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단성사! 기생들의 무대에서 서편제 신화까지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8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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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영화 역사와 나란히 걸어온 단성사(團成社)가 오는 가을이면 수많은 중년 ‘할리우드키드’들의 추억과 향수를 뒤로 한 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2003년 새롭게 태어날 단성사를 위해 100년 가까운 세월을 꿋꿋이 지켜온 터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랑’ ‘겨울여자’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이 거쳐간 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단성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수천 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줄잡아 1억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들였다. 한때 ‘스펙터클’의 위용을 자랑하며 최고의 개봉관으로 인기를 누리던 단성사도 ‘최첨단 멀티플렉스’ 바람에 떠밀려 설자리를 잃은 것이다. 35년간 단성사에 몸담아온 조상림(66) 상무를 만나 단성사 극장에 얽힌 추억담과 지나간 영화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07년, 연예인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고 수익금을 사회사업에 쓸 목적으로 ‘연예 단성사’가 설립됐다. 당시 연예인으로 불리던 사람은 다름아닌 기생들. 열살 미만의 ‘동기’로 권번에 들어가 화류계 생활을 거친 기생은 ‘기생 환갑’이라는 20세가 넘으면 ‘노기’로 취급돼 설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다동, 광교 등 지역 이름을 딴 기생조합이나, 첩실이지만 남편이 죽었거나 없는 무부기조합, 남편이 있는 유부기조합에 가입해 화류계가 아닌 공연단으로 활동했다.

    단성사는 이들의 활동 공간인 공연장으로 처음 출발했다. 당시 유명 연예 공연장은 단성사 외에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등이 있었다. 극장측은 공연날짜를 잡은 뒤 기생조합의 조합장을 통해 배우를 모았다.

    기생들의 공연장에서 출발

    기생들은 공연 때 창극이나 승무, 단가, 가야금 연주 등 자신만의 특기를 선보여 관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910년대 단성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인기를 끈 기생으로 박리화와 채희 등이 있다. 박리화가 서울 장안 최고의 승무 춤꾼이었다면, 채희는 단가의 명창으로 손꼽혔다. ‘명화’라는 기생은 오늘날 개그맨의 ‘원조’라 할 만하다. 노래 잘하고 양금 잘하고 남의 흉내내기 선수로 통하던 그는 능청맞은 흉내내기로 객석의 감탄과 웃음을 자아냈다. 유성기 녹음을 위해 일본 도쿄로 출장길에 오른 기생도 있었다.

    연예 기생이 화류계에 진출한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어 10대 과부로 기생이 되거나 가난한 집안의 부모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는 경우가 보편적 사례. 개중에는 평범한 양민 출신이지만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 혹은 남편이 아편에 빠지는 등 가정파탄으로 이혼녀가 돼 화류계에 뛰어든 여성도 있다.



    공연을 앞둔 기생조합은 극장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조합 명의의 신문광고를 게재했다. ‘매일신보’ 1915년 6월 18일자 광고란에 “음력 단옷날 밤부터 열흘 예정으로 다동조합 기생일동이 단성사에서 각종 특이한 가무로 출연하옵는바, 전일보다 실로 재미있고 볼만한 것이 많이 있사오니 다수 왕림하심을 앙망하옵나이다. 다동기생조합 일동”이라는 글귀가 실렸다.

    당시 인기 높은 기생은 언론으로부터 요즘 스타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매일 한 명씩 신문에 소개됐다. 뿐만 아니라 요즘처럼 최고 인기 연예인 뽑기 투표도 이때부터 성행했다. 이즈음 극장 관객을 상대로 ‘최고 인기 스타’를 물은 결과 한성권번 출신의 김봉선이 1위에 올랐다.

    단성사는 연예 공연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린 야학이나 고아원, 조산원(산파) 양성소에 기부금을 기탁하고 폭풍우 피해 서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에 앞장섰다.

    반대로 세계적인 러시아곡마단을 불러들여 공연하기 위해 단성사가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공연경비 3000환 중 300환을 후원한 사람은 종로 화평당 약방 주인이었다.

