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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요리사의 세계

요리 배우는 남자들

“30대, 화이트칼라, 취업보다 취미”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요리 배우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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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리=집안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대신 요리=취미생활, 요리=행복, 요리=일상이라고 외치는 남자가 많아졌다. 심지어 요리=예술이라며 장보기를 즐기는 남자도 나타났다.
퇴근 무렵, 책을 사려는 직장인들로 붐비기 시작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각종 취미서적과 실용서적을 판매하는 코너에 다다르자 넓은 진열대를 가득 채운 요리 관련 책들이 눈에 띄었다. 30~40대로 보이는 남성 세 명이 책 고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40세 전후로 보이는 직장인이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수첩을 들고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슬쩍 보자 ‘채소 손질하는 법. ①뿌리를 짧게 자르고…’ 꼼꼼하게 써 내려간 글씨가 빼곡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별로 경계하는 기색 없이 그가 대꾸했다. “봄철이라 채소 요리가 좋을 것 같아서요.” 컴퓨터 관련 엔지니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승구씨(남·39)는 가족들을 위해 매주 토요일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한다고 했다. 넉 달 정도 지나자 그 동안 갖고 있던 ‘밑천’이 다 떨어졌다고 말하는 이씨.

“직장에서 하는 일의 성격이 워낙 딱딱하다 보니까 생활 전반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해서 요리에 취미를 붙였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니까 아내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대화를 마치고 그는 “기왕 온 김에 요리 책이나 몇 권 사야겠다”며 다시 진열대로 눈길을 돌렸다. 30세 가량의 또 다른 남성은 ‘101가지 국수 이야기’라고 쓰인 책을 한동안 훑어보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꼼꼼하고 차분한 남자가 요리 배운다

실용서적 코너를 맡고 있는 이경화 씨는 “퇴근 무렵이면 요리 책을 고르는 남자 서너 명은 항상 볼 수 있다. 대개 남자손님은 책 구경보다 직접 구입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다. 컬러화보가 많은 요리 책이 일반서적에 비해 값이 좀 비싸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메모해 가는 남성도 종종 있다. 1,2년 전부터 의외로 중년남성 고객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20대 젊은 층이 아니면 남자들이 요리 책 코너를 찾아오거나 사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각,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강동종합사회복지관 조리 실습실에서 두 명의 남성이 여자들 틈에 끼어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조리대 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선생님, 프라이팬이 없습니다.” 또 다른 남성은 같은 조 여성 수강생에게 썰다 만 홍당무를 보여주며 “이거 너무 굵은 것 아닌가요? 서툴러서 가늘게 잘 안 되네요”라며 미안해했다. 프라이팬을 찾던 남성은 어느새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불꽃을 조절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한식 조리반 수업을 담당한 최숙희 강사는 “이 반에서 수업받고 있는 남성 수강생은 세 명이다. 여성 수강생에 비해 능숙하지 않지만 투박한 손길로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다. 웬만해선 수업도 빠지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경험한 걸로 보아 요리를 배우는 남성 수강생들은 대부분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다”고 귀띔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리반 수강인원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10배 가량 많지만, 자격증 취득여부 비율로 따지면 남성 합격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남성은 요리에 관심이 없는 한 일부러 강습을 받으러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성실히 배운다.”

홍당무 썰기를 하던 김재혁씨(남·28)는 “맛있는 것 만들어 먹으려고 퇴근 후 술자리도 포기하고 요리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원래부터 요리가 취미였다는 김씨는 “기왕 먹는 거라면 맛있는 걸 먹자”주의다. 강습시간에 배운 요리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만들어서 먹어볼 생각인 김씨.

“오이나 홍당무를 모양내 써는 것도 어렵지만 요리에서 진짜 어려운 부분은 양념으로 간을 맞추는 기술인 것 같다.”

감자 껍질을 벗기며 곁눈질로 ‘완자탕’과 ‘칠절판’ 요리 책을 열심히 훔쳐보던 남성은 자신을 고등학교 영어교사라고 소개했다.

“아이들 특기적성교육에서 실습모작을 담당하게 됐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쳐볼까 하는 마음으로 한식 조리반에 등록했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 하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기왕이면 기능사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과목을 가르치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겠다 싶었다. 기능사자격증이 있으면 대학갈 때 특기생으로 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전혀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표면이 매끈하지 않아 오이 깎기가 몹시 어렵다”며 어설프게 칼질했다.

복지관 이동섭 팀장에 따르면 한식을 비롯해 제과·제빵, 양식 등 요리강습을 신청하는 남성이 20대 후반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거의가 직장인인 이들은 취미 삼아 요리를 배우는 외에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니까’ 하는 생각으로 조리사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이다.

“취미 삼아 요리를 배우러 오는 남성들은 30만원씩 하는 학원 수강료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사회복지관의 경우 월 수강료가 보통 3만~4만원 수준이다. 분기별로 1년에 4번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요리강습을 신청하는 남자들이 꾸준히 있다. 한 반에 최소 서너 명의 남성이 꼭 있다. 이들은 제과·제빵이나 한식조리반을 선호하는데 아마 대부분이 요리를 처음 배우는 터라 평소 잘 접해보지 않은 일식, 양식 요리는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몇 년 전 중견 탤런트 이정섭이 ‘요리 잘하는 남자 이정섭의 맛있는 우리 음식’이라는 제목으로 요리 책을 펴내 화제가 됐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그를 ‘특별한 남자’로 여겼다. ‘남자 탤런트’라는 점과 ‘자라는 동안 부엌 근처는 얼씬도 못했을 나이의 한국 남자’라는 것. 책 출간과 동시에 쏟아진 그의 인터뷰를 보고 이번에는 사람들이 무척 놀랐다.

“저 원래 요리하는 것 좋아해요. 음식 솜씨 정말 좋아요.”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하며 ‘정말 특별한 남자’로 치부했다. 그가 이미 10년 넘게 식품회사를 운영해온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두번 째 요리 책을 펴낸 그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남자가 아니다. 요즘 요리 잘하는 남자, 요리 책을 펴내는 남자가 흔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수 이현우도 ‘싱글’을 위한 요리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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