대조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교활함을 좋아하고 나쁜 일에 쉽게 부화뇌동한다(專尙狡險 易動以非)’고 혹평하고 있다. 경상도를 진실하다고 본 것에 비하면 전라도에 대한 평가는 감정 섞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안동 인심의 정반대 쪽에 전라도 인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왜 이중환은 이처럼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을까? 이중환은 팔도 가운데 평안도와 전라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가본 적이 없는데도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보학(譜學)의 대가인 송준호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고 있다. 송교수에 따르면 이중환의 친외가는 바로 전라도 무장(茂長)이었다. 서울에서 살던 이중환의 부친 이진휴(李震休, 1657∼1710년)가 전라도 무장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상위(吳相胃, 1634∼1687년)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1987).

그런데 이중환이 자신의 외가동네이자 어머니 고향인 전라도에 대해서 이러한 평가를 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의외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이중환이 60평생을 살면서 외가인 전라도에 한 번도 다녀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풍습으로는 결혼을 해서 처가가 있는 지역(聘鄕)으로 옮겨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중기까지 딸들도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친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 일정 시기는 외가에서 지내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이중환은 평생 외가에 발을 붙인 적이 없다. 철저한 단절이 있었다. 이 점이 이상하다!

이중환이 경상도 인심을 높게 평가한 반면, 자신의 외가동네인 전라도 인심을 낮게 평가하게 된 이면에는 임진왜란 바로 전 해에 발생한,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라 불리는 정여립(鄭汝立) 사건(己丑獄事, 1591년)을 읽어내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사 책임자였던 송강 정철의 반대쪽 라인에 서 있던 전라도 선비 약 1000명이 쿠데타 혐의를 받고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 주로 동인(東人)이자 나중에 남인(南人)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피해자였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 집안도 남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오씨들은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당했다고 여겨지는 ‘호남오신(湖南五臣; 鄭介淸, 柳夢井, 曺大中, 李潑, 李)’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정철의 노론측(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남인의 선봉대 집안이었다. 함양오씨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과, 송강 정철을 추종하는 노론측은 기축옥사 이후로도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는 공방전을 벌였다.

이걸 보면 경상도 남인보다 전라도 남인들이 훨씬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상도는 노론이 드물고 거의 퇴계 문하의 남인 일색이라 같은 색깔 아래에서 동지적 결속이 가능한 분위기였지만, 전라도는 노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라도 남인들은 아웃사이더로서 많은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전라도 남인들은 영남의 남인들을 부러워했다.

이중환의 외가인 함양오씨들이 참혹한 불행을 겪은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戊申亂)’이다. 이 사건에 함양오씨, 나주나씨(羅州羅氏)를 비롯한 전라도 남인들이 상당수 관여했다는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오씨 집안은 사약을 받거나 장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때가 이중환의 나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던만큼 그 사건의 전말과 전개 과정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쟁의 와중에 외가가 이처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중환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철저한 환멸 그 자체 아니었을까! 아마 전라도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당쟁의 피해를 산출할 때 그 폭과 깊이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심했던 곳은 영남보다 호남지역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이중환은 외가이기는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인 전라도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그러한 내면세계가 반영된 평가가 ‘택리지’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송교수의 견해다. 반대로 권력에서 소외되었을지언정 남인들끼리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경상도 안동 쪽의 풍경은, 당시 뜻을 펴지 못하고 방황하던 남인 신분의 이중환에게는 살 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았겠는가. 인간은 결코 자기가 살던 당대의 역사적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넷째는 산수를 보자. 동양화는 대부분 산수화다. 다른 주제는 별로 없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이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생각한 것은 아름다운 산수에서 노니는 것이었고,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것은 대자연과의 합일이었다. 산과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광달락(曠達樂)을 누리는 것, 우리 삶에서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층층의 기암절벽 사이로 냇물이 많이 흐르는 안동 일대는 이러한 산수를 즐기기에는 최적지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다른 곳에도 기암절벽과 냇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곳은 조령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반면에 다른 쪽은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오지라서 조선시대 내내 서해안, 남해안, 그리고 동해안 남쪽에 이르기까지 시도때도 없이 출몰했던 왜구들의 침입에도 안전지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전란이 적어서 많은 학자와 시인 그리고 도교의 방사(方士)들이 선호했던 중국의 오지 사천성(四川省)처럼, 한국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안동, 봉화 일대는 가장 병화(兵禍)가 적은 무릉도원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냇물가에서 살아가기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제시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계거(溪居)’다. 계거란 냇가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 옆에서 사는 해거(海居)보다는 강 옆에서 사는 강거(江居)가 낫고, 강거보다는 냇가에서 사는 계거를 더 높게 쳤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계거를 이상적인 입지조건으로 인식하였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은 바로 그러한 계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내앞’(川前)이란 이름도 반변천(半邊川)이라는 냇물 앞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 집안의 중시조인 청계(靑溪) 김진의 호에 ‘계(溪)’자가 들어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내앞과 인근지역인 도산(陶山)에 살면서 청계와 거의 동년배였던 퇴계(退溪) 이황도 그 호에 역시 계자가 들어가 있다.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에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명문거족의 집들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내앞 종택은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일월산(日月山, 1219m)의 지맥(支脈)이 동남방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면서 자리를 만든 곳이다. 반변천은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모래밭을 형성하였다.

