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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7|충남 아산 외암(巍巖)마을 예안이씨 종가

‘3년 시묘’ 실천한 孝心의 모범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3년 시묘’ 실천한 孝心의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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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시묘하는 동안 적막한 공간에 혼자 있다 보니 새들과 친해지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소리를 내면 새들이 자기 친구인 줄 알고 초막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3년 시묘’ 실천한 孝心의 모범
명산에는 법이 높은 고승이 살고 있듯이, 명택에는 학행을 닦은 선비가 한 명쯤은 자리를 지키고 있기 마련이다. 충청도 아산 예안이씨 문정공파 종가에 선비가 한 분 살고 있다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구경 중에는 사람 구경이 최고’라는 말이 있듯이, 명택에 살고 있는 명인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세상 사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배우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울 때 그 즐거움은 더욱 증폭된다.

천안에서 온양온천까지 가서 다시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외암리 민속마을이 나온다. 새마을운동 이전의 한국 시골 풍경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외암마을이다. 모두 65가구 중 50여 가구가 초가다.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만 보고 살다가 누런 지붕을 인 초가들을 바라보니 삶의 긴장이 풀린다. 오밀조밀하게 열려 있는 돌담길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이끼 낀 돌담에 스며 있는 냄새를 맡아보니 세월을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나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예안이씨 종가는 마을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있다. 이 동네에서는 참판댁이라고 일컬어진다. 하마석(下馬石) 앞에다 차를 세우고 선비 집안의 품격을 갖춘 솟을대문을 지나니, ‘성인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의 ‘희성당(希聖堂)’ 편액이 걸려 있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 앞에서 집주인이자 예안이씨 종손인 이득선씨(李得善, 61)가 반갑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필자가 이 집을 찾아온 까닭은 이 사람의 ‘시묘살이 3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이득선씨가 체득한 내공(內功)이 바로 ‘3년시묘(三年侍墓)’. 일생 동안 한학자로 살던 부친(李用聖, 1903∼1970)이 돌아가시자 묘 옆에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년 동안 생활하며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염을 간직했던 것이다.

현대에 살면서도 동시에 200∼300년 전의 ‘중세적 삶’을 경험한 인물이라고나 할까. 유교의 관혼상제 가운데 가장 고난도 의례가 3년시묘라는 장례절차일 것이다. 여기에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이득선씨다. 아마도 남북한을 통틀어 근래에 3년시묘를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은 이득선씨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필자가 본 이득선씨의 첫인상은 예상과 달랐다. 눈빛이 형형하고 깡마른 체구의 대쪽 같은 풍모를 예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올해가 회갑인데도 얼굴 하나 상한 데가 없다. 원래 미남으로 태어난데다가 자기 관리에도 충실했다는 증거다. 분위기가 거칠거나 경직되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맑게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눈빛도 날카롭거나 탁하지 않고 그윽하다. 한국사람으로 이만한 연배라면 온갖 풍상을 다 겪었을 터인만큼 이 정도로 정제된 얼굴과 담백한 기운을 갖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듯이 일단 얼굴과 풍채가 좋으면 호감이 간다.

부자 2대의 3년 시묘살이

―3년시묘는 언제 하신 겁니까?

“제 나이 서른 살이던 1970년 겨울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시작하여 서른두 살 겨울까지 했죠.”

―3년시묘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의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학까지 졸업한 현대인으로서 굳이 하게 된 이유랄까 동기가 있는지요?

“몇 년 전에 주한 프랑스대사가 저희집에 와서 물은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첫째는 부모님이 나를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품안에서 기르는 기간이 대략 3년입니다. 유교의례에서 말하는 3년시묘의 3년이라는 기간은 부모가 자식을 품안에서 기르던 3년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3년시묘하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부님(李貞烈, 고종때 이조참판을 지냄)이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역시 3년시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당연히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는 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한양대 토목공학과)을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종손이지만 하숙비를 아끼기 위해서 어느 여관의 변소 바로 옆에 붙은 허름한 방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화장실 냄새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밤에는 추워서 마스크 쓰고, 장갑끼고, 코트까지 입고 자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한때는 아르바이트로 외과병원 청소부도 해보았습니다.

종가의 재산을 지키려면 그런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그런 내핍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제 학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아야만 했을 겁니다. 광복 이후 토지개혁으로 인해 천석 남짓하던 저희 전답이 거의 해체된 처지여서 살고 있는 집 외에는 별로 남은 재산이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충청도 인근의 몇몇 종가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집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종가가 사라지고 말았죠.

하루는 아버지가 저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와서 자취방에서 주무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내심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저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 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가 외암 집에 돌아가셔서 일주일 동안 마루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자식이 고생하는데 내가 어찌 편하게 잘 수 있느냐 하는 심정에서였겠죠. 저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자지간의 정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는 선비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자긍심이었죠. 저희 집안이 이 지역에서는 소문난 선비집안인데, 그 집의 종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저희 집안의 선비정신이 이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죠. 선친께서는 순종황후인 윤비(尹妃)께서 1966년에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총괄하는 장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저희 집안은 기호학파의 명맥을 잇는 집안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3년시묘는 양반 중에도 일급양반의 반열에 속하는 계층에서 행하던 상례(喪禮)였다. 유교사회의 중심가치는 효이기 때문에 조선조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 양반일수록 그 신분에 비례해 효를 중시했다. 3년시묘는 그러한 가치관의 산물로 상류층만의 풍습이었다. 지도층이 아닌 하층 양반은 굳이 3년시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3년시묘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이자 징표였기 때문에 후에 가서는 이 행위 자체가 신분 상승의 기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걸 행함으로써 그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양반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의례가 사라지고 극소수의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집안에서만 명맥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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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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