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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 비화 · 1

단성사! 기생들의 무대에서 서편제 신화까지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단성사! 기생들의 무대에서 서편제 신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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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영화 역사와 나란히 걸어온 단성사(團成社)가 오는 가을이면 수많은 중년 ‘할리우드키드’들의 추억과 향수를 뒤로 한 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2003년 새롭게 태어날 단성사를 위해 100년 가까운 세월을 꿋꿋이 지켜온 터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랑’ ‘겨울여자’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이 거쳐간 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단성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수천 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줄잡아 1억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끌어들였다. 한때 ‘스펙터클’의 위용을 자랑하며 최고의 개봉관으로 인기를 누리던 단성사도 ‘최첨단 멀티플렉스’ 바람에 떠밀려 설자리를 잃은 것이다. 35년간 단성사에 몸담아온 조상림(66) 상무를 만나 단성사 극장에 얽힌 추억담과 지나간 영화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07년, 연예인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고 수익금을 사회사업에 쓸 목적으로 ‘연예 단성사’가 설립됐다. 당시 연예인으로 불리던 사람은 다름아닌 기생들. 열살 미만의 ‘동기’로 권번에 들어가 화류계 생활을 거친 기생은 ‘기생 환갑’이라는 20세가 넘으면 ‘노기’로 취급돼 설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다동, 광교 등 지역 이름을 딴 기생조합이나, 첩실이지만 남편이 죽었거나 없는 무부기조합, 남편이 있는 유부기조합에 가입해 화류계가 아닌 공연단으로 활동했다.

단성사는 이들의 활동 공간인 공연장으로 처음 출발했다. 당시 유명 연예 공연장은 단성사 외에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등이 있었다. 극장측은 공연날짜를 잡은 뒤 기생조합의 조합장을 통해 배우를 모았다.

기생들의 공연장에서 출발

기생들은 공연 때 창극이나 승무, 단가, 가야금 연주 등 자신만의 특기를 선보여 관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910년대 단성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인기를 끈 기생으로 박리화와 채희 등이 있다. 박리화가 서울 장안 최고의 승무 춤꾼이었다면, 채희는 단가의 명창으로 손꼽혔다. ‘명화’라는 기생은 오늘날 개그맨의 ‘원조’라 할 만하다. 노래 잘하고 양금 잘하고 남의 흉내내기 선수로 통하던 그는 능청맞은 흉내내기로 객석의 감탄과 웃음을 자아냈다. 유성기 녹음을 위해 일본 도쿄로 출장길에 오른 기생도 있었다.

연예 기생이 화류계에 진출한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어 10대 과부로 기생이 되거나 가난한 집안의 부모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는 경우가 보편적 사례. 개중에는 평범한 양민 출신이지만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 혹은 남편이 아편에 빠지는 등 가정파탄으로 이혼녀가 돼 화류계에 뛰어든 여성도 있다.

공연을 앞둔 기생조합은 극장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조합 명의의 신문광고를 게재했다. ‘매일신보’ 1915년 6월 18일자 광고란에 “음력 단옷날 밤부터 열흘 예정으로 다동조합 기생일동이 단성사에서 각종 특이한 가무로 출연하옵는바, 전일보다 실로 재미있고 볼만한 것이 많이 있사오니 다수 왕림하심을 앙망하옵나이다. 다동기생조합 일동”이라는 글귀가 실렸다.

당시 인기 높은 기생은 언론으로부터 요즘 스타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매일 한 명씩 신문에 소개됐다. 뿐만 아니라 요즘처럼 최고 인기 연예인 뽑기 투표도 이때부터 성행했다. 이즈음 극장 관객을 상대로 ‘최고 인기 스타’를 물은 결과 한성권번 출신의 김봉선이 1위에 올랐다.

단성사는 연예 공연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린 야학이나 고아원, 조산원(산파) 양성소에 기부금을 기탁하고 폭풍우 피해 서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에 앞장섰다.

반대로 세계적인 러시아곡마단을 불러들여 공연하기 위해 단성사가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공연경비 3000환 중 300환을 후원한 사람은 종로 화평당 약방 주인이었다.

변사들의 전성시대

1918년,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면서 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의 대표적 극장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곳이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이다. ‘최고 극장’을 둘러싼 신경전은 우연히 술자리에 합석하게 된 세 극장주의 ‘내기시합’으로 시작됐다. “좋다, 그럼 어느 극장이 최고인지 길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자.” 농담 반 진담 반 나온 얘기가 길거리 투표로 이어졌고, 결과는 단성사 2211표, 조선극장 742표, 우미관 669표로 승자가 갈렸다. 1등을 차지한 단성사는 자축행사로 추첨을 통해 투표 참가자에게 경품을 주었다. 당첨자는 등수에 따라 1개월에서 6개월치에 해당하는 활동사진 무료관람권을 받았다.

신축과 함께 본격 상설영화관으로 거듭 태어난 단성사는 극장 최초로 일류 변사 6명을 고용하고, 극장전속 관현악단을 기용했다. 일제 치하에서 해체 기로에 선 조선왕실 군악대 70여 명 전원을 흡수한 것. 관현악단석은 영화홍보를 위해 극장 전면 발코니에 배치됐다. 지금도 당시 발코니가 건물 입구 간판 뒤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악단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 그 소리가 서대문까지 퍼져나가 극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변사주임은 당대를 주름잡던 서상호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유창한 말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무대 위에서 스크린 장단에 맞춰 혼자 대화를 주고받으며 해설까지 곁들이는 변사의 인기는 무성영화 전성시대인 20~3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국내 무성영화뿐만 아니라 ‘바그다드의 도적’ ‘벤허’를 비롯한 해외 무성영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이라 채플린은 누구, 발렌티노는 누구 하는 식으로 외국 배우 전담변사까지 생겨났다. 관객들이 극장 앞 간판에 써붙인 변사 이름을 확인하고 입장 여부를 결정할 정도여서 변사 인기도는 흥행성공의 열쇠가 됐다.

한편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파극이 국내 활동사진에 영향을 주면서 무성영화 변사 특유의 말투가 생겼다. 감격조, 비탄조, 강조조 등 이른바 ‘신파조’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다.

영화계에서 신파조 말투는 무성영화가 사라지고 유성영화가 대중화된 60년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배우 신성일이 즐겨 쓰던, 힘이 들어간 말투나 억양이 과장된 말투 등이 신파조의 잔재였다. 70년대 초 깨끗이 자취를 감췄던 신파조가 복고바람을 타고 21세기 서울에 다시 등장했다. 추억의 악극단 공연을 표방하며 최근 무대에 오른 ‘불효자는 웁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무성영화 시대 신파조 향수를 자극하며 수많은 중년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밴드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를 돋우고 배우들 목소리를 대신하던 변사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으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편 단성사를 인수한 박승필 사장은 예전 광무대에서 데리고 있던 직원을 일본에 파견해 촬영술을 배워오게 했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 이필우였다. 그가 돌아올 때 촬영기재를 들여와 단성사는 한국 최초의 활동사진 ‘의리적 구토’를 제작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총독부가 유일하게 촬영기재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영화제작사나 극장에서 영화를 제작하려면 단성사에서 촬영기재를 빌려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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