    변사들의 전성시대

    1918년,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면서 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의 대표적 극장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곳이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이다. ‘최고 극장’을 둘러싼 신경전은 우연히 술자리에 합석하게 된 세 극장주의 ‘내기시합’으로 시작됐다. “좋다, 그럼 어느 극장이 최고인지 길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자.” 농담 반 진담 반 나온 얘기가 길거리 투표로 이어졌고, 결과는 단성사 2211표, 조선극장 742표, 우미관 669표로 승자가 갈렸다. 1등을 차지한 단성사는 자축행사로 추첨을 통해 투표 참가자에게 경품을 주었다. 당첨자는 등수에 따라 1개월에서 6개월치에 해당하는 활동사진 무료관람권을 받았다.

    신축과 함께 본격 상설영화관으로 거듭 태어난 단성사는 극장 최초로 일류 변사 6명을 고용하고, 극장전속 관현악단을 기용했다. 일제 치하에서 해체 기로에 선 조선왕실 군악대 70여 명 전원을 흡수한 것. 관현악단석은 영화홍보를 위해 극장 전면 발코니에 배치됐다. 지금도 당시 발코니가 건물 입구 간판 뒤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악단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 그 소리가 서대문까지 퍼져나가 극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변사주임은 당대를 주름잡던 서상호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유창한 말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무대 위에서 스크린 장단에 맞춰 혼자 대화를 주고받으며 해설까지 곁들이는 변사의 인기는 무성영화 전성시대인 20~3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국내 무성영화뿐만 아니라 ‘바그다드의 도적’ ‘벤허’를 비롯한 해외 무성영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이라 채플린은 누구, 발렌티노는 누구 하는 식으로 외국 배우 전담변사까지 생겨났다. 관객들이 극장 앞 간판에 써붙인 변사 이름을 확인하고 입장 여부를 결정할 정도여서 변사 인기도는 흥행성공의 열쇠가 됐다.

    한편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파극이 국내 활동사진에 영향을 주면서 무성영화 변사 특유의 말투가 생겼다. 감격조, 비탄조, 강조조 등 이른바 ‘신파조’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다.

    영화계에서 신파조 말투는 무성영화가 사라지고 유성영화가 대중화된 60년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배우 신성일이 즐겨 쓰던, 힘이 들어간 말투나 억양이 과장된 말투 등이 신파조의 잔재였다. 70년대 초 깨끗이 자취를 감췄던 신파조가 복고바람을 타고 21세기 서울에 다시 등장했다. 추억의 악극단 공연을 표방하며 최근 무대에 오른 ‘불효자는 웁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무성영화 시대 신파조 향수를 자극하며 수많은 중년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밴드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를 돋우고 배우들 목소리를 대신하던 변사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으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편 단성사를 인수한 박승필 사장은 예전 광무대에서 데리고 있던 직원을 일본에 파견해 촬영술을 배워오게 했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 이필우였다. 그가 돌아올 때 촬영기재를 들여와 단성사는 한국 최초의 활동사진 ‘의리적 구토’를 제작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총독부가 유일하게 촬영기재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영화제작사나 극장에서 영화를 제작하려면 단성사에서 촬영기재를 빌려 써야 했다.

    30환을 들여 단성사에서 제작, 상영한 ‘의리적 구토’는 완전한 무성 극영화 이전의 연쇄극 형태를 띤다. 기차와 서울역, 한강 다리 등 극장 무대에 올릴 수 없는 실사를 직접 촬영해 영화로 보여주는 한편, 무대에서 연극이 동시에 진행되는 형식을 취했다. ‘의리적 구토’가 첫 상영된 1919년 10월27일을 기념해 오늘날 ‘영화의 날’로 제정한다.

    본격 활동사진이 경쟁적으로 제작되면서 예전에 30전, 50전 하던 영화제작비가 200환, 1000환으로 껑충 뛰었다. 영화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부 제작사나 극장들은 흥행을 노린 애정물을 앞다투어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 활동영화는 일본 신파극을 모방하거나 그대로 옮겨온 번안물이 대부분이어서 자극적인 내용, 통속적인 내용 등이 ‘풍기문란’의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도덕관에 비춰 풍기문란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윤리관은 지금까지 뿌리가 남아 ‘외설시비’로 이어지고 있다.