이름하여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 아래에서 귀한 사람이 입는 옷(紗)을 세탁하는(浣) 형국이란 뜻이다. 여기서 완사는 반변천의 맑은 모래밭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모래밭과 밝은 달,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라고 하였던가.

내앞 종택은 봄이나 여름보다는 가을밤에 둥그런 달이 떴을 때 부서지는 월광 속에서 바라보아야 완사명월의 아름다움을 알 것 같다. 종택 옆의 경포대(鏡浦臺)나 다추월(多秋月)이라는 지명은 가을달의 아름다움을 입증하고 있다. 강릉 경포대보다 가을 달이 더 많이 비친다고 해서 다추월이라고 이름을 붙였단다.

내앞 종택의 풍수지리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이 집터를 자세히 보면 집 뒤 반달 모양의 입수맥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통상 입수맥의 가운데 센터에 집을 앉히는 것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집 앞에 있던 조그만 연못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은 메워져서 밭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원래 이 연못은 풍수적으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치였다. 이 연못은 집터의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주는 기능도 하고, 밖의 외기와 안의 내기가 서로 교류하면서 집터의 기운을 순환시켜 주는 작용도 한다.

풍수에서는 터의 바로 앞에 위치한 연못이나 샘, 또는 방죽을 혈구(穴口)라고 부른다. 혈구란 혈자리의 입구이자 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혈구가 있어야 집터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음기와 양기가 서로 들락거리면서 집터 안에 생기를 유지한다.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집터가 코 끝에 자리잡는다고 하면, 혈구는 입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터와 혈구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야 법식에 맞다. 즉 얼굴의 코와 입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집터와 혈구가 대각선이 되거나 또는 각도가 어긋나서 비뚜름하게 있으면 그 집터는 풍수의 법식에 맞지 않다고 간주한다. 바꾸어 말하면 애시당초 터를 잡을 때 혈구와 일직선상에 맞추어서 터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앞 종택을 보면 집터를 잡을 때 이 연못과 집의 대문이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방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혈구의 방향에 직선으로 일치하는 곳에 집터를 잡다 보니까 입수맥의 좌측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혈구와 일치하지 않은 집터일 경우는 그 효과가 반감된다고 본다. 또 명당에는 반드시 혈구가 코앞에 있고, 혈구가 없다면 그 터는 A급 명당은 못 된다. 터는 좋은데 혈구가 없어서 인위적으로라도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사례도 많은데, 묘터나 집터 앞에 인공적으로 방죽을 조성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내앞 종택의 터는 대문 앞쪽으로 30m쯤 떨어져 있던 이 혈구(연못)가 명물이라서, 풍수가에서는 ‘의성김씨 종택에 가거들랑 혈구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몇 년 전에 필자가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와서 혈구를 확인하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답사에서 안내를 해준 김종선(金鍾善)씨는 옛날에는 이 연못에서 낚시질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60년대 중반 흙으로 메워 밭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현재 도로 옆에 보이는 밭이 그것인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지금이라도 연못을 원상복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수서에 기록된 바로는 양택 앞에 연못으로 된 혈구가 있으면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의 명당이라고 일컫는다. 1원(元)은 60년이므로 180년 동안 패하지 않고 오래가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2/5
조용헌
목록 닫기

人傑地靈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댓글 창 닫기

2019/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