    단성사에 ‘부인전용석’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풍기문란 혐의에 떠밀린 결과였다. 단성사 건물이 처음 올라갈 때 기생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저게 뭐 하는 곳이냐?”며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수군댔다. 개관 후 공연이 시작되자 “남녀가 깜깜한 데 모여서 뭐 하는 짓들이냐” “상스러운 짓거리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극장 개축 때 2층을 새로 지어 여자만 들어갈 수 있는 부인전용석을 만들었다.

    연예 공연단에 속한 기생들이 극장 무대에서 춤을 추면 환등기를 이용해 조명효과를 살렸는데 붉은색 푸른색 빛이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자 “장내 분위기를 문란하게 한다”해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다동기생조합의 ‘춘향전’ 공연을 보고 나온 매일신보 기자는 1917년 10월17일자 기사에서 풍기문란 죄(?)를 맹렬히 성토했다.

    “극장 문 안에 들어서니 좁은 장내에 관객은 가득 차 만원이 되고, 담배 연기는 자욱하여 숨이 막힐 듯하다. (중략) 미숙한 기술을 개량치 못하고 무대 위에서 질서 없는 행동과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노래를 하니 그 더러운 노래를 듣고 여염집 부녀자는 놀라 퇴장을 하겠고 사나이도 얼굴을 붉히고 귀를 막겠다. (중략)”

    무성영화 시대 충무로통은 일본인이 소유한 극장이 많아 일본말 영화가 종종 상영됐다. 그 영향으로 흥행을 노린 일본인 극장주는 본국에서 유행하는 ‘교갱(광언)’을 재빨리 들여왔다. 가부키 공연 막간을 이용해 우스갯소리로 관객을 웃기는 1인극 교갱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다. 총 18개 레퍼토리로 짜인 교갱이 국내 일본인 극장에 들어와 인기를 끌자 단성사도 막간을 이용해 교갱을 선보였다. 그런데 레퍼토리 중 욕설이 빌미가 되어 “풍속을 교란한다”는 경고를 받자 공연자료까지 모두 없앴다.

    1923년 영화제작부를 설립한 단성사는 동시에 서너 편의 무성영화를 찍는 등 영화제작에 열을 올렸다. 당시 수입되는 외화 프로그램은 영화가 매우 길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 제작한 무성영화가 풍부한 단성사는 매주 1개 프로그램을 상영하던 타 극장과 달리 2개 프로그램을 동시에 상영했다. 또 특등석과 일반석을 구분해 특등석 50전, 1등석 30전, 2등석 20전, 3등석 10전으로 관람료를 차별화했다. 당시 설탕값이 10전인 것에 비해 영화관람료는 비싼 편이어서 일반서민이 부담없이 구경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부유층이 온갖 연줄과 ‘백’을 동원해 공짜로 입장한 뒤 특등석표를 가진 사람을 내쫓고 대신 특등석을 차지하는 바람에 관객의 원성을 샀다.

    특등석은 물론이고 당시 단성사 극장은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 있어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했다. 입구에서 신발주머니와 방석을 받아 정해진 구역으로 가 앉는 식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정해진 1등석, 2등석 구역은 무의미해진다. 서로 화롯가를 차지하려고 밀고당기는 싸움을 벌였다. 극장마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자리다툼으로 겨울이면 화재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최초의 공연장인 원각사와 광무대가 불탔고,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조선극장은 화재로 36년 문을 닫았다.

    단성사도 자리다툼과 난로 과열로 인해 두 번이나 화재를 치렀다. 그 가운데 1915년 새벽 세 시에 발생한 화재는 신축한 지 불과 일년 밖에 안 된 건물을 뼈대만 앙상하게 남기고 전소시켰다. 워낙 큰불이라 여러 지역 소방서에서 한꺼번에 출동한 불자동차 소리가 온 시내를 깨웠고, 극장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던 배우 네 명은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불은 2층 ‘엽방’에서 발생했다. 요즘 휴게실 같은 엽방은 차를 팔던 곳으로 종업원이 퇴근하면서 깜박 잊고 화롯불을 끄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과열된 난로 열기가 바닥 다다미에 불로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던 것이다.

    72년에는 단성사 바로 옆건물 2층에 위치한 다방에서 인질극 소동이 빚어진 가운데 불이 나 인근 건물 등 19개 점포를 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단성사 터는 기가 센 곳”

    일제강점기 때 영화상영 도중 발생한 만세사건은 총독부로부터 극장폐쇄와 함께 ‘10일 휴관’ 조치를 받게 했다. 서울 전역의 소요를 촉발한 만세사건은 3·1운동이 발발한 지 불과 20일 뒤에 일어났다. 밤 11시경, 막간 휴식을 이용해 무대에 뛰어오른 학생이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를 부르자 일시에 관객의 합창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사건은 이튿날 동대문, 아현, 마포, 녹번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종로통을 지나던 전차에 돌멩이 세례가 쏟아져 유리창이 깨졌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소요에 참가한 100여 명이 종로경찰서와 용산헌병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다. 불과 일 년 뒤 단성사는 또다시 만세 사건에 휩싸여 며칠간 강제휴관 조치됐다.

    극장마다 경쟁적으로 외화상영에 열을 올리던 20년대 초반, 단성사는 황금관과 ‘쌍방고소’까지 간 외화 쟁탈전에 휩싸였다.

    미국 유나이티드아티스가 제작한 ‘나이아가라 대폭포’를 배경으로 넣은 대모험극 영화 ‘동쪽길’이 수입배급사의 혼선으로 황금관과 단성사 두 곳에 나란히 걸리는 상황이 빚어진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단성사가 승리해 첫 개봉하던 날 극장 아래위층은 ‘송곳 꽂을 틈도 없이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70년대 말 단성사 뒷골목을 순찰하던 방범대원이 피살되는 등 단성사와 그 주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자 극장 사람들 입에선 “단성사 터가 세서 그렇다”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조선시대 말 경성(서울)은 한성 5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단성사는 그중 중부에 속했다. 단성사 터는 옛 중부의금부 자리였다.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조직이 당시는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포도청이 양민과 서민의 죄를 묻던 곳이라면, 의금부는 죄지은 양반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하던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단성사 바로 옆에 위치한 종로소방서 앞에는 ‘최시형 순교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단성사 건물을 세우기 불과 10년 전,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끌려와 무참히 처형당했던 것이다.

    전쟁 직후부터 60년대까지 서울 시내 극장 주변은 두 가지 이유로 관객과 상이군인이 진을 쳤다. 관객이 몰린 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극장쇼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만담가, 코미디언, 가수, 배우가 출연하는 극장쇼는 지금의 10대 스타팬 못지않은 열성팬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시절 이름을 날린 사람들 중 ‘뚱뚱이와 홀쭉이’ 콤비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양석천·양훈, 김희갑, 송해 등이 있다.

    극장 안이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 되면 다른 사람 어깨 위에 걸터앉아 구경하는 관객도 있었다. 영화배우 최무룡이 미성으로 ‘꿈은 사라지고~’를 뽑으면 아가씨 아줌마들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가 지방공연에 나서면 “여공들이 극장으로 몰려가는 통에 가발공장 문닫아야 할 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만큼 인기가 높았다.

    극장쇼가 끝나면 주인을 잃고 극장 앞에 내동댕이쳐진 고무신만 한 트럭이 나왔다. 미처 신발을 챙기지 못하고 인파에 떠밀려 극장을 나선 사람들이 다음날이면 고무신을 찾느라 극장 앞은 또다시 북새통이 됐다.

    어려운 집에선 고무신 한 켤레 사 신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라 군데군데 실로 꿰맨 고무신일망정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6·25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불구가 된 ‘상이군인’이 마땅한 일거리를 찾을 수 없자 ‘사람’과 ‘돈’을 따라 극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극장마다 이들의 행패로 몸살을 앓았지만 단성사는 상이군인조합 사람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소동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극장쇼의 쇠퇴와 함께 상이군인들의 행패도 조용히 사라졌다. 70년대 초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극장식 맥주홀이 생겨나면서 맥주홀과 텔레비전에 연예인을 빼앗긴 극장쇼는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앞세운 외국영화가 흑백영화인 국산영화를 밀어내고 있었다. 덩달아 극장쇼 관객의 주류를 이루던 아줌마, 아저씨도 남녀 젊은층이 눈치를 보며 극장에서 빠져나갔다. 대신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할리우드키드’를 꿈꾸며 극장으로 대거 몰려든 때도 60~70년대다.

    이때는 극장에 다니는 삼촌이나 형을 둔 학생이 학교에서 왕 대접을 받았다. 직원 ‘백’이 있는 친구 따라 혹시 공짜 관람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자랑스레 할인권을 흔드는 친구에 묻어 극장에 따라갈 수 없을까 요행을 바라는 아이들이 주변에 몰렸기 때문이다.

    극장 말단직원들은 포스터를 붙이러 나가면서 할인권을 ‘삥땅’했다.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빵집이나 맥주집 입구에 포스터를 붙이려면 가게 주인에게 잘 보여야 했는데 그때 극장측에서 ‘뇌물’로 내준 것이 영화할인권이었다. 가게 한 곳당 서너 장씩 할당받은 할인권 한 장을 몰래 빼내 만두집에 가면 주인은 찐빵과 만두를 공짜로 듬뿍 주었다.

    한편 영화상영 도중 필름이 끊기거나 정전 소동이 벌어져도 지금처럼 환불해 달라며 아우성치지는 않았다. 대신 관객들은 막간을 이용해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동행과 수다를 떨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금일 개봉! 손수건 없이 볼 수 없는 영화!” 개봉 첫날 극장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던 것도 60~70년대다. 지금처럼 홍보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영화제작사 직원들이 직접 발품을 팔며 홍보맨으로 뛰어야 했다.

    호객행위를 하던 직원들이 가장 꺼리는 사람은 개봉 첫날 맨 처음 표를 사는 여자다. ‘여자가 첫 손님으로 들면 재수 옴 붙어서 망한다’는 징크스가 강하게 신봉되던 시절, 저만치 여자가 극장을 향해 걸어오면 제작사 남자직원이 재빨리 매표소로 뛰어가 돈을 내고 표를 샀다.

    노란색으로 영화제목을 쓰지 않는 사연

    흥행성공 여부는 극장이나 제작사 양쪽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극장과 제작사 관계자들 사이에 영화흥행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특유의 ‘징크스’와 ‘속설’이 많다. ‘부정탄다’는 이유로 개봉을 앞둔 영화감독은 물론이고 출연배우를 비롯해 전 스태프가 영화개봉 첫날까지 며칠씩 면도나 세수를 거른 적도 있다.

    영화 개봉과 종영을 ‘간판을 올린다’ ‘간판을 내린다’고 표현할 만큼 극장간판은 흥행성공 여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극장간판미술가들 사이에 지금까지 지켜지는 금기사항이 있다. 영화제목을 쓸 때 절대 노란색은 쓰지 않는다. 누렇게 떠서 흥행이 ‘황’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간판을 뉘어서 타넘지 않고, 간판 달기 전날은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 이날은 술을 먹어도 ‘작부’나 ‘아가씨’가 있는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혹시 부정 탈까 꺼리는 이유에서다.

    한편 80년대 초반 영화계는 ‘대종상 수상작이 흥행에 실패한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만다라’가 단성사에서 개봉돼 1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롱런을 기록했다.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연일 전회가 매진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서울 장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아리랑’ 상영,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유성영화) ‘춘향전’ 제작·상영, 한국 최초의 영화(무성영화) ‘의리적 구토’ 제작·상영 등 지난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숱한 한국영화사를 써온 단성사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중이다. 오는 2003년 11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시네시티 단성사’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그러나 까까머리 시절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단성사 주변을 기웃거리던 중년들 마음 한구석은 어쩐지 허전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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